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독일은 하나다 지난 11월 9일 밤 발표된 동독 정부의 여행자유화 실시와 베를린 장벽의 개방으로 인해 특히 서베를린으로 약 80여 만 명의 동독인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11월 11일 토요일 브라덴부르크 성문 위로 올라가고, 젊은 서독인들이 대형 연장들로 장벽을 부수고 있을 때, 장벽 앞에서 소련 출신의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바흐의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파리에 살고 있는 그는 전용 비행기를 타고 3시간에 걸쳐 베를린으로 왔으며, 군중이 많이 모인 장벽 앞에서 의자 하나만을 갖다 놓고 연주를 했다. “나는 이 장벽 앞에서 생명을 잃어버렸던 이들을 회상하며 연주를 합니다”라고 말하며, 연주를 마치고서 그는 이제 슈납스(소주 종류) 한 잔을 했으면 한다고 하며 미소를 띠며 자리를 떠났다.
카라얀의 쓸쓸한 퇴거와 요란한 친자확인 소송 카라얀이 베를린 필로부터의 퇴진이 쓸쓸하게 막을 내린 반면 카라얀은 최근 친자 확인 소송 문제로 구설수에 올라 매우 시끄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올해 45세의 여인이 제기한 이 친자 확인 소송은 카라얀이 법정출두 및 유전인자 검사를 거부함에 따라 법원축이 강제동행수사라도 불사한다는 강경책을 표명하자 카라얀은 자신의 입장을 후퇴해 혈액 및 유전인자 검사에 응했다. 여인의 입장에서 지금 시간은 상당히 촉박하다. 카라얀이 만 81세인 것을 고려할 때 앞으로의 5~7년 후의 일을 장담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지금 현재 부인의 딸들이 서둘러서 재산 상속을 마무리해버린 후라면 이 여인의 입장은 난처해지기 때문이다. (이 기사가 나간 다음 달에 카라얀은 사망했다.)
백혈병을 이기고 돌아온 호세 카레라스 스페인의 체레라다 성에서는 잃어버렸던 아들이 되돌아온 듯한 기쁨과 감격의 밤이 있었다. 다름 아닌 백혈병으로 죽어가던 호세 카레라스가 다시 살아 무대에 나타난 것이다. 1987년 8월 페레다 성의 음악축제에 참가하기로 되어 있던 호세 카레라스가 영화 ‘라 보엠’을 촬영하다가 바르셀로나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병명은 백혈병. 1년 만에 다시 페레라다 축제에 나타났다. 호세 카레라스가 컴백한 일은 유럽 성악계를 뒤흔들고 있다.
세계무용계, 남성시대가 몰려오고 있다 미국의 무용평론가 존 마틴은 1930년에 벌써 기필코 세계는 남성 무용수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예견했다. 뉴욕 시티 발레나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도 1989/1990 시즌을 겨냥해 해외로부터 우수한 남성 무용수들을 대량 확보하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1950년대 남성댄서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한 바실리예프, 환상의 기교 프랑스의 바빌레… 그를 잇는 남자 무용수들. 존 마틴의 예견대로 바야흐로 남성 무용수들의 시대가 온 것인가.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 예술제,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전 프랑스혁명 200주년, 자크 시라크 파리 시장은 이 역사적인 이벤트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의 하나로 현대예술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국제적인 명성의 예술가들을 특별히 초청했다. 자유·평등·박애·프랑스 혁명정신을 주제로 이루어질 이 기념비적인 작품들은 프랑스인들의 자랑스러운 과거의 역사와 새로운 미래의 세대를 연결시키는 동시에 현시대 예술창작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한 취지, 파리에서 초대한 6명의 예술가 중 첫 번째로 손꼽힌 인물이 백남준이다. 10월 말까지 계속될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전’ 중 선정된 한 작품은 파리시립박물관에 영구 보존된다.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에 취임한 정명훈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그들 문화의 명예를 걸고 세계 최고를 목표로 지은 파리의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은 5월 25일 새 음악감독을 맞아들였다. 그동안 자르부르켄 라디오 오케스트라와 피렌체 오페라극장을 맡고 있던 지휘자 정명훈이 이 두 곳을 사임하고 이날 바스티유 오페라에 정식으로 취임했다.
월북 무용가 최승희를 재조명한다 1926년 3월 장곡천 공회당에서는 일본의 이시이바꾸 무용발표회가 열리고 있었다. 10대 중반쯤 보이는 한 소녀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최승희다. 최승희의 오빠가 “너 저것 좀 배우지 않겠니?”라고 권했다. “배우면 될까?” “되지. 너는 체격도 좋고 또 음악도 좋아하고 학교에서 율동체조도 잘했으니까 된다.” “저걸 배워서 무엇하오?” 그녀는 오빠에게 물었다. “무엇에 쓰는 것이 아니라 배워가지고 조선에도 저런 예술이 있어야 한다.” 해방과 6.25전쟁을 전후한 그녀의 삶의 반경은 만주로, 다시 고국으로 그리고 북한으로 옮겨간다. 어디를 가든 그녀의 곁에는 늘 무용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