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무용 창작 흐름의 중추에 서 있으면서 2011년부터 올해 2월까지 서울국제공연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아 춤과 페스티벌, 극장과 대중에 대한 고민을 해온 안무가 안애순을 만났다. 그와 함께 안무, 페스티벌, 그리고 대중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요즘 춤 페스티벌이 활발해졌다.
관객들 애호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대개의 작가들은 대중이 외면하는데 작품을 혼자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예전의 춤 공연에는 특별한 관객층이 많았으나 이제는 대중 속으로 많이 다가간 것 같다. 그러다보니 밖에서도 활발해 보일 것이다.
무용계 내부의 구체적인 변화도 있을 듯하다.
그 변화는 아마도 작가들일 것이다. 요즘은 공연예술에서는 관객들이 좋아하는, 특히 젊은 사람들의 관심사인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 ‘이미지적인 것’들을 표현하려는 작가들이 많아졌다. 작가나 대중이나 추상의 영역이 발현되는 현대미술·현대음악을 즐기는 감각도 늘어났다. 그동안 춤이 엔터테인먼트의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유도 이제는 사람들이 현대 작품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게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작가나 관객의 측면에서 이러한 현상은 서로 다른 해석을 붙이는 것이 가능하고 또 즐기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안무가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엔터테인먼트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도 자주 발견된다.
그렇다. 그래도 굉장히 진지해졌다. 하지만 말한 대로 관객들을 먼저 의식하는 태도는 우려된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친절한 자세다. 그러한 이유로 대중화라는 말을 잘못 붙이면 작가로서의 검증에서는 조금 위험한 부분이 있다. 젊은 작가들이 자신에게 더 충실했으면 좋겠다. 더욱 예술적인 것에 본인이 더 집중하고 자기 작업 안에 몰입했으면 좋겠다. 그랬을 때 더욱 진정성 있는 자기 작품이 나오는 것이고, 그럴 때 작가를 추종하는 관객이 생성된다.
춤으로 쓰는 작가의 개념을 ‘안무가’라 명명하는 것에 있어서 선뜻 ‘안무가’라고 이름을 붙이기가 두려워진다. 무슨 할 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페스티벌의 확장은 작가의 비율을 상대적으로 늘어나게 만들 것이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춤을 추고, 만든다는 것은 창작의 의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젊은 작가들에게는 프로패셔널한 시선과 관심이 필요하다. 그 검증 기간이 더 필요하다. 춤의 현장에서.
춤 축제는 인큐베이팅의 차원도 있다는 말인가.
어린 작가들이 젊은 기간 동안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다른 것에 관심이 생기거나 의식하게 되면 작업을 진행하기가 힘들고 자연히 도태된다. ‘장인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때문에 한팩에서도 그러한 작업을 5, 6년 바라보고 진행했다. 가령 서울공연예술제(SFAF) 프로그램 중 어린 안무가를 발굴해서 해외 레지던스를 보내는 ‘서울컬렉션’, 그리고 8, 9개월 과정의 ‘안무가육성교육과정’, 그 안에서 발굴되는 좋은 안무가를 데뷔시키는 ‘라이징스타’, 그리고 후에는 정식으로 작가로 초대해서 뒷받침을 해주는 등이 예가 될 것이다. 극장의 관리 하에 좋은 환경 속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보호해주고 싶었고, 가능하기도 했다.
그 안에서 실질적으로 기대한 것은 무엇인가.
많은 예술가들과 자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작업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한 나눔, 공부의 시간을 제공하고 싶었다. 파트너도 생기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러한 풍토가 생겨야 한다. 그들이 뭔가 할 수 있도록 보호해주는 시간들과 역할이 필요하다.
대중이 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경향에서 작가는 어쩌면 자연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해본다. ‘리서치’와 ‘창작’은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간은 소외의 기간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을 확고하게 만드는 기간이다.
타고난 예술가는 존재하나.
한팩에서 교육 사업을 하면서 탁석산 선생은 “빨리 본인을 제대로 분석해라, 잘못하면 십 년 이상을 까먹을 수 있다”라고 했다. 이는 ‘예술은 교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다는 것’의 의미이다.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재능에 대해 수없이 의심 하게 된다. 재능도 필요하고, 자신을 작가로서 그 환경에 놔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신을 작업하는 습관에 두지 않으면 일반인들과 다를 것이 없어진다. 늘 고민해야 한다. 그것을 즐기면 대중에게 말할 수 있는 작가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축제의 본질적인 존재의 이유로 읽힌다. 반면 ‘춤으로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참 어렵고도 쉬운 일 같다.
우리나라에도 해외 못지않게 타고난 젊은 무용수들은 많다. 그들은 내가 지금 몸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잘 안다. 그러나 안무적인 작가로서의 역할을 감당해내기 위해서는 조금 다른 트레이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처음 안무를 시작했을 때 20, 30분의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장편을 소화해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젊은 안무가들은 자신들의 관심사를 끊임없이 리서치 하는 기간이 있어야 하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봐줘야 한다.
단지 ‘춤’만으로 보여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우려는 당연하다. 말로써 텍스트로써 풀어내는 형식을 많이 착용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기존의 형식에 대한 반항으로 나오는 경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예술가적인 자신의 수단으로 결과물을 내야 한다. 그러한 결과물들을 기다린다.
서울을 중심으로 자연스러워지는 ‘춤 축제’에서 그러한 현상들을 기대해본다. 최근 춤 축제의 성장은 말 그대로 ‘양적·질적 팽창’이다. 여기서 기획력은 ‘핵심’이라고 본다.
맞다. 개인적으로 크게 작게 꾸리던 작업들 가운데도 일단 컨템퍼러리를 하고 싶었던 이유도 과연 이 시대 우리의 창작으로서 어떤 작가들을 어떻게 찾아야 되고, 그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지 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것이다. 새로운 방향성에 대한 작가로서의 이야기가 가능하고, 기존의 조류에서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하는 토론들. 그리고 ‘무용이라는 것 자체가 종합적인 것임을 인지하고, 이제는 장르 구분을 없애고, 아트라고 하자’라는 의식이 필요했다. 세계적 추세가 장르의 경계를 허무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그러한 기획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은 ‘창의력을 가진 기획자’가 그리 많지 않다.
정말 그렇다. 무용 환경에서 에이전시나 프로듀서 기획자들 중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적다. 예술에 대한 경험이 없는 일반 기획자들은 힘들어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기본적으로 예술을 향한 애정과 존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항상 새로운 예술을 만들 때는 무언가를 시도하는 작가가 있고, 거기에 그것을 추종하는 관객을 비롯해서 특정의 그룹들이 형성되어야만 토론이 가능하지 않겠나.
한 철학자도 서로 다른 생각들의 분열 안에 ‘그들의 토론’만이 유일한 가능성라고 했다. 무대라는 둘레에서 무대를 파이를 키우려면, 대중의 역할도 분명히 있다고 본다.
사실 컨템퍼러리 무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감상’이라는 영역이다. 그것은 ‘제3의 관찰자’로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내는지, 만들어낸 작가 이상의 해석, 내지는 굉장히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소통이다. 작품의 정해진 스토리만이 표현 영역이 아니라, 무엇을 제안하고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것을 끌어내고 그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것이 예술의 중요한 지점일 수 있다. 요즘은 ‘무대와 관객’이 이분화 되어 있는 형식보다는 한 공간에서 거꾸로 관객이 주도하게 하는 역할들이 많아졌다. 가까이에서 플레이를 하기도 하고, 관객이 무엇인가를 조작, 혹은 만지게 해서 스스로 작품에 참여해 결과물을 내놓게 유도하기도 한다. 요즘 많은 현대물들이 일상의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도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예술과 일상을 한 선상에 놓는 경우가 될 것이다.
소재에 대한 자유를 스스로 가진다. 어떻게 보면 요즘 춤은 문학과도 같은 맥락의 노선을 걷고 있는 것 같다.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여다보고, 관찰할 수 있게 유도하는 것이니까.
물론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것에 영감을 얻고, 또 말하고 싶은가.
나의 시절에는 전통이라는 것을 어떻게 나름대로 해석해야 되는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그래서 전통의 요소들을 많이 들춰내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해학, 풍자적인 모습은 ‘포스트모던’과도 같은 맥락이다. 오히려 우리 역사 안에 그들의 기류보다도 훨씬 먼저 된 철학이 있었던 것으로, 개인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것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 그것을 세계적으로 함께 이야기하기를 목표로 한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음악과 몸의 경계, 무엇도 우선을 둘 수는 없겠지만 이 관계가 궁금하다.
대개 춤은 음악에 종속되기가 쉽다. 무용수들이 자기 발언, 자신의 몸을 쫓아 움직이는 것에 대해서도 쫓을 필요가 있다. 춤도 음악도 무엇 하나에 종속되면 작위적인 예술이 되기가 쉽다. 자신을 어떠한 상태에 순수하게 놓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다면 춤은 ‘그 시간에 찾아내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 공간이나, 시간이나 관객에 따라서 그것은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바로 살아있는 춤이 발견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굉장히 무작위적인, 말 그대로 자유로운 영혼의 움직임이 중요할 것이다.
‘진정한 컨템퍼러리’란 무엇인가.
꼭 무용이라는 고정관념을 떠나서 새로운 개념, 새로운 조류의 대한 여러 장르의 다른 파트너들을 만나서 작가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과 함께 작업을 해야 정말로 그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들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무용 관객들 중에도 다른 장르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춤에 관심을 갖고, 그들이 같이 만나 이야기해야 한다. 이러한 현상들이 앞으로를 더 기대하게 만드는 것 같다.
춤은 그 모든 것을 열기에 가능성이 있는 장르인가.
물론.
그는 다가오는 강동스프링댄스페스티벌의 폐막공연을 맡아 신작을 준비 중이다.
글 정우정 기자(wj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