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렌, 호수의 여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1년 5월 17일 9:00 오전

오페라 속 여인의 삶과 사랑 8
엘렌

 

엘렌

호수의 여인

왜 엘렌은 절벽 위에서

‘아베 마리아’를
불렀을까?

찰스 레슬리 ‘엘렌의 섬’(1879)

 

 

 

 

 

 

 

 

 

 

 

 

 

 

성모 마리아에게 절박한 마음을 토로하는 기도 ‘아베 마리아’는 수많은 작곡가가 쓴 버전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곡을 꼽자면 바흐의 평균율 1번에 구노가 곡을 붙인 ‘아베 마리아(1859)’일 것이다. 드라마 주제곡으로 사용되어서 대중의 귀에 익은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도 있다. 이 곡은 1970년대 러시아의 무명 작곡가가 작곡한 것이 16세기 작곡가 줄리오 카치니(1551~1618)의 작품으로 둔갑했다는 설이 있다. 슈베르트가 작곡한 ‘아베 마리아’도 빠지지 않는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

프란츠 슈베르트

슈베르트(1797~1828)는 연가곡 ‘겨울 나그네’와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로 유명하다. 그의 곡 중 하나인 ‘아베 마리아’도 사실은 ‘호수의 아가씨’라는 연가곡 중 여섯 번째 노래다.
왜 이 연가곡은 슈베르트의 다른 연가곡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것은 슈베르트가 총 6곡 중 3곡은 여성을, 2곡은 남성 바리톤 가수를 염두에 두고 썼으며, 나머지 2곡은 남성 중창과 여성 중창을 위해 쓴, 그야말로 다양한 출연진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성 가수는 ‘엘렌의 노래’를 부르는 데 그중 세 번째 노래가 바로 ‘아베 마리아’이다. 1825년 슈베르트는 이 연가곡을 작곡하여 이듬해 출판한다.

아베 마리아, 정다운 아가씨.
처녀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단단하고 거친 바위 위에서 나의 기도를 그곳까지
보내드립니다.
우리는 조용하게 운명에 순종합시다.
그러면 당신의 성스러운 위안이 주어지겠지요.
아가씨에게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는 자식에게
다정하게 지혜를 주소서.

 

전투를 목전에 두고 올린 기도

월터 스콧

이 곡의 원작은 1810년에 출판된 ‘호수의 여인’이라는 스코틀랜드 문호인 월터 스콧(1771~1832)의 서사시이다. ‘웨이벌리’(1814) ‘아이반호’(1819) 같은 역사소설을 통해 입지를 굳힌 스콧은 작품을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드러내면서, 동시대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지배층에만 집중했던 이전 역사소설과는 달리 하층민까지 포함한 생생한 묘사가 특징이다.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는 잉글랜드의 자랑인 넬슨 제독의 동상이 있다. 그에 맞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에든버러 도심 한복판에 넬슨 제독 동상보다 5미터 더 높게 세운 구조물이 바로 월터 스콧 기념탑이다. 그의 서사시 ‘호수의 여인’은 영국 초기 낭
만주의의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진다.
작품의 갈등 구조는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여주인공 엘렌과 그녀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세 남자의 갈등이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 반란군의 수장 로드릭, 그리고 엘렌이 사랑하는 청년 말콤은 사각 관계로 그려진다. 두 번째는 엘렌의 아버지 더글라스와 제임스 5세 사이의 정치적 갈등, 마지막으로는 하이랜드와 로우랜드 사이의 스코틀랜드 지역 갈등까지 담고 있다. 복잡한 구도 속에 전투를 목전에 두고 보호를 간구하는 기도가 바로 ‘아베 마리아’의 내용이다.

아베 마리아! 온화하신 동정녀시여,
이 험하고 거친 절벽에서 간구하는
어느 동정녀의 기도를 들어주시옵소서,
제 기도가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옵니다.
적들은 간악하고 잔인하지만
아침이 올 때까지 안전하게 잘 수 있게 하옵소서.
오 동정녀 마리아여, 저의 근심을 보시옵소서,
어머니여, 애원하는 아이의 청을 들어주소서!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 순결한 이여!
저희가 이 절벽에서 내려가면
당신의 보호로 저희를 덮어주소서,
그리하면 거친 절벽도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당신이 미소를 지으면,
이 절망스러운 계곡에 장미향이 감돌 것입니다.
오 어머니여, 아이의 애원을 들어주소서,
오 동정녀여, 제가 당신을 부르나이다!
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 정결한 종이여!
대지와 대기의 사탄들이
당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저희 곁에 머물 수 없어 달아납니다.
하지만 당신의 신성한 위로를 구하기에
저희는 여전히 운명 앞에 조아립니다,
저희를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아버지께 간구하는 저희를 위해 기도하여 주소서.
아베 마리아!

 

로시니의 오페라 세리아

조아치노 로시니

그런데 슈베르트보다 먼저 ‘호수의 여인’을 음악으로 만든 이가 있다. 1819년에 오페라 ‘호수의 여인’을 작곡한 로시니(1792~1868)이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화려한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던 로시니는 1815년부터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에서 매년 오페라를 하나씩 올리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미 1819년 3월에 나폴리에서 ‘에르미오네’를 올렸기에 로시니는 다음 해 사순절에 맞춰 작품을 쓸 예정이었다. 그런데 가을에 오페라를 쓰기로 한 다른 작곡가가 일정을 맞추지 못해 로시니가 긴급 투입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유학하고 있던 프랑스의 작곡가 데지레 알렉상드르 바통은 당시 로시니에게 ‘호수의 여인’을 소개하며 오페라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고 한다. 아직 이탈리아 번역본이 나오기 전이었음에도 로시니와 대본가 안드레아 레오네 토톨라는 이 작품에 매혹되어 작업에 착수했다. 라신(1639~1699)이나 볼테르(1694~1778) 같은 프랑스 작가가 쓴 비극을 오페라로 만드는 게 유행이던 시절에 스코틀랜드 작가의 작품을 오페라로 만드는 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로시니는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스콧의 작품을 오페라로 만든 작곡가이다. 이후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대륙에는 스콧의 작품을 오페라로 재창작하는 유행이 시작되었다.
당시 나폴리 관객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나폴리에서는 관객이 셰익스피어 비극 ‘오텔로’의 비참한 결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앞서 있었다.(로마였다면 응당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지어야 했을 것이다.) 나폴리 청중은 음악의 수도라도 불린 과거 18세기의 유산을 기억하고, 전 유럽으로 뻗어 나간 나폴리 오페라의 전통에 긍지를 가졌다.
그뿐만 아니라 나폴리는 당시 이탈리아의 그 어느 곳보다 프랑스나 독일, 오스트리아 작곡가의 작품이 많이 연주되는 도시였다. 게다가 나폴리 극장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오케스트라(단원 80명)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로시니는 과감하게 음악적인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로시니가 다른 도시를 위해 썼던 오페라에는 대부분 서곡이 포함되지만, 나폴리를 위해 쓴 작품들에서는 서곡을 쓰지 않고 바로 드라마에 돌입했다. 그만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실험적인 작곡을 모색했다.
성악진의 위용도 대단했다. 나폴리의 뛰어난 성악 앙상블이 있었기에 작곡가는 그들의 역량을 최고치로 끌어내는 작품을 쓸 수 있었다. 로시니의 페르소나였던 소프라노 이자벨라 콜브란(1785~1845)이 주인공 엘렌(이탈리아식 이름은 엘레나)을 맡았고, 나폴리의 위대한 두 테너 조반니 다비드(1790~1864)와 안드레아 노차리(1776~1832)가 엘렌을 사랑하는 제임스 5세 역과 로드릭(로드리고) 역을 맡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결국 엘렌의 사랑을 쟁취하는 말콤 역에 바지 역할로 콘트랄토를 배치했다는 점이다.
1822년 빈에서 로시니 음악을 위한 축제가 열렸다. 여기서 로시니를 만난 베토벤은 그에게 “‘세비야의 이발사’ 같은 코믹 오페라나 더 많이 쓰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30세의 로시니가 거장 베토벤을 향해 품었던 설렘과 존경심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그를 코믹 오페라나 쓰는 가벼운 작곡가로 본 것이다.
하지만 로시니는 이미 오래전부터 오페라 세리아에 몰두하며 과감한 실험을 감행하던 작곡가였다. 로시니 권위자인 음악학자 필립 고셋(1841~2017)은 생전에 언급하기를 로시니의 오페라 세리아 중 현재 다시 부활할 가치가 가장 큰 작품은 ‘호수의 여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로시니 오페라 중 가장 낭만적이면서, 가장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스콧이 슈베르트와 로시니의 창작 중 어느 쪽에 더 흡족해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위로가 필요하다면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활력이 필요하다면 로시니의 ‘호수의 여인’ 중 엘레나의 마지막 아리아 ‘감정이 북받칠 때’를 추천하고 싶다.

이자벨라 콜브란

안드레아 노차리

1824년 파리에서 공연된 로시니 ‘호수의 여인’ 무대의상

 

 

 

 

 

 

 

 

 

 

 

 

 

오주영(성악가·독일통신원)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 쾰른과 마인츠에서 오페라를 전공했다. 마인츠 극장에서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로 데뷔한 후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오페라와 종교음악을 노래하고 있다

 


추천음반

 

로시니 ‘호수의 여인’ (1983년 페사로 로시니 페스티벌)
카티아 리치아렐리(엘레나)/루치아 발렌티니 테라니(말콤)/마우리치오 폴리니(지휘)/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 외
페사로의 로시니 재단과 음악학자 필립 고셋의 노력으로 로시니가 구현하려던 원본에 충실한 프로덕션이 탄생했다. 오랫동안 잊혔던 오페라를 이탈리아 출신의 소프라노 카티아 리치아렐리의 풋풋한 음성으로 즐길 수 있다.

 

 

로시니 ‘호수의 여인’ (1994년 밀라노 라 스칼라)
준 앤더슨(엘레나/록웰 블레이크(우베르토)/리카르도 무티(지휘)/라 스칼라 오케스트라 외
리카르도 무티의 정교한 지휘도 좋지만, 이 음반에서 눈여겨볼 것은 가슴으로 노래하는 테너 록웰 블레이크다. 로시니 레퍼토리를 부르는 가수로서는 드물게 흉성을 잘 사용한다. 덕분에 엘레나를 둘러싼 우베르토, 말콤, 로드리고의 매력 경쟁이 더 다채로워졌다.

 

 

로시니 ‘호수의 여인’ (2007년 빌트바흐 로시니 페스티벌)
소니아 가나시(엘레나)/막심 미로노프(우베르토)/알베르토 체다(지휘)/SWR 라디오 오케스트라 카이저슬라우테른 외
라이브임에도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주는 앨범이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고 있는 로시니 테너 막심 미로노프가 우베르토 역을 맡았다. 소프라노 소니아 가나시도 자신의 벨칸토 장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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