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단 20주년을 맞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선택은 ‘김택수’였다. 국악관현악계에는 ‘김택수’가 처음이고, 김택수에게는 ‘국악관현악’이 처음이다
창단 20주년을 맞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선택은 ‘김택수’였다.
국악관현악계에는 ‘김택수’가 처음이고, 김택수에게는 ‘국악관현악’이 처음이다
1995년 창단된 국립국악관현악단(예술감독 임재원)이 창단 20주년을 맞아 미래를 모색하는 ‘리컴포즈’와 과거를 회고하는 ‘마스터피스’를 선보인다. 한마디로 미래를 담은 ‘지도’와 과거가 담긴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그 중 한 장의 지도는 작곡가 김택수의 손에 맡겨졌다. ‘다시 만들다’를 뜻하는 리컴포즈(recompose)는 국립국악관현악단만의 창작 정신과 의지가 반영된 단어로 ‘리컴포즈’ 공연에서 초연할 김택수의 ‘아카데믹 리추얼-오르고 또 오르면’(이하 ‘아카데믹 리추얼’)은 문묘제례악에 현대적 상상력을 가미한 곡이다.
사실 국악이 중심인 장(場)에서 ‘김택수’라는 이름은 낯설다. 아니, 그의 경력은 음악의 장(場), 그 어디에서도 낯설다. 서울과학고, 서울대 화학과·작곡과에서 수학했고 인디애나 대학원에서 작곡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력. 그렇게 그는 낯설고, 또 유명한 존재다. 5일 공연에서 초연될 ‘아카데믹 리추얼’을 놓고 오선지와 음표에 담지 못한 언어들을 인터뷰를 통해 나눠보았다.
최근 근황이 궁금하다.
화학과 시절을 포함하여 15년의 학생 신분에서 벗어났다! 자유로워진 일정 덕에 더 많은 작품 발표가 가능해졌다. 현재 상주 작곡가로 재직하고 있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와 9월 말과 10월 초 동안 유럽 투어를 다녀왔는데, 이때 비올라 협주곡 ‘코오’(비올라 이유라)를 초연했다. 한국 자장가를 테마로 한 음악이 어떻게 전달되었을지 궁금했는데, 코리안심포니가 연주를 성공적으로 선보여 현지인들로부터 긍정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뉴욕에서 아메리칸 작곡가 오케스트라가 주최하는 소닉 페스티벌에서 ‘Bounce’가 연주되었고, 한국에서는 앙상블 아이가 주최하는 인 페스티벌(iN festival)에서 바이올린 듀오 곡 ‘Homage to Anonymous Ancient Fiddlers’가 초연되었다. 아! 작년에 ‘객석’에 소개된 합창곡 ‘찹쌀떡’도 드디어 한국에서도 초연되었고.
다작하는 작곡가로 알려져 있는데 국악관현악 작곡은 처음이다. 국악기를 가지고 작곡한 경험이 있다면?
어릴 때 단소와 사물놀이를 배웠지만, 국악기를 이용한 작곡 경험은 많지 않다. 대금 연주자 김정승(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음반 ‘김정승의 풍류-弄’에 편곡자로, 해금 연주자 류정연(국립국악원 정악단)의 위촉으로 해금·거문고·대금을 위한 ‘Affekten 2010’을 써봤을 뿐이다. 신선한 경험이었고 어렵기도 했다. 국악기의 세계를 이해하느라 엄청 고생했다.
국악관현악단과 (서양)오케스트라의 차이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국악관현악단은 각 악기들이 ‘같은 음’을 연주할 때, 서로 미묘하게 음이 엇갈려 독특한 효과를 만든다. 나는 그 소리 자체를 참 좋아한다. 전통음악에 여백이 많다고 하는데, 이러한 소리의 특징을 즐길 수 있게 하려는 것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여백의 미학’을 거론하는데, 그건 악보로 옮겨놓았을 때 오선지의 빈 공간이 많이 보여서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대금과 피리가 같이 ‘하나의 음’을 연주해도 소리가 꽉 차게 들린다. 어떤 의미에선 굉장히 효율적인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국악관현악단은 가야금·거문고 등 탄현(彈絃)악기의 비중이 서양 오케스트라보다 훨씬 크다는 점도 흥미롭다. 현이 소리를 낸 뒤의 잔향을 수식하는 기법(예를 들어 줄을 흔들어 소리를 내는 농현)은 우리에게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서양의 관점으로 볼 때는 꽤나 드문 기법이다. 그래서 ‘한 음’에 접근하는 방식과 시선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초연되는 ‘아카데믹 리추얼’은 ‘문묘제례악’을 모티브로 삼았다. 이러한 선택에는 분명 이 곡을 접했을 때 받은 느낌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느낌은 무엇이었나? (문묘제례(文廟祭禮)란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서 지내는 제례 의식이다. 중국에서는 없어진 지 오래고, 한국에만 남아 있다.)
‘문묘제례악’을 처음 들었을 때 귀가 ‘번쩍’ 뜨였다. ‘어? 이런 국악도 있었어?’ 무엇보다도 그 단순한 구조와 각 음의 끝을 살짝 띄우는 제스처가 인상적이었다. 국립국악관현악단 측에 ‘문묘제례악’을 모티브로 삼겠다고 했을 때, 관현악단에서 자주 연주하지 않는 아악기(雅樂器) 사용과 관련하여 약간 난처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연주자들의 의견을 꽤 수용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문묘제례악’을 관철했다. 이런 이유였다. 하나, 몇 개 안 되는 고려 시대의 작품이자 현존하는 전통음악 중 가장 오래된 ‘국악관현악곡’이라는 점에서 ‘예전 것’을 돌아본다는 콘셉트와 맞아떨어진다. 둘, ‘문묘제례악’은 일종의 ‘개학식 음악’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의미와도 부합한다. 셋, 알려진 바로는 송(宋)나라에서 고려로 건너와 한국에서 더 보존·발전한 음악인데, 여기에 내가 지닌 서양음악적 문법을 접목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넷, 상대적으로 접하기 쉽지 않은 ‘문묘제례악’을 ‘리컴포즈’를 통해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다섯, 음색과 선율이 다른 음악에 비해 단순해 발전시키는 데 제약이 적을 것 같다. 이렇게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라며 공자에게 제사 지내는 음악 아닌가. 우리나라가 예부터 얼마나 학문을 숭상해왔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이 곡이 반갑기도 했다.
앞서 말한 대로 국악곡 두 곡이 국악 관련 경력으로는 전부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의 1부 전체를 떠맡는다. 몇 분 길이이며, 몇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나?
25분 남짓이다. 단악장이지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초장은 일종의 서주, 중장에선 ‘문묘제례악’의 일부 곡인 ‘협종궁’이 통째로 인용되고, 그것을 테마로 한 변주곡들이 나온다. 종장에선 서양음악의 피날레에서 애용되는 푸가 같은 모방기법을 시도했다. 이러한 선례를 발견하지 못해 겁이 나지만 시도에 의의를 두고 싶다.
예전에 정일련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국악관현악곡 ‘천(天)-Heaven’(임헌정 지휘·2015년 초연)을 작곡하면서 바이올린과 같은 서양악기에 사용하는 하모닉스 주법을 아쟁에 적극 도입하여 신비한 소리를 끌어내는 데 신경 썼다고 했다. 이러한 점들이 작곡가만이 지닌 매력, 혹은 작곡가가 특정 악기를 향한 ‘편애’를 느낄 수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혹시 ‘아카데믹 리추얼’에도 독특한 기법이나 악기를 통한 실험적인 소리를 담았는지 궁금하다.
‘아카데믹 리추얼’은 음향·구조·선율 면에서 꽤나 단순하다. 작곡을 공부하면서 집중 연마한 화려하고 세련된 음악을 만드는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라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원곡이 지닌 ‘큰 음악은 단순하다’는 뜻을 적극 반영하고 싶기도 했다. ‘재료의 맛’에 충실한 요리를 하고 싶었다. ‘문묘제례악’은 편경·편종 등의 타악기와 금(琴)·슬(瑟) 등의 탄현악기가 강세를 준 음을, 노래와 관악기가 받아서 길게 지속한다. 그러다가 그 음의 끝을 살짝 끌어올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 제스처에는 제사 지내는 이들의 ‘하늘에 닿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다고 느껴서 이 제스처(글리산도)를 곡 전반에 사용했다. 또한 한 선율 내에서 악기를 바꾸는 기법을 종종 사용하여, 음색의 ‘변화’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최대한 고르게 애정을 분배하고자 했지만 상대적으로 노출이 덜 되는 저음악기들, 예를 들어 저피리·대피리·대아쟁을 노출시키고자 했다. 타악기는 편경·축·부·어 등 ‘문묘제례악’에서 사용하는 것으로만 구성했고, 이번 계기로 양금의 매력도 재발견했다.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은 제례 의식에 쓰이는 음악인만큼 엄숙하고 느린 이미지가 강하다. 이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가는지, 아니면 예상외의 변주와 반전이 있을지.
엄숙까지는 아니고 진지한 분위기다. 서체에 비유하면 궁서체 정도다. 내 작품에 많이 나타나는 장난기를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아카데믹 리추얼’은 느리며 음과 음 사이의 여백도 많다. 그리스 신화에서 지혜의 신 아폴론은 리라를, 쾌락의 신 디오니소스가 플루트를 연주한다는 사실에서 (탄)현악기는 지성의 악기로, 관악기는 감성의 악기로 여겨져 내려왔다고 한다. ‘탄현악기는 음과 음 사이에 여백이 있어 선율을 이어서 들으려면 지적 능력이 사용되기 때문이다’라는 속설 때문이다. 이러한 신화에서 착안했고, 한편으로는 관객들의 상상 속에 생각할 공간을 남겨주고 싶었다.
초연에 최수열이 지휘봉을 잡는다. 어떤 지휘자라고 생각하는가?
같이할수록 신뢰와 호감 가는 사람이 있다. 최수열 지휘자가 딱 그런 사람이다. 힘들여 설명하지 않아도 의도와 마음을 잘 헤아린다. 나한테만 그런 건 아닐 거다. 그래서 왠지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웃음)
앞으로의 계획은?
작품 쓰고 발표하는 것이다. 판소리에 관심이 많다. 모교인 인디애나 음대의 위촉으로 성악가와 앙상블을 위한 작품을 쓰고 있는데, ‘판소리를 소개하는 판소리’라는 콘셉트다. 그것도 영어로! 코리안심포니를 위해서도 판소리 스타일을 빌려 성악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언젠가 오페라를 쓸 때 큰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품 활동 이외에 한국음악, 작곡가, 작품을 미국에 알릴 수 있는 방법도 모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