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순섭 홀딱 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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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5월 1일 12:00 오전

멋스러운 스웨터에 빵모자를 눌러쓴 이가 ‘객석’ 사옥 1층에 섰다. 바닥에는 갓통이며, 한복가방, 북 한 통이 두루 섰다.
챙겨온 필품을 둘러 입고, 선생은 두 시간 가까이를 쉬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의 기강과 역적이 얼마나 강하던지, 을씨년스럽던 봄추위를 후끈하게 데웠다. 우리는 책이 둘러싸인 도서실에 모여서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의 볼이 빨개지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볼이 달아오른다. 엉덩이가 들썩이고, 입 꼬리가 올라가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음색이라고는 “쩍쿵” 하는 북 한 통이 다였다. 그러나 이곳에는 금세 공간을 메우는 소리가 가뜩 일렁인다. 무대가 시작됐나 보다.
이것이 바로, ‘송순섭가’의 한 대목이렸다. 쩍쿵!

예술가를 가까운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공간…
한복을 차려입은 송순섭 명창이 들어온다.
선생님, 선생님 모시면 들어오시라니까 왜 벌써 들어오셨습니까.
그랬어?
네, 이렇게 된 거 그냥 시작하죠. 모두 알고 오셨지요? 송순섭 선생님이십니다. 송순섭 선생님을 모시고…, 모시… 제가 이렇게 떨고 있는 이유는 사실, 선생님과 방금 저녁을 하며 발음 교정을 많이 받았거든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선생님.
요새 우리나라 언어가 발음법이 전혀 아닌 게 많아. 언어가 참 중요한 것인데, 얼마나 중요하냐 하면, 언어는 그 민족의 중심이자 정신이거든. 언어가 잘못되고서야 어떻게 민족을 가르칠 것이며, 민족정신을 통합하겠는가. 요즘 언어가 장음·단음을 전혀 구분할 수가 없어. 내가 요즘 대학·대학원 강의를 나가고 있지만은 요즘 아이들은 ‘말’소리를 못해. 언어는 ‘말ː’인데, ‘말ː’ 소리를 못해, ‘돈ː’이 없으면 못살 세상에 ‘돈’소리를 못해. ‘돈ː이 있느냐 없느냐’ 해야 하는데, ‘돈이 없다’라고 말해. 요즘 젊은 사람들 언어 공부 많이 해야 해. 그렇게 몇 마디 했더니 이래요. (기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도 경상도 사람이거든.
네, 선생님 말씀은 “요즘 사람들이 장음과 단음의 구분을 못한다”이셨죠. 그리고 선생님이 물으셨습니다. “옛날에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일으켜 세워서 국어책을 읽혔는데 도대체 요즘 그런 시간이 있느냐.”
그랬지. 요즘은 아마도 학생들에게 글을 읽히는 시간이 없는 것 같아. 그러니 우리말 교육이 제대로 되겠느냔 말이야. 나는 판소리를 하는 사람이라 언어가 분명해야 돼, 판소리하는 이들 조차도 발음 안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판소리’ 단어 자체부터 발음이 안 된다니까? ‘먹꼬, 입꼬, 쓰고, 남꼬’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된소리를 못하게 하니, ‘먹고, 입고, 쓰고, 남고’ 하지. 어디 나라에 이런 법이 다 있어.
세종대왕이 말글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때에도, ‘훈민정음’ 자체는 한문이지 않겄소. 우리 한글은 뜻글이 아니라 소리글이지. 음을 바르게 해야 뜻이 나오는 거야. ‘밥 먹꼬 해라’라고 해야지 ‘먹고 해라’ 하면 안 되잖아? 나는 심히 걱정돼. 애들이 전부다 된발음을 못하는 건 교육이 문제여.
영어 교육과도 상관이 있지 않을까요?
상관이 있지. 서구의 발음들이 들어오면서 장음·단음이 허물어진 거야. 배운 사람들이 다 물을 흐리고 있어. 우리같이 못 배운 사람들은 지키려 하잖아. 특히 대학에서 일이 일어나는 거여. 대학 가서 맨 처음 듣는 말이 뭐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야. 한문·영어 섞어서. 그게 말이 되는 말인가. 그리고 요즘 사람들 하는 말 있잖아. ‘실버빌’ 그건 또 뭐야, ‘실(싫)어서 갖다 버린 집’이지 뭐야 그것이. 이건 내가 지은 소리여. 어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말이 되면 박수 한 번 쳐봐요.
모두 박수를 보낸다.
선생님, 저도 된발음은 요즘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발음, ‘된발음’이 아니라 ‘된ː발음’이지.
저는 ‘쌀’ 발음도 안 되는 경상도에서 태어났고….
아니야, 경상도에서 태어났든 아니든 할 수 있어야 맞는 것이야. 자, 한번 해보소. ‘된ː발음.’
모두 외친다. “된ː발음”. 흡족하게 웃는 송순섭 명창
선생님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서울대를 비롯해 국악과가 있는 대부분의 대학에 출강을 하고 계시지요. 학교에 강의를 하러 갈 때마다 겪으시는 일화가 있다고요.
나는 학교에 판소리를 가르치러 나가는 사람이야. 가면 문에 ‘레쓴실’이라고 적혀 있지. “저거 뜯어. 나는 여기 국악, 판소리를 가르치러 왔지 영어 레슨 하러 온 게 아니야, 저거 뜯어” ‘리허설’ ‘앵콜’ 다 뭣 허러 그렇게 써, “제창이요” 하지 나는.
한국 사람이 한국말 잘해야지. 영어 못해도 괜찮해. 시인 이외수 씨가 그랬더라고. “한국 사람이 영어 못하는 게 죄가 아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말 못하는 게 죄다”라고. 여러분 우리말 잘 합시다잉.
한문은 우리말인가요?
우리는 한자를 중국어라고 생각하는데, 옛날에 ‘동이족’이라고 있어. 한국 사람들도 동이족이었지. 그때부터 글자가 생겨났다고 해요. 그랑께 중국 글이 다가 아니여. 그런데 지금 한자를 쓰면 다 중국 글로 알잖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발표한 지가 언젭니까. 오백 년이 조금 넘었지. 우리는 오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여. 그 전의 역사를 저버릴 것인가? 그 전에도 다 말을 하고 살았지 않겠소. 옛 말, 옛 것 다 잊어버리고 앞으로만 나가서야 되겠는가. 그러면 ‘유구한 역사’라고 말할 수가 없지.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글에 관심을 두신 건 언제부터였나요.
어렸을 때 서당엘 좀 다녔어요. 천자도 읽고, 만물지경이나 ‘견문록’ ‘명심보감’을 읽었어. ‘소학’을 읽다가 말았는데, 지금 가장 후회하는 것은 대학 못 나온 게 아니라, 그럴 때 내가 한문 책 한두 권만 더 읽었더라면 하지. 그랬더라면 나는 지금 한국 판소리계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을 거야. 판소리는 우리 옛말 고사성어가 많아 다들 자기가 부르면서도 뭔 말인지 몰라. 그러니 듣는 사람도 적어지지.
이런 말이 있어. ‘곡고화과(曲高和寡)’라. 내용인 즉, ‘곡조의 수준이 높으면 이해하는 사람이 적다’라는 거야. 옛날 양나라 시대에 송옥이라는 선비가 살았는데, 글이 아주 유식해. 수준이 높으니까, 글을 아무나 못 따라했지. 임금이 송옥을 불러 “경은 글을 잘하는데, 어찌 경의 글을 다 따라하는 사람이 적은가” 하고 물었어. 그래서 그 선비가 대답하기를 “곡고화과”라 했지. 우리 판소리 역시 격이 높아. 그러니 일반 대중이 다 알아듣지를 못하지. 고귀한 고사성어가 많으니까. 요즘 가요들 모두 뛰고 발광에 미치는 데 그거 고사성어 같이 고고한 우리 문자 별로 없어요. 말이 아주 수월해. 그라니 다 같이 미쳐 발광하고 들고 뛰잖아. 우리의 고고한 판소리의 높은 예술성을 인정하고 아끼자 이 말이여.
처음 판소리를 누구에게 배우셨지요?
공대일 선생이 내 첫 선생이야. 그런데 공대일이 누군지 모르겄지요? 공옥진 씨 하면 다 알거야. ‘병신춤’을 잘 추던 공옥진 씨의 아버지가 공대일 선생이여. 그 다음 선생님이 김준섭 선생이고. 당시 공대일 선생의 학원에는 성우향 선생의 아버지 성원목 씨도 왔고, 당대 소리꾼들이 자주 모였지. 그런데 이분들이 모이면 박봉술 선생 소리를 칭찬을 해. “참말로 좋데” 하면서 칭찬하는 걸 거기서 여러 번 들었어. 얼마나 잘하면 저들이 칭찬을 할까 하고 생각을 했지. 그러다 어느 날 전라도 영암 장엘 갔다가 한 소리사(음반사) 스피커에 음악이 나와, ‘흥부가’가가 나오는 거여. 어찌나 좋던지. 못 가고 길에 서서 그 소리를 들었지. 끝나고 소리사에 들어가서 그 소리가 누구 소립니까 물었더니, 판을 뒤집어서 보여줘. 박봉술 선생 소리더라고. 이놈에 반해가지고 수소문을 해보니, 선생이 부산에 사신다고 해. 1963년 나는 보따리를 싸서 부산에 갔지. 그러다 1969년에 선생이 서울로 가셨어. 그렇게 나 혼자 부산에 떨어져 있었지.
박봉술 선생과의 일화도 있을 텐데요.
우리 선생의 전수자로 들어갔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말하기를 “아야, 내가 송만갑 선생의 비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럴 힘이 없네” 하시면서 눈물 바람을 하시는 거야. 그래서 나는 “선생님, 사람이 하는 일인데 해봅시다” 했어. 후에 기념비석도 세우고, 2003년 광주시문화상을 받은 상금 천오백만 원으로 제자들 삼백만 원, 해남의 김성용 양반 도움 얻어서 구례에 송만갑 선생 사업을 만들어내기도 했지.
이후 다시 송만갑 선생의 고향이 구례가 아닌, 순천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요?
송만갑 선생의 자서전이 뒤늦게 발견이 됐어. “나는 전라남도 순천군 낙안면에서 나서 낙안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라고 써놨어. 그리고 순천에 갔더니 전주대사습마냥 대사습도 있었지 뭐야. 국악사 왜곡이다 뭐다 오해도 많이 받지만, 기록이 그런 것을 어쩌겄소.
나는 부산, 광주를 거쳐 지금은 순천에서 살고 있어. 우리 선생 박봉술 선생님이 젊어서 순천에서 살았거든. 선생님의 자취를 따라갔어. 양쪽에서 계곡이 흘러 하나로 모이는 자리에 학원 자리를 마련했어요. 그런데 거기가 물이 안 말라. 제자들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여름이면 발랑 벗고 발 담가 소리하면 선생이 와도 몰라요. 꽃도 만발하고. 이게 다 선생을 그리면서 살다 보니 복을 얻었다고 생각해.
송만갑·박봉술·송순섭으로 이어지는 동편제 소리를 온전히 익히셨죠. 동편제 소리는 어떤 특징이 있지요?
그건 소리로 구별을 해드릴게요. 동편제는 시작이 진중하고 끝을 탁탁 잘라. 서편제는 소리를 아주 부드럽고 연하게 하지. 연하고 애절한 소리는 처음에는 듣기가 좋지만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오래는 못 해. 미인도 뜯어볼수록 실증이 나제? 못생겨도 보면 볼수록 귄(매력)이 있는 게 동편제여.

선생은 ‘수궁가’ 중 ‘별주부 모친의 만류하는 대목’을 부르며 두 소리의 차이를 보여준다.
당대 부산에서 판소리에 대한 시각이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혼자 남아 둘러보니 부산에 국악이 아무것도 없더라고. 부산 국악 발전을 위해서 애를 썼어. 3.1절 때는 안중근 소리를 부르고, 1972년에는 유관순 창극을 만들어 올렸지. 그게 내 첫 작품이야. 1965년에 한일국교정상화를 했어요. 근데 유관순 창극 올릴 당시 ‘왜놈들’이라는 가사가 있었지. 그러니 공연 허가를 안 해주는 거야. 한일이 국교 정상화담을 했으니, ‘왜놈’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고 해. “지랄마라 이놈들, 한일이 국교를 정상화했다고 유관순이 지하에서 ‘일본 양반들’이라 하겄소? 허가 헐러면 허고, 말라면 말라” 했지. 나는 그대로 밀고 갈란다 하고 공연을 올렸는데, 난리가 났어요. 당시 방송국 TBC에서도 와서 촬영을 해서 생방송을 했다니까. 그때부터 부산 역사에도 관심을 갖고 많은 노래를 만들어 불렀어. 1981년에는 ‘동래부사 송상현’, 가야금의 유래 ‘악사 우륵’, ‘이차돈’ ‘원효대사’ ‘설화공주’ ‘콩쥐팥쥐’. 수도 없어. 내가 부산서 오래 살았어. 24년을 살았으니까. 지금도 부산을 가면 관객 걱정이 없어요.
선생님이 만드시는 소리판. 전성기가 언제였습니까?
2000년 한창 판소리 완창 공연을 하던 때가 있었어. 경상도, 전라도, 서울 오가며 완창 공연을 열었지. 그해에 다섯 번 완창 공연까지 했는데, 해남 대흥사에서 11월 10일 밤 공연을 하다가 풍으로 쓰러졌어. 밤에 병원으로 실려가 치료를 받고, 그 이튿날 돌아와서 11월 18일 국립극장 대극장서 판소리 유파 발표를 했지. 팔다리를 흔들면서 공연을 하고, 병원으로 다시 가 침을 맞았지.
그러다 이듬해 2011년에 문화재청 문화재과에서 전화가 오기를, 올해 문화재 심의가 있으니, 적벽가 완창을 해야 한다는 거야. 풍으로 쓰러져 있는데 완창이 되겄소? “내가 이 몸으로 어찌 완창을 하겄냐. 가을로 공연을 연기를 해달라고 해라” 하고 제자를 시켜 전했지. 연기 신청을 했는데, 근데 4월 23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그러니 연기가 된 줄 알았어. 그러다 4월 말이 되니까, 대뜸 다시 연락이 왔어. 5월 말까지 공연을 못 올리면 이번 문화재 심의에서는 보류라고 해. “그럼 5월 31일, 날 받아” 했지. 그랬더니 집안에서도 제자들도 안 된다고 난리가 나. “허면 안 됩니다. 허면 죽습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하라고 하겠어요? 못하게 말리는데 나는 “나, 무대에서 소리하다 죽을란다”라고 말했지. 옛말이 “예술가란 무대에서 나서 무대에서 소리하다 죽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했지 않나. 그날로 매일 마다 10분, 20분 늘려가며 소리를 했지. 그날 거기서 완창을 제대로 했어. “좋다, 나 살았다. 나 이 몸 가지고도 완창했으니 살았다”. 그때 그 기분 가지고 오늘까지 살아 있는 거야.
모두 박수를 쳤다.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아요? 내가 저 내년이면 팔십이여. 지금 일흔여덟이란 말이요. 작년에도 네 시간 완창을 했어. 네 시간 여러분들 책을 읽어보쇼. (모두 웃는다) 그 네 시간을 소리를 불러냈단 말이여. 그러니 뭣이던지 무서워하면 안 돼. 헌 만큼 결과가 있단 말이야. 무슨 일이더라도 용기를 가지고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단 말이지.
나는 부산에서 호떡장사도 했어. 소리로 인정을 못 받으니까, 그만 헐려고. 팔자에 소리할 운이 있는가 그것이 안 되더라고. 심지어 호떡장사는 어땠는지 아요?

‘호떡 팔던 이야기’가 한창이다. 객석에서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 자리가 옛날 부산상고 자리여. 지금은 롯데호텔·롯데백화점이 들어서 있어. 이제 롯데호텔 커피숍에 가서 거기를 내려다보고 “옛날 내가 호떡장사 하던 곳이다” 하지요. (모두 웃는다) 웃음이 나오지요.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없으면 그런 소리 못할 것이야.
배운 삶이나 못 배운 사람들… 옛날 그런 대접 구분이 암담해. 나는 양반집 자손이여. 집에서는 양반집 자식이 소리한다고 푸대접 받고, 국악사에서는 자기들 족보가 아니라고 푸대접 받고, 설 자리가 없었어. 여자들이야 그때에는 노래하면 떡이 나왔어요. 남자는 그것도 없어. 나는 약장수들 없었으면 아마 소리 못했을 거야. 거기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소리하고 했지. 우리 국민들 모두가 다 아끼고 박수를 쳤으면 문화재가 될 필요가 없지. 판소리가 문화재 된 지 50년이 넘었어요. 그런데 50년이 넘어도 달라진 것이 없어.
한때 국악이 큰 유행을 얻었던 시절도 있었지요?
돌아가신 임방울 선생이 쑥대머리를 불러서 백만 장 음반이 팔린 적도 있었어. 임방울 선생이 이 곡으로 큰 인기를 끌었을 때는 ‘때를 만났을 때’라고 하지. 그때가 언제라고 하니, ‘일본넘’들이 우리 한국 여자들을 다 잡아서 위안부로 보내고, 남자들을 다 끌어다가 전쟁 보내고 징역 보내고 그랬잖아요. 그때 자식들 뺏기고… 부모들이 눈물로, 눈물로 세월을 보냈어. 그들도 일본으로 가서 얼마나 눈물로 세월을 보냈겠소. “여인신혼 금슬우지 나를 잊고 이러는가, 계궁항아 추월같이 번뜻이 솟아서 비취고저” 이런 소리 들으면 뜻 몰라도 눈물이 흐르지.
요즘 불러 백만 장이 나갈 것 같은 대목이 있나요?
요즘에 불러서 백만 장이 나갈 곡은 별로 없고, 내가 히트를 쳐본 적이 있지. 충청도 금산 칠백의총 초대를 받아 소리를 했어. 임진왜란 때 돌아가신 선조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야. 여기서 무슨 소리를 해야 쓰나 고민을 했지. “나는 오늘 여서 금산성 새타령을 부르겠소” 했어.
‘적벽가’의 ‘새타령’을 개사해서요?
그렇지.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군사들이 모두 싸움하다가 죽었잖아. 그때 죽은 원혼들이 모두 원조, 새가 되어서 조조를 원망하면서 울었지않았겠소. 판소리에서. 오늘 여기는 임진왜란 일으켰으니 딱 맞지. 난리가 났어.
요즘도 전쟁이다 뭐다 말 많잖아요, 선생님. 오늘 혜화동 새타령 한 번….
여 봐, 전쟁이 아니여.
네, 전ː쟁이죠.
백날 해도 나한테 당한다니까. 허허. 전쟁 그거 못 일으켜.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안 나올 것 같은데 한 번 해보자.
고수가 조용히 북 앞으로 가서 앉았다.
선생은 단가 ‘진국명산’으로 목을 풀고, 자신이 지어 만든 ‘백범 김구’를 부른 후, 적벽가 ‘새타령’의 아니리를 시작했다.
…명기명창 풍류랑이 좌우로 늘어서 쩍쿵 풍악치고 남녀 풍류랑이 늘어 앉아 한 잔 더 먹소, 덜 먹소 허여 가면서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세) -단가 ‘진국명산’
아,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언하노라. 자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자로써, 자손 만 대에 고하야 민족 자긍의 정권을 영원케 하노라.
대한 독립 만세! -송순섭 창본의 ‘백범 김구’
아가, 새타령 갈까? (고수가 북으로 화답한다.)
조조가 가다가 목을 움~쑥움쑥 움치니, 정욱이 여짜오되, 아이고 승상님, 호랑이굴을 벗어났는디 어찌하여 그리 목을 움치시나이까. 야야 말마라, 말말아. 내 목전에 활날이 윙윙하고 귀 뒤에 칼날이 번뜩번뜩하는구나.
오늘 새타령 이거 목 안 나오겄구만, 그러지만 한번 해보는 것이었다.
조조가 목을 늘여 사면을 살펴보니, 글쎄 적벽가에서 죽은 군사들이 원조라는 새가 되어 모두 이 조승상을 원망을 함시롱 우는디, 이것이 적벽강 새타령이라고 허던가 보더라.
“산천은 험준허고… (탁탁).”
나 한 마디만 하지. 가사에 이런 말이 있어. “두견이는 집을 지어.” 어디에 집을 짓느냐. 나뭇가지에다 집을 짓는데, 그 나뭇가지가 북쪽에 뻗은 가지에만 집을 지어. 적벽대전에 죽은 위나라 군사들이 즈그(자기) 나라 가고 싶은 마음에 북쪽에 뻗은 가지에만 집을 짓는다 이 말이여. 두견이도 그리 사는디, 우리는 어떠요. 우리 것을 그 두견이처럼 인정하고 사는가? 말 하나도 제대로 못하고, 이말 저말 보태서 하는데 이 나라가 제대로 가겄소. 우리것 지켜가면서 삽시다.
거의 넋을 놓고 이야기를 경청하던 관객들이 박수를 친다.
아 참, 우리 고수가 누군지 소개를 안 했네. 최광수라고. 내 소리 늘 고수 맡는 박근영 선생의 제자여.

이것은 이야기의 일부다. 선생의 말은 노래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봄이라도 겨울인 오늘, 우리는 ‘객석’의 도서실에 둘러 앉아 선생의 소리판을 만났다. 혼도 나고 칭찬도 들으니 진정 살아 있음을 느끼는 밤이다. 이 시대 소리꾼이 전하는 이야기는 내일도, 모래도 계속된다….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박진호(Studio BoB)

 

인터뷰이 송순섭 명창
인터뷰어 정우정 기자
2013년 4월 10일 오후 7시
월간객석 사옥 도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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