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레브레히트 칼럼
갈림길에 선 유자 왕
파격적인 그도 이제 40대에 접어든다. 깊어져야할 것은 무엇일까?
등이 넓게 파인 드레스, 짧은 치마의 젊은 여성이 무대 위에 등장한다. 그렇다, 이제 나는 패션 평론가가 되어 볼 셈이다. 물론 여성 음악가의 연주가 아니라 복장에 대해 말을 내뱉는 순간, 차마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SNS에서 맹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다.
변명해보자면, 유자 왕(1987~)은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쏠리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그는 다리를 좀 더 드러내기 위해 공연 휴식 시간에 늘 의상을 갈아입으며, 홀터 상의와 쇼트 팬츠를 입은 셀카를 인터넷에 계속해서 업데이트한다. 인터넷에서 ‘유자 왕’을 검색하면 그런 그의 사진을 한가득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허락된 ‘발언 규칙’상 유자 왕이 누구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그녀의 외모가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이제 이 금기를 깨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확인해보자.
왜 그는 음악으로부터 멀어지는가!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만약 유자 왕이 후기 현대음악계의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지면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열정 가득한 프로코피예프(1891~1953) 연주로 러시아인들의 질투를 사며, 위트 넘치는 리게티(1923~2006) 연주로 헝가리인들의 비난을 피한다. 코로나 상황이 일단락되고 일상생활로 돌아간다면, 유자 왕은 일류 공연의 섭외 1순위이다. 이번 카네기 홀 재개관 행사에서 주목받은 사람도 랑랑(1982~)이 아닌 유자 왕이었다. 유자 왕은 실로 빠르게 부상했다. 일류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DG)은 그녀와의 협상에 뛰어들었고, 유자 왕이 스피넷(소형 하프시코드)으로 슈톡하우젠(1928~2007)의 작품을 연주하고 싶다고 해도 몇 시간 안에 매진될 판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유자 왕은 자꾸만 몸매를 드러내며 음악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을까?
이는 어쩌면 그녀의 빠른 성공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중국 공산당원인 부모님 아래에서 자란 유자 왕은 9세에 음악 전문학교에 입학했고, 14세에 영어를 배우기 위해 캐나다에 보내졌다. 미국 커티스 음악원의 덕망 넘치는 피아니스트 게리 그래프먼(1928~)은 랑랑에게 했던 것과 동일하게 유자 왕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물론 두 사람은 판이하였지만 말이다. 태생적으로 쇼맨십이 강한 랑랑에 비해, 유자 왕은 그저 무대 위에 올라 빠르게 연주한 뒤 사라지고만 싶어 했다. 랑랑의 의상 담당이기도 한 캐나다 출신 디자이너 로즈마리우메츠가 디자인한 몸에 딱 붙는 의상을 발견하게 된 후로 유자 왕은 조명과 앙코르 무대 속에서 자신 있게 배회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유자 왕은 2007년 3월 보스턴에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무대로 마르타 아르헤리치(1941~)의 공백을 메우며 첫 행운을 거머쥐었으며, 2년 뒤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2014)가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한 부유하고 유명한 솔리스트와 결별한 후, 그가 요청한 대로 유순한 후임자 자리를 맡으며 두 번째 행운을 잡는다. 20대 중반에 혼란스러운 환경 속에서도 일류 아티스트가 된 것이다. 하지만 여러 에이전트를 거치며, 비즈니스호텔에서 유명 페스티벌을 오가던 유자 왕에게는 장래를 살펴볼 시간도, 그를 살펴줄 지도자도 없었다. 12cm 굽의 루부탱 하이힐을 신은 여름밤의 고양이처럼 그는 위태로운 방랑자가 되어 클래식 음악계를 활보한다. 친구가 있냐는 물음에 유자 왕이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90대의 노장 피아니스트는 그래프먼 뿐일 것이다.
화려함 뒤에 가려진 작곡가들
자신의 의상에 관하여 묻는 기자들에게 유자 왕은 “젊은 사람들이 입는 옷”이라 답한다. 그는 쉽게 지루해하거나 극도로 순진한 모습을 보이며 인터뷰를 잘하지 못하는데, 이는 어쩌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자,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전략일 수도 있다. 영국 ‘옵저버’지의 음악평론가 피오나 매독스에게 유자 왕은 다음과 같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음악이 아름답고 감각적이라면, 왜 그에 맞춰 입으면 안 되죠? 이건 권력과 신념에 대한 문제예요. 어쩌면 제가 좀 가학피학성(Sadomasochistic)적인 걸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제가 저의 음악을 즐기려면 그 순간 제가 편안한 상태인 편이 나아요.” 뉴요커(New Yorker)지의 ‘프로필’ 칼럼을 위해 1년 넘게 유자 왕을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 프로이트주의자이자 작가인 재닛 말콤(1934~2021)은 유자 왕이 가진 우울증 성향을 알아차렸다.
음악적 논의는 (유자 왕의 말을 빌자면) 금세 ‘철학적 헛소리’로 퇴보하고, 작곡가들은 상투적인 표현으로 치부된다. 그는 프로코피예프를 ‘말썽꾸러기 소년’으로 언급하는가 하면, “슈베르트는 버렸어요” “모차르트는 파티광이죠”와 같은 말을 한다. 일부는 그의 무례한 언행을 귀엽다고 하지만, 유자 왕 또래의 세대에게 이는 별로 효과가 없는 말이며, 그들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도 실패했다. 기성세대는 유자 왕의 한마디 한마디가 짜증스러울 뿐이다.
음악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
이게 유자 왕에 대한 전부라면 그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다. 올해 34세가 된 그에게는 끝이 보이는 기한이 있다. 운동과 메이크업이 그 기한을 연장해줄 수는 있어도 40대를 넘어서까지는 무리이다. 유자 왕은 새로운 관점, 즉 자신의 신체를 초월하는 영혼의 증거를 찾을 필요가 있다. 올여름 그녀는 모차르트 협주곡을 시도했지만 모든 음은 빠르기만 했고 깊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 유자 왕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이다. 관객들에게 순간적인 만족감 그 이상을 주는 후기 소나타의 대표 바흐, 베토벤, 드뷔시와 그녀에게 버려진 슈베르트와 함께 하는 시간과 안식이 되어 줄 적절한 공간 말이다.
유자 왕은 지금 갈림길에 서 있다. 구스타보 두다멜, 야니크 네제 세갱, 샤를 뒤투아와 같은 지휘자들은 그를 과시용 아티스트로 사용하며, 음악 산업계는 그를 반짝이는 장식으로 취급한다. 그에게는 에이전트를 바꿀 여유가 더는 없다. 지금 유자 왕에게 필요한 것은 전면적인 의상 수정이다.
피아니스트 미츠코 우치다(1948~)의 어깨를 덮는 헌 옷 같은 드레스 차림에 노동자 임금보다 저렴한 구두를 신은 유자 왕이 카네기 홀 무대로 걸어 나오는 것을 상상해보자. 관객들은 새로운 모습에 깜짝 놀랄 것이다. 막바지에 변경된 프로그램에는 단조로운 베토벤 중기 소나타 세 곡이 추가된다. 앙코르 무대도 없지만, 그 어떤 비평가도 베토벤 협주곡에 의상이 없었다며 쉽게 비웃을 수 없다. 유자 왕이 음악만 남기고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나는 그가 돌풍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번역 evener
Yuja Wang stands at a crossroads
노먼 레브레히트 칼럼의 영어 원문을 함께 제공합니다. 본 원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Onto a stage bounds a young woman in a backless gown slit up to the hip, or a micro-dress cut an inch below the butt. That’s right, I’ve turned into a fashion critic. And the moment these words appear I shall come under a social-media onslaught for committing the unforgivable male offence of reporting what a female artist wears, instead of how she plays.
My defence is that Yuja Wang does everything possible to draw attention to her appearance. She habitually changes costume in a concert interval to show more leg and she feeds the internet with a stream of selfies in halter tops and skimpy shorts. Tap ‘Yuja Wang’ into your phone and you’ll get the full flaunty. Yet, under present rules of permitted speech, it is not supposed to affect our judgement of who she is and what she does. Well, let’s breach that taboo and see what happens.
First things first. I would not be wasting space on Yuja Wang if she was not an outstanding pianist, breathtaking in late-modern and post-modern music. She plays Prokofiev with a verve envied by Russians and Ligeti with a wit that eludes Hungarians. In the post-Covid return to normal, she is top draw at top venues. At Carnegie Hall’s reopening gala, it was Yuja Wang who got the star spot, not Lang Lang. That how fast she has risen. Deutsche Grammophon, the premium record label, jumps to her bidding. If she wants to play Stockhausen on a spinet, it would sell out within in hours. She can do as she pleases. Why, then, does she use bare cheek to distract from the music?
The speed of her ascent may have something to do with it. Raised by party-member parents in Beijing, she went to conservatory at nine years old and to Canada at 14 to learn English. The venerable Gary Graffman at Philadelphia’s Curtis Institute took her on as his protegee, as he had done once before with Lang Lang, though the pair could not be more dissimilar. Where Lang Lang was a born showman, Yuja Wang just wanted to get on stage, play fast and get off. Her discovery of skintight gear, made by the Canadian designer Rosemary Umetsu (who also tailors for Lang Lang) may have given her the confidence to hang around for flashlights and encores.
She got her first break in March 2007 when Martha Argerich flunked out of a Tchaikovsky concerto in Boston and her second two years later when Claudio Abbado fell out with a famous soloist at the plutocratic Lucerne Festival and called for a pliant replacement. By her mid-20s, Yuja Wang was an elite artist in a confusing milieu. Flitting from one agent to the next, flying from business hotel to branded festival, she had neither time nor guidance to acquire perspective. Like a summer night’s cat in five-inch Louboutin heels, Yuja Wang struts the classical scene as a precarious loner. Asked who her friends are, she could only come up with the nonagenarian Graffman.
To journalists who inquire about her outfits she says “That’s what young people wear.” She’s not good at interviews, appearing easily bored or extremely naïve – which may be a diversionary tactic, a means to conceal whoever the real Yuja Wang might be. “If the music is beautiful and sensual, why not dress to fit?” she teased Fiona Maddocks of the Observer. “It’s about power and persuasion. Perhaps it’s a little sadomasochistic of me. But if I’m going to get naked with my music, I may as well be comfortable while I’m at it.” The Freudian writer Janet Malcolm, who met her several times over a year for a New Yorker profile, noted a tendency to depression.
Musical discussion quickly degenerates into ‘philosophical bullshit’ (her term). Composers are packed off in cliches. Prokofiev is ‘a naughty boy’. ‘I’ve scrapped Schubert.’ ‘Mozart is like a party animal’. Some find her irreverence cute though it cuts no ice with her own generation and fails to draw them in droves to her concerts. Older heads find her soundbites irritating.
If that is all there is to Yuja Wang, she won’t be around for long. She is 34 and there’s a sell-by date to consider. Workouts and makeovers can offer an extension but not past forty. She needs to find a new dimension, evidence of a soul that transcends her physicality. She attempted a Mozart concerto this summer, all the notes skittering at speed and not a trace of depth. What she needs is time and space – time with Bach, Beethoven, Debussy perhaps and, yes, scrapheap Schubert – the late sonatas that offer so much more than instant audience gratification. As for space, a sabbatical would be in order.
Yuja Wang stands right now at a crossroads. Conductors – Gustavo Dudamel, Yannick Nézet-Séguin, Charles Dutoit – use her as musical arm-candy. The music business treats her as tinsel. She cannot afford another change of management. What she needs is a comprehensive change of wardrobe.
Imagine this: Yuja Wang walks onto the Carnegie Hall stage in a Mitsuko Uchida castoff gown that covers her shoulders and in shoes that cost less than a working man’s wage. There is a gasp from the crowd, a shock of renewal. A last-minute programme change inserts three mid-period Beethoven sonatas, sugar-free. There are no encores, and no critic gets an easy laugh by writing that the Emperor Concerto has no clothes. If Yuja Wang were to strip everything right down to the music, I have a feeling she could be a sensation.
글 노먼 레브레히트
영국의 음악, 문학 평론가이자 소설가. ‘텔레그래피’지, ‘스탠더즈’지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하였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음악계 뉴스를 발 빠르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