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덴바움뮤직 대표 원형준 음악가가 체험 중인 분단의 벽

남북의 청소년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꿈만 같은 현실을 위한 그의 노력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5년 2월 1일 12:00 오전

린덴바움뮤직 대표 원형준  

음악가가 체험 중인  분단의 벽 

남북의 청소년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꿈만 같은 현실을 위한 그의 노력

2009년 여름. 그들이 함께한 순간도, 무대 위 분위기도 뜨거웠다. 2009년 7월 26일부터 8월 1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제1회 린덴바움뮤직 페스티벌. 지휘자 샤를 뒤투아가 참여한 이 페스티벌은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이나 일본 퍼시픽 페스티벌(PMF)처럼 교육적 기능을 강화한 페스티벌이었다. 오디션을 거쳐 선발한 100여 명의 음악도는 일주일 동안 미국·유럽 오케스트라 수석진의 강도 높은 지도와 뒤투아의 혹독한 훈련을 받은 뒤 8월 1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말러 교향곡 1번을 연주했다. 제2회 페스티벌도 2010년 6월 28일부터 7월 5일까지 예술의전당을 거점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7월 5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레오노레 서곡’과 백건우의 협연으로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를 선보였다. 이때도 지휘봉은 뒤투아가 잡았다.

두 해 동안 진행한 페스티벌의 엔진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린덴바움뮤직 대표인 원형준이다. 그에게는 하나 되어 다가오는 음악의 순간도 아름다웠지만, 그들이 모이기까지 과정 또한 소중했다. 그 감동을 잊지 못하는 원형준은 몇 년 전부터 남북청소년오케스트라를 구상하며 움직이고 있다. 꿈은 분명하다. 광복 70주년과 분단 70주년이라는 시간이 한데 포개진 2015년, 역사가 낳은 아픔을 음악으로 어루만지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분쟁 지역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출신 음악가로 구성한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예로 들며 “그들의 음악이 동과 서에 흐르는 아픔을 치유했다면, 우리는 남과 북에 흐르는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며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역사도, 나 자신도 아픔을 갖고 있더라

나는 1989년 줄리아드 음악원으로 유학을 갔다. 열두 살 때였다. 하지만 1998년 외환위기(IMF) 때 학업을 중단하면서 바이올린과 멀어졌다. 귀국 후 서른 살에 20사단 방공대대에 입대했다. 훈련 도중 어깨를 다쳐 의병제대했고, 한동안 바이올린을 잡을 수 없었다. 힘들었다. 지금까지 붙잡고 살아온 음악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음악에 다시 다가가면서 아픔이 조금씩 지워졌다. 린덴바움뮤직 페스티벌도 내 아픔을 치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음악의 또 다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생각이 성숙해질수록 음악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반경도 넓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남과 북이 오케스트라를 통해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상에만 머물러 있던 남북청소년오케스트라에 대한 뜻을 여러 곳에 비치자 국내외로 많은 호응이 있었다. 특히 뒤투아가 이 프로젝트의 음악감독으로 위촉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꿈을 함께 준비한 샤를 뒤투아

뒤투아에게 본격적으로 제안한 건 2010년 린덴바움뮤직 페스티벌을 준비할 때다. 그는 작곡가 윤이상과도 친분이 있었고, 평양을 두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분단국가의 청소년들이 ‘음악’을 다리 삼아 만나는 데 협조해달라고 이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뒤투아가 선뜻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함께, 그리고 나란히 걸어갈 길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2010년 MBC ‘시사매거진’은 뒤투아의 남북청소년오케스트라 창립 제안을 담아 ‘거장의 제안’ 편을 제작, 7월 11일에 방영했다. 2011년 2월, 나는 이 영상을 평양 벨칸토연구소장인 성악가 백태범에게 전달했다. 동영상은 곧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에 보내졌고, 한 달도 안 되어 북한 문화성으로부터 공식 초청장이 날아왔다. 당시 나는 통일부로부터 북한주민 접촉 승인을 받아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와 이메일을 주고받거나 통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뒤투아가 평양을 방문해 ‘8월 15일 남북청소년오케스트라 평양공연’이라는 확답을 받아왔다!

보이진 않지만 견고하게 서 있는 벽

뒤투아의 평양 초청을 도와준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박철 참사로부터 ‘친애하는 마에스트로 뒤투아 그리고 샹탈 쥐예에게’(Dear Maestro Dutoit and Ms. Chantal Juillet)로 시작되는 서신(2011년 8월 9일자)이 왔다. 남북청소년오케스트라 공연이 한미연합군사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으로 인해 연기되었다는 것이다. 공연에 관한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다. 이 프로젝트의 영감이 된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생각하면 같은 음악인으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바렌보임은 1999년에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2011년 8월 15일 임진각에서 연주하며 평화를 염원하는 음악을 들려주었는데…. 그런 음악의 장을 우리는 만들 수 없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이 프로젝트로 인해 많은 일을 겪으면서 의지와 철학이 견고해졌지만 솔직히 당시에는 우리도 뭔가 세계에 보여주자는 철없는 욕심만 앞섰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남북청소년오케스트라 공연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좀 더 멀리 보고 크게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2년에는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공연을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11월 16일 주한 스위스 대사관과 함께 벨기에, 러시아, 일본, 터키 등 주한 외국 대사들을 초청해 적극적으로 이 프로젝트를 홍보했다. 하지만 나 홀로 외국에서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데는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제3국에서의 합동 공연도 결실을 맺지 못했다.

제3국의 협력을 위해

좌절 뒤에는 또 다른 기회의 신이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내가 이끄는 린덴바움뮤직은 2010년 8월 주한 벨기에 대사관·주한 유럽대사관연합과 유로아시아체임버뮤직 페스티벌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당시 대사관 인턴으로 근무한 최영훈 씨가 그해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고, 나의 이런 구상과 계획을 옥스퍼드 유니언 회장에게 전함으로써 그곳에 초청을 받았다. 가수 싸이에 이은 초청으로 2013년 2월 27일에 ‘한반도의 미래 화합과 소통’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나는 판문점에서 남북 청소년들이 하나 되는 공연에 대한 희망을, 월남하지 못한 증조할머니의 묘소가 북한 개성에 있어 명절 차례상에 증조할머니의 술잔까지 올리는 개인사를 이야기하며 음악을 통해 남북이 느낄 교감에 대해 힘주어 말했다. 그 후 소식을 접한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가 다시 움직여 제3국에서의 공연이 조용한 탄력을 받게 되었다.

그냥 음악이 아니다. 평화를 기원하는 음악이다

기지개를 켜는 것은 쉽지 않았다. 공연에 대한 구체적인 기획과 오케스트라 구성은 둘째치고 이 프로젝트가 많은 사람의 기억에서 잊히는 망각과도 싸워야 했다. 조윤선 여성부장관(현 청와대 정무수석)을 통해 남북청소년오케스트라 프로젝트 제안서를 류길재 통일부장관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6·15남북공동선언 13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모임인 노르웨이 평화재단에서 르네 허스빅 사무총장을 접견했다. 그는 남북청소년오케스트라 공연에 대해서 노르웨이 정부의 지지를 얻어내겠다고 약속했고, 지금도 나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지지하고 있다. 주한 스웨덴 대사 라르스 다니엘손, 주한 영국 대사 스콧 와이트먼도 접견해 스웨덴과 영국 공연 협력을 부탁했다(이들과의 만남 또한 극적으로 이뤄졌기에 각 사연을 말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1990년에 초청한 세계경제 포럼인 다보스 포럼의 클라우스 슈바프 회장과 한국계 영국인 레이디 로더미어 자작부인에게 스위스와 영국에서의 합동 공연 요청을 전달했다. 또한 연세대 경영대 교수와 학생들, 미국 클레어먼트 칼리지, 주한 노르웨이 대리 대사 시비오른 텐피오르, 중립국감독위원회 스위스 대표 어스 거버, 대통령지속 청년위원회 멤버들과 남북청소년오케스트라 공연의 제3국에서의 성공을 위해 논의하기도 했다.

남북한청소년오케스트라는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이다. 아직 구성되지 않았음에도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와 독일 루르 피아노 페스티벌 그리고 올해 개막하는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초청장을 보냈다. 독일의 도이치 그라모폰과 유로아츠, 영국의 BBC와 도그우프, 프랑스의 아르테, 미국의 MTV 등으로부터 중계권과 DVD 배급 의향서를 받기도 했다.


▲ 바이올린이 마치 한반도의 모습 같네요. 가운데 놓인 활은…38선…

개인의 꿈이 아닌, 음악가들이 함께해야 할 운명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 공약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이행을 위해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 결렬되기는 했지만, 이를 통해 남북 간 대화와 교류가 오랜 기간 중단 상태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한편 결렬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남북 간 비공식 채널의 부재가 제기되었다. 통일부는 나와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의 사전 접촉 기간을 현재까지 연장했는데, 이러한 문화 교류 채널이라도 유지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는 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성사되면 남북청소년오케스트라는 두 곳 중 한 무대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는 7월에 개막하는 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고, 다른 하나는 8월 15일에 판문점에서 열릴 연주회다. 기다리면서도, 사실 막연히 기다릴 수만은 없다. 앞서 말한 대로 또다시 어떤 벽과 마주칠지 모르기에 나 자신을 끊임없이 움직여 이 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알리고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2013년 린덴바움뮤직과 중립국감독위원회가 한국전쟁 정전 60돌을 기념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스위스 회견장에서 린덴바움 피아노 앙상블 공연을 치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누군가 내게 묻는다. 남북청소년오케스트라가 눈에 보이는 평화와 통일을 가져다줄 거냐고…. 하지만 급하게 대답하진 않는다. 다만 남과 북 사이로 흐르는 역사의 골에 음악을 흘려보내는 건 지금까지 진행된 대화와는 또 다른 소통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그러다 보면 서로 짐을 내려놓는 날이 올 것이고, 차차 음악가들이 함께하며 한반도의 미래를 새롭게 쓰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 유럽 각국에서 보내온 초청장과 지지하는 내용이 담긴 서류들

사진 박진호(studio BoB)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