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란자(1921~1959)는 엄연히 성악가이지만 미국 팝의 전설적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와 닮았다. 생몰년도로 보면 란자가 먼저이니 프레슬리를 ‘팝계의 마리오 란자’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둘 다 어려운 환경을 뚫고 유례를 찾기 어려운 초대형 스타로 군림했으나, 식탐과 약물로 스스로를 파괴한 바람에 한창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마리오 란자란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이탈리아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날 당시의 본명은 알프레도 아놀드 코코차였다. 소년의 집안은 가난했지만 집안 축음기에서는 카루소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이것이 그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런데 예명으로 더 매력적인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모친의 이름 ‘마리아’를 남성형인 ‘마리오’로 바꾸었다. 성악가로 활동하고자 이탈리아 남자의 전형적인 이름을 선택한 것이다. 란자란 성도 어머니의 것이다. 그가 태어난 1921년은 위대한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48세로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카루소의 예술적 영혼을 란자가 이어받았다면서 열광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카루소’라 불린 대중적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란자는 픽션이 많이 가미된 전기 영화 ‘위대한 카루소’(1951)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는데, 책과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카루소의 모든 것, 이를테면 걸음걸이, 무대에서의 스타일, 심지어 사소한 버릇까지 익혔고 영화 속에서 카루소와 완전한 일체를 이루었다.
필자에게도 란자의 노래는 특별한 향수의 대상이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1970년대와 대학시절인 1980년대에 그의 노래는 라디오를 통해 흔히 들을 수 있었고, 그 카랑카랑한 테너 음성이 던지는 쾌감은 물론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레퍼토리는 유럽 테너들과 확연한 차별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대와 국경을 넘어 성악을 사랑한 청소년들에게 공통된 현상이었다. 조셉 칼레야(1978~)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몰타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에 접한 ‘위대한 카루소’를 통해 성악의 묘미를 처음 느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란자의 대표적인 노래들,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부터 오페라 아리아까지 18곡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담은 칼레야의 새 음반이 등장한 것이다. 란자가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난 후에! 사실 칼레야의 소리 특징은 란자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특별히 크지 않다. 광활한 성량과 짜릿한 음색을 지닌 란자에 비해 칼레야는 아기자기한 표현력과 부드러운 음색을 장기로 한다. 그래서 처음 들으면 이 음반의 매력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몇 개의 트랙을 경과하면서 점점 칼레야 특유의 매력에 반하게 된다. 도밍고의 ‘그대가 내게 왔기에(Because)’를 통해 노래가 더 널리 알려졌듯이 말이다. 세계성악계에 처음 알려질 당시부터 롤란도 비야손의 라이벌로 지목된 유망주답게 칼레야는 섬세한 뉘앙스와 여유로운 고음으로 청자를 사로잡는다. 갑자기 성량을 줄이는 메사 디 보체의 테크닉은 로베르토 알라냐, 혹은 예전의 명가수 베냐미노 질리나 니콜라이 게다의 실력을 넘어서고 있다. 그것이 영화음악이든, 오페라 아리아든 상관없다. 특히 아리아를 통해 칼레야의 진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듯하다. 젊은 나이에 심한 탈모로 고생했지만 지금은 무슨 수를 부렸는지 머리 숱도 많아졌으니 이제 칼레야에게도 높이 떠오르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