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화와 패트릭 킨머스의 만남

아름다움 구출작전 BEAUTY TO THE RESC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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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4월 1일 12:00 오전

좀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만남이었다. 독일 쾰른의 한 폐차장, 늦겨울의 눈 쌓인 아침. 연출가이자 제작자·잡지 발행인 그리고 젊은 예술인들의 멘토를 겸하는, 선구자 여배우. 그녀가 닮은꼴인 그를 만났다. 디자이너·큐레이터·건축가·작가·작곡가이자 연출가. 그들이 선 장소는 이 도시의 산업화 시대처럼 꾸며졌다. 춥고 불편한 그곳에서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사진기 앞에 섰다. 오직 예술을 위하여, 그들은 살아남았다.
윤석화는 동아시아의 유명한 여배우이다. 실제의 삶은, 그녀가 연기했던 수많은 전설적인 인물들을 동시에 담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모두 독립적이고 단호하나 여성스러운 인물들이었다. 패트릭 킨먼스(Patrick Kinmonth). 영국판 ‘보그’의 전 아트 에디터이자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선정 올해의 혁신가상(Innovator of the Year Award) 수상자이기도 한 그는 전설적인 비전을 지닌 인물이다. 로마에 위치한 리처드 마이어의 환상적인 아라 파 키스 입구에서 선홍색 발렌티노 드레스를 입고 방문자를 맞이하는 마네킹 군단이 그의 작품이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다룬 유명한 저서는 패트릭의 수많은 작업 중 일부일 뿐이며, 그의 20년 지기 친구이자 협력자인 마리오 테스티노와의 친분이 낳은 작품이다. 로버트 카슨의 여러 오페라 (‘반지’ 사이클과 라 페니체 극장 재개관작 ‘라 트라비아타’ 등)을 위해 제작한 무대 디자인에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낸 바 있다. 무용수 페르난도 멜로와 함께 한 프로젝트는 그를 작곡의 길로 인도했다.
윤석화와 패트릭 킨먼스, 두 사람은 열정적으로 예술에 대한 의견과 이론을 나누며 주변의 싸늘한 공기를 덥히기 시작했다. 사진작가가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얼음처럼 차갑던 트레일러 안은 둘의 대화가 낳은 마찰과 화합, 그리고 불꽃 튀는 논쟁으로 서서히 따스해져갔다.
그들의 대화에 잡담의 여지는 없었다. 윤석화, 그녀는 생각하는 바를 숨김없이 말했다. 이 심오한 철학적 대화에 그녀가 아는 유일한 방식대로 겁 없이 뛰어들었다. 패트릭, 그에게 더 이상의 탐닉은 필요 없었다.

글 Desmond Chewyn(‘객석’ 유럽판 편집장) 사진 Mika Ceron 번역 장동선

 

아름다움을 정의해보죠.

윤석화 아름다움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장 깊고 심오한 감정과 ‘우리’를 만나게 합니다. 그 무엇이든 연결점이 될 수 있지요. 비극이 아름다울 수 있고, 희극도 아름다울 수 있어요. 외면이 아름다울 수 있고, 내면이 아름다울 수 있죠. 아름다움에는 어떠한 제한도 없어요.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움이 우리의 영혼과 정신, 마음에 얼마나 극단적인 감정적 충격을, 깊고 심오한 감동을 느끼게 해주었는가, 오직 그뿐이에요. 한 명의 배우로서 말하자면, 아름다움은 마음으로부터 나와요. 우리가 살아있는 진정한 이유, 만약 그것을 찾는다면 저는 거기에 ‘좋다’ ‘가치 있다’ ‘의미 있다’ 하는 식의 이름을 붙이지 않겠어요. 하지만 예술가가 음악이 되었든, 미술이 되었든, 시가 되었든 상관없이 그것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사람들이 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스스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저에게는 그게 바로 아름다움이에요. 깨달음의 순간이야말로 예술의 ‘아름다움’이지요. 특히 공연예술에 있어서 나와 모든 것이 하나 되는 그 순간. 극적 강렬함의 표출.
패트릭 킨먼스(이하 패트릭) 모든 것이 한 공간에 있을 때, 감동의 추가적인 힘이 생겨납니다. 오페라가 이런 종류의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지요. 바그너가 ‘총체예술’이라 불렀던, 시각과 청각을 총망라한 종합예술. 이 총체적인 예술의 일부가 바로 청중입니다. 무언가 어마어마하고 놀라운 것이 지금 내 앞에, 무대 위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동시에 깨달을 때, 그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움 중 가장 큰 것에 속하지요. 그저 나 혼자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발견한 게 아니니까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흥분을 동반합니다. 예전부터 예술가는 외롭고 고독하다는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었죠. 그건 낭만주의자들이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표현의 순간을 찾기 위해서 홀로 다락방에서 고뇌하고, 완성된 작품이 액자에 끼워지고 미술관에 전시되어 대중에게 전달되었을 때 비로소 그 고뇌가 환희로 끝나는 예술가…. 현대의 삶 속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는 이야기일 겁니다.

‘아름다움’을 구출해야 하나요?

패트릭 좀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이지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전 윤석화 씨가 말한 것처럼, 감정의 분출, 극적인 강렬함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제가 말했던 ‘아름다움의 구출(Beauty to the Rescue)’은 미학적인 관점에서 본 ‘끝내주는’ 경험을 말합니다. 사람들의 감정에 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리하여 그들이 한 순간 멈추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경험. 그들의 지각과 인지를 바꿔놓는 일 말입니다. 고전적인 예술세계에서 미(美), 아름다움은 복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관련한 토론이 끊임없이 있었지요. 무엇이 이상적인 미(美)의 형태인지, 건축·연극·시학·음악·미술에서 형식의 완성이 곧 미(美)의 표상인지…. 우리시대에 와서 이러한 토론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미학의 역사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지요. 아주 복잡합니다. ‘추함(ugliness)’이, 심지어 예술가의 손 안에서조차도 우위를 점하는 시기를 지나왔습니다. 미(美), 그 자체는 매우 피상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의문시되거나, 또는 특정 파시즘과 엮이게 되는 경우도 많아 ‘위험한 것’으로 치부되곤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놀랍고 경이로운 아름다움은 너무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쉽습니다. 사실상 멸종 위기에 처해 있죠.
윤석화 예술은 스스로 다시 정화되어, 이 세상이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호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말이죠. 예술을 계속해서 착취하고, 다른 목적으로 무작정 이용한다면 미래에는 더 이상 예술이 존재해야만 할 어떠한 이유도 남아있지 않을 거예요.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아름다움을 다시 구출해내야만 하는 거고요.

‘아름다움’은 언제나 ‘피상, 그 이상’이어야 합니까?

패트릭 나에게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발렌티노 전시회의 경우 사람들은 그 전시의 주인공이 그저 옷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발렌티노의 작업 안에서 더 많은 것들을 찾아내거든요. 발렌티노 스스로조차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던, 그러한 부분들을 발견해내요. 일례로 자연과의 친밀한 관계 같은 거요. 전시에서 이런 이야기를 꽃을 통해서 풀어냅니다. 왜냐하면 꽃은 쿠튀리에 발렌티노에게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중요한 의미거든요. 한 쌍의 가위·실·바늘만 가지고 마치 실제 자연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세련됨을 창조해낼 수 있다면 그건 정말 엄청난 일이죠. 그의 작품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영감의 원천은 식물이 잎을 만들어내는 방식에서, 동물이 지니고 있는 모피의 질감에서 찾아낼 수 있어요. 게다가 그는 이탈리아 출신입니다. 탐미주의자들의 나라. 로마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건축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야말로 수천 년의 역사가 느껴지죠. 가장 훌륭한 그림과 조각들이 세계 어느 도시보다 훨씬 더 많이 모여 있지요. 발렌티노는 이 모든 것들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그 전시회에서 로마의 건축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간 안에 미묘하고 섬세하게 로마 건축양식을 담아내려 했지요.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 구조가 이미 서머싯 하우스(패트릭 킨먼스의 최근 전시 ‘발렌티노: 쿠튀르의 거장’이 열린 장소)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요소들이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진정으로 아름다운 무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 걸 원하지는 않습니다.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스토리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으니까요. 바로 이것이 포인트입니다. 깨달음의 순간을 뒷받침하지 못한다면, 무대 위에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의미가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표현된 바가 아닌, 그것이 담고 있는 암유(暗喩)와 상징입니다.

예술계에서 ‘추함’의 트렌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윤석화 모든 것은 하나의 반응이지요. 추함이 없으면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추함도 없습니다. 그 둘은 늘 함께 갑니다.
패트릭 매우 심오한 주제군요. 이 주제는 아방가르드의 탄생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전위주의는 인정된 아름다움, 즉 예술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아이디어를 부정하는, 더 깊은 진실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간의 충돌에서 생겨났으니까요. 아름답기 위해서 예뻐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 거죠. 그들은 부르주아 계층이 내세우는 품격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우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것을 원한다고, 속된 것을 추구한다고, 혁명적이어야 한다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서 낡은 것을 파괴해야만 한다고. 그 놀라운 결과가 20세기 초 디아길레프·스트라빈스키 등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그 작품들을 대단히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심지어 낭만적이라고 볼 수도 있죠. 그들 스스로는 충격적이기를 원했던 작품들이니 아이러니죠. 그들은 결코 낭만적이기를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것이 20세기가 목격한 예술에서의 어마어마한 폭력성·잔혹함·브루탈리즘(brutal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 아름다움에 반대하여 변증법적으로 극단적인 추함을 실험하던 시기는 지났어요.
윤석화 우리는 완전한 한 바퀴의 순환을 경험했고, 이제 필요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해내는 일이라 할 수 있겠죠.
패트릭 맞아요. 그 새로운 아름다움은 조화를, 대칭을, 미학적 완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아름다움이겠지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건 예술가들의 몫인가요?

패트릭 무엇이 아름다운지 예술가들이 결정한다….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죠. 우리는 청중이 즐길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가능성의 한계에 도달하게 만들려고 노력할 뿐이지, 메시지 전달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도록, 발현될 수 있는 지점으로 이끌어내는 역할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어떤 건지, 예술가가 저절로 알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과정 안에서 문득 깨달음의 순간에 도달하는 거죠. 그 과정은 결코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니에요. 어떠한 창작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고는 스스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오페라나 미술관, 그리고 예술을 주관하는 기관이 그토록 중요한 겁니다. 창작할 수 있는 기회, 나아가 청중이 그 창작품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 예술가들은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앉게 될 테니까요. 물론 거리에서도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그곳만이 예술가의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될 거예요.
윤석화 더없이 동감합니다. 예술은 사회의 일부가 되어야지, 결코 어두운 변두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니까요.

아름다움 대 추함, 미추를 논해볼까요.

패트릭 중요한 건, 아름다움의 반대가 추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추함은 아름다움 안에 내포되어 있어요. 그 둘은 마치 완벽히 투명한 유리 구체 두 개가 서로 겹쳐진 채로 왔다 갔다 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는 둘 중 어떠한 구체가 다른 구체를 안고 있는지 알 수 없죠. 이 취약함이야말로 우리 삶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만듭니다. 우리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존재 자체가 문제입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아름답게 살다가 젊음의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죽는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하지만 평생토록, 내 존재의 모든 표현 방식을 통해 일관되게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해요.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하려 노력하는가’도 중요합니다. 미묘하고 복잡한 논쟁이고, 늘 있어왔던 논쟁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당신을 ‘항상 아름다운 것들만 좋아했던’ 인물로 기술한다면, 원하는 바가 아닐 겁니다. 그것은 당신이 사는 세상에서 흔히 ‘추하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을 버리는 행위와 같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끔찍한 파시스트적 태도이죠.
윤석화 패트릭, 쾰른 오페라에서 곧 개막하는 당신의 최근 프로젝트, 프란츠 슈레커(1878~1934)의 걸작 ‘낙인 찍힌 자들(Die Gezeichneten, 1915)’ 역시 이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나요? 이 오페라에서 보여지는 잔혹한 테마들을 아름다움과 어떻게 연관시키나요?
패트릭 엄청난 추한 존재와 맞닥뜨렸을 때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예술에서의 진실과 정의이기를 희망합니다. 어린 여인의 순결을 파괴하거나, 사랑 없는 섹스, 욕망과 쾌락,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부자들의 만족감 등, 이 오페라에서 보여지는 수많은 테마들에서처럼 말이죠. 이들 모두 우리시대에서 목격할 수 있는 매우 현재적인 문제들이기에 이를 적절한 방식으로 풀어내면서, 핵심을 찌르려 노력할 겁니다. 문제 뒤에 감춰진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 안에, 바로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윤석화 연출가는 텍스트에만 의존하지 않아요. 우리에겐 텍스트가 함축하고 있는 암시들을 읽어내고, 단어와 단어 사이 침묵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의무도 있지요.
패트릭 그래요. 특히 ‘낙인 찍힌 자들’과 같은 작품에서 내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에 사용된 재료와 청중 사이의 거리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청중에게 극단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텍스트의 재료를 한번 살펴보자면, 첫눈에 보이는 것은 거의 터무니 없어요. 16세기 제노바가 배경인데, 우리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죠. 그러나 이를 현재로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면, 만약 연출가로서 원작에 존재하고 있는 현대적인 내용의 특성들을 살려내 표출할 수 있다면, 엄청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겠죠. 물론 음악 그 자체로도 이미 놀랍도록 훌륭해요. 내가 말하는 깨달음이 이미 거기에 있을 겁니다. 슈레커는 굉장히 흥미롭고 매력적인 인물이었어요. 오페라라는 장르 자체를 재발견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낙인 찍힌 자들’을 쓰기 전에 작곡한 오페라 ‘먼 곳으로부터의 소리(Der Ferne Klang)’에서는, 소리가 무대와 객석을 포함해 온갖 곳에서 들리는 실험을 했습니다. 영상 기술에도 매우 열려 있었습니다. 그는 전자 음악 워크숍을 열었던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었습니다. 온갖 종류의 예술을 총망라하여 다양한 모습을 하나에 담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한 최초의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거장인 동시에 볼품없는 아마추어, 환상주의자인 동시에 절대적 현실주의자인 예술가였죠. 그가 남긴 말들 중에는, 평소 스스로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알려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천재다. 나는 실패작이다. 나는 성공한 사람이다. 나는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 나는 지성인이다. 나는 본능에 충실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나 역시도 이들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페르소나들을 그가 창조한 작품 안에서 찾으려 노력하고, 그 작업을 통해 그들을 다시 회생시키고자 시도합니다.
프란츠 슈레커의 ‘낙인 찍힌 자들’은 패트릭 킨먼스의 연출과 무대 디자인으로 재탄생해 오는 4월 20일 쾰른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다.

윤석화와 패트릭 킨먼스의 대화가 커버스토리로 실린 ‘객석’ 유럽판 창간호.
월간객석은 2013년 4월, 유럽판을 창간하며 또 다른 세계로 뛰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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