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은 잘 몰라도 된다. 하지만 윤중강은 알아야 한다. 그가 곧 국악이다.
1985년 제1회 객석예술평론상을 통해 등단한 뒤 30년 동안 윤중강의 주어는 ‘국악’이었고, 동사는 ‘듣다’ ‘보다’ ‘읽다’ ‘만나다’ 그리고 ‘쓰다’였다. 그는 그동안 쓰고 뿌린 글을 모아 2003년부터 평론‘집’을 짓고 있다. 10권의 책을 모으니 그만의 궤적과 화두가 보인다. 1집 ‘국악이 내게로 왔다’를 시작으로, 2집에는 ‘바뀌고’ 있는 흐름을, 3집에는 ‘방송’과 4집에는 ‘가치와 취향’을, 5집에는 ‘비평’을, 6집에는 ‘사람과 사람’을, 7집에는 ‘창작에 희망을’, 8집에는 ‘영화’를, 9집에는 ‘시대와 축제’를, 10집에는 ‘해답’을 담았 다.
“윤중강, 나는 지금까지 10개의 테마를 갖고 살아왔다. 다섯 개는 영원불멸하다. 가야금, 아리랑, 마이너, 아시아, 음악극이다. 국악도 나도 평론도 마이너다. 나는 ‘국중(국립국악중)’과 ‘국고(국립국악고)’ 출신도 아닌 마이너다. 평론은 연주·작곡·지휘·이론 중 마이너 중의 마이너다. 마이너에서 메이저로 가는 게 내 목표다.” 윤중‘강’을 타고 흐른 국악의 시간들. 그 안에서 그는 물꼬를 바꾸기도 했고, 때로는 물살을 거슬러 오르기도 했다.
장시간 각기 장소를 달리하며 진행한 두 차례의 인터뷰였다. 그는 1985년부터의 활동을 10년 단위로 ‘척!’ 하고 묶었고, ‘탁!’ 하며 풀어갔다. 이 글을 쓰면서 몇 개의 키워드로 정리해보다 든 생각. 이건 한 평론가가 지나온 흔적이자 아직도 그를 쌩쌩하게 작동시키는 에너지원이라는 것이다!
1985~1995년 ‘평론은 실천이다’
국악계 ‘공식 평론가 1호’ “1980년대는 ‘국악’이라면 곧 전통음악이었다. 1990년이 되자 창작국악이 더해지는 시대였다.” 서울대학교 음대 국악과 가야금 전공생 윤중강. 1985년, 그는 ‘‘숲’에서 ‘전설’까지-가야금곡을 통해 본 황병기의 음악과 사상’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했다.
날라리 공부벌레 “서울대에 국악과 창설 이래로 학점이 제일 좋았다”는 그에게 공부란 ‘늘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었다. 국악과 졸업 후 동 대학교 국사학과로 학사 편입했고, 동시에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에도 적을 두었다. 하지만 그 “공부란 ‘데스크 워크’가 아닌 ‘필드 워크’였다”. 봄과 가을, 권오성 교수와 함께 필드워크를 다녔고 철학자 김용옥, 작곡가 백대웅 등과 함께한 연구 모임 악서고회(樂書孤會)에서 열심히 귀동냥을 했다. 현장을 휘젓고 다닐 두 다리와 책상에서 회전시킬 머리를 단련했다.
노(怒·No)하는 평론가 대학생이자 대학원생인 그는 학교 밖으로 나서면 현장 평론가였다. “당시 안숙선·김덕수·박동진에 대해 사람들은 긍정만 할 때” 그는 ‘노(怒)’하며 ‘노(No)!’를 외쳤다. “큰 공연과 국악계의 헤게모니를 끌어내리려 했다. 명인·명창은 내겐 별 볼 일 없는 존재였다. KBS 1FM과 소극장에서 통용되는 작지만 소중한 공연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궁금해했다. “글을 쓴 ‘이 윤중강’이 ‘저 윤중강’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놀랐고, 그것이 내겐 곧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외롭고 힘든 시간을 버텼다.
윤중강=윤일해 방송작가 윤일해(尹一楷). 스스로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주었다. 1988년 방송을 제대로 알고자 처음 개원한 방송작가교육원을 찾았다. 그해 MBC TV ‘뽀뽀뽀’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듬해 본격적으로 KBS 1FM의 국악 프로그램과 인연을 맺었다. 이때의 경험은 평론집 2집 ‘국악을 방송에 담다’에 담겨 있다.
도쿄 유학생 1993년, 도쿄 예술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1997년까지 공부했다. 한·중·일을 아우르는 “범아시아적 시각을 갖고 싶었다.” 예술의 다방면에 해박한 평론가 박용구를 모델로 삼았고, 동양 삼국 문화에 박식한 수학자 김용운의 글을 즐겨 읽었다.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일군 삼각형으로 음악을 바라봤고, ‘악곡’과 그것을 연주하는 ‘악기’, 그리고 이 두 개를 낳은 ‘사회’”가 만든 삼각형을 공부거리로 삼았다. 거문고와 고토를, 조선 후기와 에도시대를 치열하게 비교하고 깊게 팠다.
노는, 유(遊)학생. 그리고 영화와 마이너 치열했으나 지도교수의 인정을 받기는 어려웠다. “할 만큼 했고, 모든 게 다 떨어진 시간···” (1)일본-(2)전통-(3)음악에 정진했던 그는 ①아시아-②현대-③영화에 매진했다. 공부를 위해 일본에 머무르던, 유(留)학생 윤중강은 영화와 예술을 흡입하며 노는, 유(遊)학생이 된다. “일본에서 영화를 실컷 봤다. 일본·중국 영화에 등장하는 소수자에 관심이 갔다. ‘나=국악=마이너’에 대한 생각을 키울 수 있었다. 정의신 감독의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가 와 닿았다. 마이너의 이야기에 유머와 위트가 담겨야 힘이 생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국과 일본, 그 사이로 흐르는 유(流)학생 흐를 유(流). 그는 한국과 일본 사이를 흘러 다니는 유(流)학생이기도 했다. 월요일은 일본에서 수업, 화·수·목요일은 한국에서 KBS 1FM ‘국악의 향연’ 진행자와 ‘문화 살롱’의 일본 통신원으로 출연했다. 그리고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금요일 수업을 듣고 그곳에서 주말을 보냈다. 방송 활동을 해서 벌어들이는 수입을 바탕으로 두 문화권에서 수업을 받는 ‘비행기 통학생’이었다.
하방(下放) 1994년은 국악의 해였다. “판이 많이 깔렸지만 국립국악원과 명인·명창만으론 그 판을 채울 수 없었다.” 한계가 보였다. “나는 대책 없이 ‘국악의 대중화’를 외치는 사람이 밉다. 그 운동은 ‘하방’처럼 해야 한다.” 하방은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에 지식인을 노동 현장으로 보낸 정책. “지역민과 생활하면서 지역성을 알아야 한다. 책상물림만 하고 대중이 알아듣기 쉽게 음표 쓰기만 하면 되는 건가?”
1995~2005년 ‘평론은 개혁이다’
‘국악의 대중화’라는 과제, ‘대중음악의 국악화’라는 명제 1995년과 1996년, MBC TV 국악 프로그램 ‘새미 기픈 믈’의 자문을 맡았다. 윤도현·강산에·안치환·한영애·이선희·노영심·인순이 등 대중가수들을 만나며 “대중음악의 파급력이 지닌 강점과 내가 지닌 강점”을 버무리던 때였다. “방송은 일회적이었다. 하지만 국악이 국악에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곳에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고, ‘국악의 대중화’의 방편으로 ‘대중음악의 국악화’를 생각해볼 수 있었다.”
‘만큼’이라는 지렛대 1990년대는 “‘국악=전통음악’에 창작국악이 더해지는 시기”였다. 자신보다 열 살, 많게는 스무 살 아래인 젊은 국악인은 새로운 음악을 들고 나왔다. 그는 ‘만큼’이라는 지렛대로 그들을 밀어 올렸다. “이춘희만큼 김용우도, 김덕수만큼 공명도 소중하다!” 김용우도 공명도 이제 권력이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지렛대로 새로운 얼굴을 들어 올릴 평론가가 필요하다.
의미의 다리를 놓은 생방송 2001년 국악방송이 개국하자 그는 더 바빠졌다. ‘윤중강의 2030’과 ‘이 땅의 오늘음악, 윤중강입니다’를 진행했다. 생방송을 통해 청취자와 교감하는 ‘순간’은 소중했다. “나는 방송에서 밑밥을 던지고, 게스트의 멘트와 음악 사이에 의미의 다리를 놓았다. 그 시간과 공간에서만 가능했기에 정말 소중했다.”
2005년~ ‘평론은 내일이다’
축제와 숙제, 그리고 아리랑 난장(亂場)을 벌였다. 1997년 ‘젊은 난장, 우리 음악의 가슴 벅찬 미래’의 프로그래머로 활약했다. 2004년과 2005년에는 국악 축전의 예술감독을 맡았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국악을 즐기려면 대중의 감성을 잘 아는 대중음악인의 참여가 절실하다.” ‘국악의 대중화’라는 난제를 ‘대중음악의 국악화’라는 명제로 풀어나갔다. 2004년 12시간 콘서트 ‘야야야 콘서트-국악과 밤을 지새다’를, 2008년 24시간 콘서트 ‘밤도 낮도 들썩들썩’을 기획했다. 국악계의 신기록이었다. 2012년 아리랑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을 맡으며 아리랑이라는 숙제도 풀었다. “아리랑은 생명체다. 역사와 과거에 근거한 아리랑이 아니라, 현재의 아리랑이 필요했다. 아리랑은 너의 아리랑, 나의 아리랑이 될 수도 있다. 대중가수들이 출연해 자기 방식대로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다.” 평론가로서 애정을 갖고 전주소리축제 안팎으로 훈수를 두기도 했다. 이 이야기들은 평론집 9집 ‘시대와 축제를 읽다’에 담겼다.
새로운 ‘흥’을 찾아 나서다 방송과 축제 등으로 국악과 대중의 간극을 확인한 그는 2005년부터 글 속에 변화를 불어넣는다. 비판하는 자로서의 ‘분’을 빼고, 읽는 자의 ‘흥’을 생각하며 썼다. 두 회의 국악축전이 막을 내린 2006년, ‘윤중강은 ○○○다’라며 멋대로 정의 내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우울했다. “신나게 살던 내가 위축되었다고나 할까. 국악계 사람들이 모이면 비생산적인 뒷담화밖에 없었다. 일본 유학 시절에 혼자 생활하던 때가 생각났다. 다시 혼자 영화와 책을 열심히 읽었고, 운동을 했다. 국악인이 아닌 사람들을 부지런히 찾아 만났다.” 영화, 그리고 연극과 뮤지컬 현장에 더 매진했다.
연출가 윤중강 2011년 평론가로서 부산국립국악원에 갔는데, 연출가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훈수를 두다 작품을 맡게 된 것. 그가 생각하는 공연의 3요소는 ‘3S’ 즉 스토리(story)·스타일(style)·시스템(system)이다. “처음이라 의욕 과잉”이던 그는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원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많이 부딪혔다. 부산국립국악원의 음악극 ‘부산아라’를 시작으로 ‘혹부리장구’ ‘잔치’ ‘인천 세 자매-홍예문 로맨스’ ‘바다의 연꽃’ ‘심불로’ 등을 연출했다. 일생의 테마인 아시아-아리랑-음악극이 팽팽히 맞물려 돌아갔고, 지금도 그러하다.
김해송과 이난영 연구 대상이든, 작품 소재든 그는 경성의 1930년대와 그 시절의 노래와 가수를 편애한다. 그중 최고는 김해송과 이난영. 당시의 민요와 가요, 익살과 해학을 담은 만요를 중심으로 시대-노래-사람이 어우러지는 콘텐츠를 만드는 데 치중하고 있다. “근대 인물의 삶이 녹아 있는 공연을 통해, 전통과 현대를 잇는 가교가 되고 싶다.”
윤중강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인터뷰로 나를 규정하지 말라. 이건 회고나 구술이 아니다. 나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렇다. 이건 그의 회고가 아닌, 지금과 미래를 일굴 에너지원이다. 평론집은 10집 이후로도 다섯 권 정도는 더 출간될 예정이다. 윤중강은 오늘도 공연장에 간다. 그는 방송과 집필로 국악을 생방송하며, 자신의 취향과 생각을 중계하는 평론가이자 연출가 윤중강이다.
사진 박진호(studio B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