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수의 자의식을 다룬 두 영화
예술이 ‘꿈꾸는 미래’가 아닌, ‘극복해야 할 현실’이 되어 버린 어린 예술가들이 있다. 너무 일찍 미래를 결정해 버린 이들은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위로하는 법 대신, 경쟁하는 법부터 배운다.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숭고함은 날 선 평가 앞에서 좌절된다. 주인공의 자리를 위해 모두 애쓰지만, 이미 나는 알고 있다. 선천적 재능을 타고난 친구에 비해, 노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나의 한계. 우리는 그 순간 질끈 눈을 감아 외면하고 싶지만, 내 미래를 앞서 눈치채 버린 것은 나 자신이다. 극복해야 할 대상이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경쟁, 공포의 실체
무용수(혹은 지망생)들이 치러야 하는 경쟁은 앉을 수 있는 숫자가 줄어드는 의자 게임 같다. 아니, 최근 ‘프로듀스 101’ 오디션 방식이라고 설명하면 더 쉬울 것 같다. 순위가 매겨진 의자 위에 매끈하게 안착하느냐, 잉여가 되어 순위권 밖으로 밀려나느냐 결정되는 다툼을 생각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더 자주, 아주 어린 나이부터 겪어야 한다. 방심한 사이 언제 순위가 바뀔지 모른다. 적나라하게 공격적인 이빨을 드러내는 동료들과, 그보다 더 세속적인 선생들 사이에서 드러난 민낯은 상상보다 더 예쁘지 않다.
이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 무용을 시작해, 예중-예고-예대로 이어지는 경쟁을 거쳐 유수의 무용단에 들어가기 위한 오디션을 거쳐야 무대에 설 기회를 얻는다. 빼어난 실력을 갖춘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이 설 수 있는 무대 위에서도 주인공의 자리는 단 하나다. 이미 시작부터 주연과 조연, 그리고 군무로 나뉘는 치열한 생존 게임에서 아이들은 패배와 좌절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야 한다. 치열하게 노력하고, 열정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꿈을 꾸게 했던 예술이 어느새 과제가 되고, 미래의 숙제가 되고, 극복해야 할 장애가 되어가는 과정을 계단처럼 겪는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인생에 다른 선택지,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윤재연 감독의 ‘여고괴담: 여우계단’은 완성도와 메시지의 전달에서 다소 휘청거리고 있지만, 너무 일찍 미래가 결정된 예고생들의 날 선 경쟁을 차갑게 바라보는 영화다. 사다코의 짝퉁들이 오가는 시시한 공포 속에서도, 이 영화를 주목하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오디션 참가자를 가르는 학내 오디션, 늘 자기보다 뛰어난 친구에게 밀려 주인공의 자리를 놓친 아이는 가장 친한 친구가 신을 토슈즈에 깨진 유리조각을 넣는다. ‘지젤’의 한 장면을 추는 아이는 깨진 유리에 발가락이 찢기면서도 웃으며 ‘지젤’ 오디션을 마친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친구를 다치게 하는 아이보다, 발이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소녀를 비추는 장면이 훨씬 더 잔인한 현실을 반영한다. 너무 어린 나이에 미래가 결정된 아이들에게 오디션은 생존이라는 근원적 공포를 잘 드러내는 장면이다.
날개 없는 자의식의 추락
깨진 거울 조각은 그것이 투영하는 모습이 아니라 반영하지 않는 틈새 때문에 표현력이 강해지는 법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은 완벽한 발레리나가 되고 싶은 한 여인의 욕망 위로 깨진 거울을 들이밀면서 잔인하게 생채기를 내는 영화다. 부글부글 끓는 이야기와 생생하게 체감하게 만드는 주인공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그을린 식도로 뜨거운 물을 삼키는 고통과 이물감을 준다. 죽도록 노력하지만 나보다 더 잘하는 경쟁자, 친구인지 적인지 알 수 없는 관계들 사이로 권력에 의한 성적 유혹도 오간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사이로 자의식이 떠돌다 부서진다. 니나가 뜨거워질수록 화염은 스스로를 심지 삼아 활활 타오른다.
‘블랙 스완’의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에 따라 격정적으로 변화하는 발레 장면과 극의 격정을 온전하게 니나의 호흡으로 담아낸다. 니나의 움직임에 근거해 함께 돌면서 카메라도 함께 춤을 춘다. 이는 마치 춤의 현장에 관객들이 함께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낸다. 오르막이 없는 계단으로 심장이 쿵 굴러떨어졌지만, 몸은 새처럼 훨훨 날고 싶은 니나의 분열을 숨결까지 내밀하게 담아내는 것 같다.
사람들에게 가장 화려한 도시로 기억되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지만, 영화는 줄곧 폐쇄적인 아파트와 연습실 사이로 관객들의 시선을 가둬 버린다. 맘껏 먹고 싶은 욕망도 꿈을 위해 억누르고, 단 한 순간의 단잠에 빠져보는 법도 없이 발레단과 집만을 오가며, 종일 발레만 생각하는 니나의 모습은 사실 무용예술가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린 예술가 지망생 다수가 겪었을 부모의 욕심도 영화 속에 담긴다. 한때 화가를 꿈꾸었지만 니나 때문에 좌절한 엄마는 딸에 대한 원망과 함께, 딸을 통해 놓친 자신의 꿈을 되짚어 꿈꾼다.
휙 던져졌지만 어딘가에 가 닿을 곳 없는 너덜너덜해진 니나의 지친 마음과 몸 위로 점점 자신의 꿈과 멀어지고, 먹먹한 현실의 벽 앞에서 길을 잃은 어린 예술가들의 모습이 살포시 겹친다. 여기저기 고장난 나의 몸, 혹은 점점 꿈에서 멀어지고 있는 나의 현실, 애써도 달라지지 않는 재능의 한계, 그리고 어쩌면 밝지 않은 자신의 미래. 잔인하게도, 그 시선에 낭만적 관조는 없다.
그리고 그녀들
‘레옹’을 통해 아주 어린 나이에 세계적 아이콘이 된 나탈리 포트만은 ‘레옹’ 이후의 작품이 늘 싸움이라고 기억한다. 매 작품 그녀의 연기는 자신이 더 이상 마틸다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다르게 봐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틸다의 프레임에 아주 오랫동안 나탈리 포트만을 가둬 두었다. 나탈리 포트만이 아주 어린 나이에 겪었을 투쟁 같은 삶과 니나라는 캐릭터는 절묘하게 합이 맞아 니나의 신경병적 분열 위로 처연함을 더한다. 한때 청춘의 아이콘이었지만, 지금은 마땅한 배역도, 주목받는 일도 없이 뒤처진 위노나 라이더가 쇠락해 밀려나는 발레리나로 짧게 등장한다. 나탈리 포트만과 위노나 라이더, 두 사람이 한 화면에 잡히는 모습은 어쩐지 슬프고도 잔인하다.
글 최재훈(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