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원 EMI 녹음 전집

그건 바로 사랑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5월 1일 12:00 오전

천리마 페가소스가 뮤즈를 싣고 피에리아의 산기슭에서 날개를 퍼덕였을 때 맑고 맑은 샘물이 솟아나와 뮤즈들에게 시적인 영감을 선물했다. 한 평론가는 양성원이 연주하는 음악을 피에리아의 샘물에 빗대었다. 알렉산더 포프가 말한 대로 피에리아의 샘물을 얕게 마시면 머리를 취하게 하지만, 충분히 마시면 정신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 이 기막힌 비유는 그때나 지금이나 양성원에게 유효한 듯하다. 그는 아직도 초심을 잃지 않고 음악을 깊게 흡입하는 연주자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인간적이다. 직관을 중요시해 늘 ‘쿨’하다. 양성원이 EMI에서 발매했던 일곱 장의 음반을 한데 묶었다. 500매 한정으로 오리지널 재킷을 그대로 담아 고품격 박스로 출시했다. 다 갖춘 것 같아보이는 그는 음악 안에서는 부족한 듯 겸손하게 떨고 있다. 먼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6번. 이곡에 관한 한 최고의 명연이라 일컫는 러시아의 거장 다닐 샤프란의 낭랑하게 노래하는 영혼이 오버랩된다. 바흐를 녹음할 당시 양성원은 36세, 세상을 어느 정도 알 만한 나이였다. 6번의 프렐류드는 ‘무반주’ 가운데에서도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곡이다. 원래 5현 악기를 위해 작곡한 난곡 중의 난곡인 이 곡이야말로 바흐의 도전정신의 총아다. 놀랍게도 30대 중반의 양성원은 샤프란과는 또 다른 그만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다. 밤 12시를 넘긴 지금, 스피커를 통해 울려오는 양성원의 바흐는 분명 천첩옥산(千疊玉山)을 중심으로 흐르는 냇물의 일렁임과 같다. 이렇듯 음악 앞에서 끝없이 낮아지는 그의 심성은 이번 음반에 보너스로 수록된 DVD ‘My Cello Journey’의 시작과 함께 드러난다. 36곡의 무반주 가운데 무심코 지나쳐버릴 법한 5번의 알망드를 배경으로 선곡한 그의 예지에 감탄한다. 양성원이 결혼하던 해인 1998년에 장만한 1697년 제작된 첼로 ‘지오반니 그란치노’가 들려주는 알망드의 그윽한 음률은 바로 적요(寂寥)의 세계와 다름 아니다. 이렇듯 고아하고 적적한 더블스토핑이 또 있을까.
양성원의 데뷔 음반은 놀랍게도 2000년에 녹음한 코다이였다. 이 음반을 처음 들었을 때, 무반주 첼로 소나타 작품 8의 1악장 도입부에 나오는 강력한 스포르찬도에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양성원은 이어지는 작품, 같은 작곡가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아다지오’의 그윽한 선율로 무반주에서 놀란 가슴을 일순간 다독이며 카멜레온처럼 변신하고 있다. 결국 이 앨범은 ‘그라모폰’지에서 ‘에디터스 초이스’와 ‘크리틱스 초이스’로 선정돼 기어이 명반 대열에 합류하고야 말았다.
코다이에서 피아니스트 문익주와 잠시 호흡한 양성원은 이듬해 라흐마니노프와 쇼팽의 첼로 소나타를 녹음했다. 파트너 문익주의 진가는 라흐마니노프에서 더욱 빛났다. 특히 3악장 ‘비가’에서 양성원과 함께 들려주는 처연한 러시아의 시정(詩情)은 가장 한국적이고 동시에 러시아적인 슬픔이었다.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곡은 근육질의 남성미만을 표출하는 싸구려가 아닌 진정 인간을 사랑했던 작곡가의 내면을 통찰한다. 함께 수록된 ‘사랑을 느끼는 남자들에게는’에 의한 열두 개의 변주곡은 그야말로 파미나와 파파게노를 통해 모차르트가 고백하는 부부애가 절절히 전해진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


▲ 양성원(첼로)
EMI 9840972 (DDD, 7C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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