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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광은 늘 현재의 늪이다. 더욱이 그 영광이 현재에 재현되지 않는다면 내딛는 걸음걸음이 진창이 된다. 지혜와 관용, 여유와 성공, 그리고 안정적인 삶. 그렇게 흔히 나이 든 사람에게 바라는 것들이 있지만, 사실 나이가 든다고 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은 늘 새로운 날들이고, 내일은 늘 두려운 미래다. 매일 겁나지만 숨기는 법에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이 박제처럼 영상과 사람들의 기억에 기록되는 배우들의 경우, 더 많은 기대 속에 휘청거리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한때 청춘의 발랄함으로 활개 치던 배우들의 경우 나이 든다는 것, 그 나이만큼 성숙해진다는 것, 자신의 나이에 맞는 배역을 이어받아 배우 생활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꽤 힘든 생존의 과정이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Alejandro González Iñárritu, 멕시코, 1963~)의 ‘버드맨’은 슈퍼 히어로 영화가 일종의 ‘전직’이 되어 버린 노쇠한 배우의 이야기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때, 날개가 있었지
한때 ‘버드맨’이라는 슈퍼 히어로 영화 시리즈로 인기를 끌었던 주인공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은 영웅이라는 수식어에 갇혀 있다. 진정한 연기자로 인정받으며 재기하고 싶은 그는 영화계가 아닌 브로드웨이를 선택한다. 당연히 그 과정은 쉽지가 않다. 성공에의 집착은 강박이 되고, 그 강박은 환영이 된다. 극단은 늘 재정난에 시달리고, 캐스팅된 배우는 마땅치 않다. 게다가 공연 직전 교체된 남자 주인공(에드워드 노튼)은 제멋대로라 통제 불능이며, 리건의 매니저이자 딸(엠마 스톤)은 약물중독에 매사가 불만스럽다.
자기 생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를 연극을 준비하면서 리건은 버드맨의 환청과 환영에 사로잡힌다. 설상가상 애인은 임신한 것 같다고 하고, 이혼한 전처와 친구이자 제작자, 그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비평가는 리건의 주위를 맴돌면서 서서히 그의 내면과 갈등을 폭발시킨다. 감독 이냐리투는 이를 위해 리건의 심리를 내밀하게 쫓기보다, 리건의 움직임에 따라 유영하는 장면들 속에 리건을 중심으로 인물들을 계속 등·퇴장시키면서 그의 목을 조르는 주변 인물과 그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리건이 느끼는 강박증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21그램’과 ‘비우티풀’을 통해 삶과 죽음 사이의 철학적 사유를 녹여내며 거장의 반열로 접어든 감독 이냐리투는 ‘버드맨’을 통해 그 명성을 깊게 뿌리내렸다. 리건의 숨통을 조여 오는 삶의 무게와 과거의 환영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냐리투는 웜홀처럼 관객들의 시선을 고정시켜 버린 롱테이크 장면으로 주목받은 ‘그래비티’의 엠마누엘 루베즈키를 촬영감독으로 택했다.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는 이 영화가 마치 ‘원 신 원 테이크’로 촬영된 것 같은 기법을 선보인다. 장면과 장면이 아주 자연스럽고 세밀하게 이어져 있어, 언제 컷이 나뉘는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없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심장이 쿵 떨어져 내면의 분열을 겪게 되는 정통비극의 주인공 그 자체인 리건과 함께, 숨통을 조이는 압박감을 함께 체험한다. 마치 카메라가 리건의 호흡을 그대로 이어받아 숨 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연출과 촬영 기법은 비로소 리건이 진정한 버드맨이 되는 순간 관객들도 함께 해방감을 느끼게 만드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가장 화려한 도시 뉴욕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는 줄곧 폐쇄적인 극장 공간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매우 답답하다. 정말 버드맨이 된 것처럼 새의 시선으로 뉴욕을 누비는 화려한 장면과 그 쾌감을 배가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중력의 무게를 견디고
주인공 마이클 키튼의 캐스팅은 신의 한 수라 할 만큼 성공적이다. 영화 속 히어로물 ‘버드맨’을 통해 우리는 20년 전 마이클 키튼이 주인공이었던 팀 버튼의 ‘배트맨’ 시리즈를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게다가 영웅이라기에 마이클 키튼은 너무 노쇠해져 버렸다. 마이클 키튼은 리건의 신경병적인 몸짓을 따르며, 벗어진 머리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중년의 몸을 드러내면서 불운과 불행, 연민과 동정을 자아내게 만든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스티븐 호킹 역할을 맡아 보여준 빼어난 연기로 에디 레드메인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버드맨’의 마이클 키튼의 연기가 최고였다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리건이 세계적인 극작가 레이먼드 카버에게 ‘연기를 잘 봤다’는 메모를 받은 후 연극을 동경해왔다거나 수십 년간 냅킨을 소중히 아껴온 것처럼, 사람들은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서야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동료 배우와 평론가에게 냅킨의 가치를 무시당하고 리건은 한없이 무너져버리는데, 유튜브 동영상과 트위터를 통해 대중의 관심은 다시 리건을 향한다. 여기에 ‘좋아요’의 숫자를 통해 자존감을 느끼는 SNS 중독에 빠진 우리의 모습도 투영된다.
쿵, 심장이 굴러떨어진 것도, 나의 삶이 바닥으로 내던져진 것도, 묵직한 삶의 무게로 허리가 휘청거리는 것도 모두 중력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영화 ‘버드맨’은 그렇게 중력의 무게로 가라앉는 리건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렇게 ‘버드맨’을 보자면 점점 자신의 꿈과 멀어지고 먹먹한 현실의 벽 앞에 훌훌 날고 싶은 우리의 모습이 겹친다. 영웅을 연기하지만 현실에서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리건처럼, 우리에게도 버드맨 같은 영웅이 되어 훨훨 날아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버드맨’을 통해 우리는 이미 너무 노쇠해져 버린 우리 아버지, 혹은 점점 꿈에서 멀어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 혹은 미래를 묵도하게 된다. 그렇게 이 영화는 낭만적 관조도 복고의 기억상실도 아닌 현실 속 리건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꿈을 향해 한때 날갯짓을 했지만 지금은 추락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경험은 주로 씁쓸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살짝 달콤하기도 하다.
※ 칼럼의 제목은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글 최재훈(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다.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후 각종 매체에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