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연출의 역사에서 바이로이트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온갖 연극적 실험이 펼쳐진 독일의 오페라극장 중에서도 외국 오페라 팬의 관심까지 끌 수 있는 최선의 무대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기 때문이다. 특히 ‘니벨룽의 반지’라면 좋은 연출의 도움을 받아야만 장장 나흘 밤에 걸친 16시간을 견딜 수 있지 않겠는가? 하리 쿠퍼 연출ㆍ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에 의한 1991년ㆍ1992년의 ‘반지’ 영상물은 바이로이트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의 하나로 손꼽히는데, 이번에 블루레이로 재출시되어 더욱 완벽한 화질과 음향으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쿠퍼의 프로덕션은 그 이전에 프랑스 연출가 파트리스 셰로의 프로덕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76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시작된 셰로의 ‘반지’는 신화시대가 아닌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이야기로 재해석했다. 보탄을 위시한 신들은 쇠락해가는 기존 권력을 상징한다. 피에르 불레즈의 지휘도 비교적 빠른 템포를 취하면서 지나치게 장중한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피함으로써 연출자의 의도와 부합했다. 처음엔 바그너를 왜곡했다고 비난을 받던 셰로의 연출은 ‘반지’의 근현대적 의미를 잘 살린 역사적 프로덕션으로 각광받았다. 그 뒤를 이어 1983년, 피터 홀 연출의 비교적 온건한 ‘반지’가 고리타분하다는 평을 들은 것은 당연했으리라. 그리고 드디어 1988년, 동독 오페라 연출의 적자로 불린 하리 쿠퍼의 전위적 연출이 등장한 것이다.
이 프로덕션이 혁신적인 것은 캐릭터의 완전한 변화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선글라스를 착용한 신의 우두머리 보탄은 가죽 재킷과 청바지에 부츠를 신고 쇠파이프 같은 창을 들고 있어 마치 양아치 폭주족의 두목처럼 보인다. 가슴을 풀어헤친 채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지크프리트는 활력 넘치고 정의롭지만 철이 덜 들어보이는 람보 형의 영웅이고, 브륀힐데는 여전사의 면모를 상실한 채 상처받기 쉬운 영혼으로 고통받는 여인으로 그려졌다. 기비훙의 왕 군터는 폼만 잡을 뿐 정신적 깊이는 전혀 없는 멋쟁이, 그 여동생 구트루네는 거의 공주병에 걸린 환자다. 진지한 분위기는 파트리스 셰로보다도 옅어진 대신 독일의 레지테아터 전통이 빚어내는 황당함의 미학을 아는 관객에게는 지적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한스 샤버노흐의 무대 디자인은 종종 거대한 구축물을 등장시키고 있으니 미니멀리즘은 아니지만 심심할 정도로 단순화되어 있다. 대신 결정적인 순간마다 현란하게 투사되는 조명이 단조로움을 헤쳐 나간다. 또한 많은 장면에서 가수들은 뛰고, 바닥을 구르고, 기어 다녀야 할 만큼 많은 연기를 요구받고 있다. 대미를 장식하는 ‘신들의 황혼’ 말미에서 거대한 불길이 보탄의 성을 덮치는 순간에는 무대 위에 TV, 그리고 그것을 중계방송 보듯이 지켜보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악의 상징 알베리히가 그런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그의 앞을 한 쌍의 소년 소녀가 손전등으로 발 앞을 비추면서 지나가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가장 극적인 카타르시스가 분출되어야 할 순간에 관객들의 시선과 상상력을 엉뚱한 방향으로 돌려버린 극한의 레지테아터 효과가 아닐 수 없다.
하리 쿠퍼의 연출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고, ‘반지’의 줄거리와 상징을 잘 숙지하지 못한 관객에게는 불평이 더 많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만큼은 ‘반지’ 연주의 역사적 성과로 부르기에 전혀 손색이 없으리라. 바렌보임은 유태인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연주를 강행할 만큼 골수 바그네리안이며, 바그너 스페셜리스트로 불리는 오늘날의 여러 지휘자 중에서도 단연 최정상급으로 불릴 만하다. 복잡한 악보에서 음악적 핵심을 단번에 꿰뚫어보는 천재성이 그 바탕이라 할 것인데, 이 공연에서도 꼭 치밀한 계산에 의한 해석이 아니라 천변만화하는 바그너의 극적 전개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음악성이 돋보인다. 예를 들어 ‘발퀴레의 말 타기’에서 템포를 약간 늦춰 잡음으로써 귀를 잡아당기는 흥분감은 옅어진 대신 다음에 이어지는 지클린데와 브륀힐데의 비극적 운명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손쉬운 유혹을 이겨내고 바그너가 의도한 드라마로서의 어려운 승리를 얻어낸 것이다.
출연진은 크나퍼츠부슈ㆍ숄티 혹은 카라얀의 전곡 음반에 출연한 전설적 바그너 명가수들에 미치지 못한다. 물론 가수들의 레벨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도 있겠지만 연기를 펼칠 줄 아는 ‘노래하는 배우’를 뽑자면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국인 베이스 강병운(필립 강)이 ‘라인의 황금’과 ‘지크프리트’에서 거인 파프너를, 그리고 ‘신들의 황혼’에서 지크프리트만큼이나 중요한 악역 하겐을 맡고 있는 것은 정말 자랑스럽다. 또 노래로, 연기로 자기 몫을 완벽히 해내고 있다. 하리 쿠퍼의 연출에서 하겐의 캐릭터는 명백히 ‘보탄의 모습을 한 악당’이기 때문에 그 비중이 한층 확대되어 있으니 보는 이의 시선도 강병운의 하겐에게 고정될 수밖에 없다. 올해 바이로이트 무대에 오르는 새 연출의 ‘반지’에서는 전승훈(아틸라 전)이 하겐을 부를 예정이다. 강병운을 보면서 그의 뒤를 잇는 전승훈의 대성공을 기원한다.
글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