최근 세계적인 추세로 볼 때 신임 음악감독이나 수석지휘자의 계약 기간은 대개 3년에서
5년 사이다. 하지만 국내 교향악단 지휘자들은 대부분 5년을 못 넘기고 지휘대에서 내려온다
50년간 사령탑에 머문 해외 오케스트라 지휘자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계적인 훌륭한 오케스트라도 짧은 시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 멤버들끼리 눈빛 교환으로 음악적 정보를 주고받는 실내악 정신은 오케스트라에서도 앙상블의 촉매제로 작용하는 법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지휘자의 역할 또한 중차대하다.
지휘자에게 악기란 오케스트라다. 아무리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가 값비싼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곧바로 불꽃 튀기는 선율을 뽑아낼 수는 없다. 지휘자도 마찬가지다. 두세 곡 연주하고 마는 객원 지휘라면 눈감고도 요리할 수 있는 ‘특선 메뉴’를 고를 테니 단원들도 별 불만 없이 넘어가겠지만, 한 시즌의 정기연주회 가운데 가장 많은 프로그램을 책임져야 하는 수석지휘자의 입장이라면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소화하면서도 교향악단이 세계 음악시장에 내놓을 만한 브랜드인 특유의 사운드까지 만들어내려면 상당한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
최근 세계적인 추세로 볼 때 신임 음악감독이나 수석지휘자의 계약 기간은 대개 3년에서 5년 사이다. 하지만 지휘자와 단원의 궁합이 전혀 맞지 않는 경우나 지휘자의 불가피한 개인 사정 때문이 아니라면 재계약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첫 계약 기간이 만료되었다고 새로운 지휘자를 구하는 것이 매우 번거로운 일일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연주 기량이나 앙상블 면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농익은 선율은 적어도 10년 정도 숙성되어야 제맛을 낼 수 있다. 그동안 다양한 개성과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수많은 지휘자들을 객원지휘자로 맞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상트페테르부르크 필·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베를린 필·보스턴 심포니 등 세계 굴지의 오케스트라로 손꼽히는 악단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수석지휘자의 재임 기간이 한결같이 길다는 점이다. 물론 요즘엔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지 않지만 1950년대 이전에는 ‘잘못된 만남’이라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1년 만에 새로운 지휘자를 찾는 결단력까지 발휘했다.
세계 정상급 교향악단의 역대 상임지휘자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재임했던 사람은 아마도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일 것이다. 1938년 전 소련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자마자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를 맡았고, 50년간 사령탑에 머물렀다. 건강 때문에 마지막 10개월 동안은 지휘대에 서지 못했지만 수석지휘자의 권한은 그대로 누렸으니 더 이상 행복한 지휘자는 없을지도 모른다. 바통을 이어받은 유리 테미르카노프도 올해로 27년째다.
또 다른 한 명의 최장수 타이기록 보유자는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빌럼 멩엘베르흐다. 그는 24세 때인 1895년부터 50년간 암스테르담의 ‘음악 시장’으로 군림했다. 베르나르트 하이팅크(1961~1988)·에두아르트 판 베이뉨(1945~1959)·리카르도 샤이(1988~2004) 등 이 오케스트라에서 재임 기간이 10년 넘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 밖에 10년을 넘긴 지휘자로는 유진 오르먼디(1936~1980,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주빈 메타(1977~, 이스라엘 필하모닉)·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55~1989, 베를린 필하모닉)·이반 피셰르(1983~,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등이 있다.
15년을 넘긴 지휘자 중 몇 사람만 더 들자면, 오자와 세이지(29년, 보스턴 심포니)·쿠르트 마주어(26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네메 예르비(22년 예테보리 심포니/15년 디트로이트 심포니)·게오르그 숄티(22년, 시카고 심포니)·사이먼 래틀(18년, 버밍엄 심포니)·세르지우 첼리비다케(17년, 뮌헨 필하모닉)·에사 페카 살로넨(17년, LA 필하모닉)·조너선 노트(14년, 밤베르크 심포니)·다니엘 바렌보임(15년, 시카고 심포니) 등이다.
5년도 지키기 힘든 우리 오케스트라 지휘자들
그렇다면 국내 교향악단은 어떤가. 한반도에 교향악 운동의 씨앗을 뿌린 지 아직 100년이 채 안 되었다. 서양음악의 본고장인 유럽은 물론 일본·중국에 비해서도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짧은 편이다. 하지만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역사와 뒤틀려 있는 음악시장의 구조를 감안하더라도 역대 지휘자들의 재임 기간을 들춰보는 순간 낯부끄럽기가 짝이 없다.
10년 이상 자리를 지킨 경우는 임헌정(25년, 부천시향)·정재동(19년, 서울시향)·임원식(15년, KBS교향악단)·이동호(15년, 제주도향)·서현석(14년, 강남심포니)·금노상(10년, 인천시향)에 불과하다. 그러니 국내 상황에서 상임지휘자로 5년 이상만 버텨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가운데 현재도 상임지휘자직을 유지하고 있는, 다시 말해 재계약을 통해 10년 이상 재임할 가능성이 엿보이는 경우는 정명훈(2005~2014, 서울시향)·강석희(2007~2015, 전주시향)·김홍재(2007~, 울산시향)·리신차오(2009~2015, 부산시향) 등에 불과하다.
외국의 경우 신임 지휘자의 계약 기간은 3년에서 5년이다. 하지만 국내의 경우 계약 기간 3년인 서울시향·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를 제외하면 KBS교향악단 등 대부분이 2년이다. 대부분 단원들과 불화로 5년도 못 넘기고 지휘대에서 내려온다. 상임지휘자 모집 공고를 다시 내지만 지휘자 풀(pool)이 턱없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이 교향악단에서 물러난 지휘자가 다른 도시의 교향악단의 ‘신임’ 지휘자로 부임하는 식이다. 여러 오케스트라를 전전할수록 이력서의 ‘스펙’은 더 늘어날 테니 서류 심사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는 지휘자 선정 과정에서 2년 단임이라도 지휘자 본인에게는 나쁠 게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짧은 위촉 기간이 아니라 다른 데 있다. 바로 지휘자 선정 과정이다. 2년도 채 못 되어 지휘자와 단원들 간에 불화가 싹트고 행정 당국에서 단원들 눈치 살피느라 지휘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일쑤다. 지휘자 개개인의 음악적 역량과는 별개로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한 선정 절차를 거쳐 뽑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작용한다.
지휘자 선정 과정에서 단원들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는 당국이나, 자기들 입맛에 맞게 ‘무난한’ 지휘자나 상대적으로 덜 피곤할 것 같은 외국인을 선호하는 단원들도 모두 문제다. 객원 지휘 한 번도 안 해본 지휘자를 뽑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물론 현재 상임지휘자가 객원지휘자 선정권을 갖고 있어 좋은 객원지휘자를 데려오지 않으려고 ‘방해’를 한다면 또 다른 문제다.
그렇다고 모든 후보가 객원 지휘를 해야 하는지, 선정위원회를 따로 둘 것인지, 둔다면 위원 구성은 어떻게 할 것인지, 두세 명의 후보로 압축될 경우 최종 결정은 누가 할 것인지도 매우 중요하다. 계약 기간 동안 지휘자의 거주지를 교향악단의 본거지로 제한할 것인지, 아니면 연습이나 연주가 있을 때만 비행기나 KTX를 타고 내려가도 되는지도 결정해야 한다.
교향악단은 지방의 중소도시에까지 하나씩 있는 데 반해 지휘자가 턱없이 부족하다. 국내도 모자라는 판에 한국 출신 지휘자들이 세계무대를 누비는 모습을 그리는 것은 그야말로 꿈에 불과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오페라 극장이 지휘자 양성소 기능을 담당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즌 중에 매일같이 오페라 아니면 발레를 상연하는 극장이 하나라도 있어서 매일 밤 누군가 지휘봉을 들고 오케스트라 피트에 서게 된다면 지휘자 기근 현상은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다.
국내 교향악단 지휘자의 짧은 재임 기간, 그에 따라 지휘자가 바뀔 때마다 흔들리는 오케스트라의 기본기와 앙상블로 인한 연주력 약화는 이 같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눈덩이처럼 교향악단 발전의 걸림돌로 커진 필연적인 결과다. 국민 행복과 문화융성 시대로 나가가려면 클래식 음악의 기본적인 공공 인프라인 오케스트라부터 개혁해야 한다. 오케스트라가 바로 서야 이 땅의 음악문화가 발전한다.
글 이장직(서울대 서양음악연구소 특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