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IMF로 나라가 파산하는 줄도 모르고 PD 생활 3년 차로 소위 ‘뺑이 치며’ 일하던 어느 가을날! 다음 달에 결혼 날짜를 받은 나는 혼자 살던 원룸에서 투룸으로 이사를 앞두고 있었다. 그때 쓰던 오디오는 AR인티에 탄노이 12인치 골드 모니터였다. 원래는 CD와 LD가 주력 소스였는데, 1996년 지방 근무 중 ‘KBS스페셜’에 나온 신중현을 보고 그날 저녁 목포 시내를 뒤져서 신품 LP2000을 구입하고서는 LP판도 차곡차곡 늘려가던 시절이었다.
매일 새벽에 귀가하면서도 신정동 원룸에 들어서면 레코드판에 바늘을 얹곤 했다. 그때 가장 많이 들었던 음반이 오토 클렘페러/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바그너 서곡집이다. 바그너라고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로버트 듀발의 헬기부대가 베트콩 해안마을을 폭격하는 장면에 배경음악으로 깔린 ‘발퀴레’밖에 몰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탄호이저 서곡’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그너의 후계자인 말러, 그리고 말러의 마지막 제자인 클렘페러는 75세이던 1960년,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스테레오로 이 곡을 연주했다. 나이 때문인지 연주하는 데 보통 13분 정도가 걸리는 이 곡을 클렘페러는 14분 넘게 지휘했다.
연주는 느린 만큼 유장하고 엄숙했다. 돌아온 탕아의 속죄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회한! ‘탄호이저’에는 신파가 넘쳤다. 그저 단순한 신파가 아니라 반성과 회한이 적절히 꺾여 들어간 소위 말하는 변증법적 신파 말이다. 당시 나는 우연한 기회에 시작한 방송국 PD일과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결혼을 두고 인생이 철창 속에 가둬질 것 같은 아쉬움을 느끼곤 했다. 그런 부담에 억눌리고 만취해 집에 들어온 날에는 깜깜한 방에서 ‘탄호이저 서곡’을 틀어놓고 클렘페러의 지휘를 온몸으로 흉내 내다가 땀에 절었다. 그럴 때면 예외 없이 아래층 주인집 아저씨는 “제발 좀 조용히 하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시간이 흘러 이삿날! 총각 살림살이라 별 것 없기도 했지만, 목동오거리에서 남부지방법원 앞으로 500미터 거리만 움직이는 이사라 크게 신경 쓸 일이 많지도 않았다. 맞바람에 게눈 감추듯 이사를 마치고 새 집에서 음악을 들으려 짐을 정리하다 보니, 아뿔사! 턴테이블이 없어진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오디오 중에 유일하게 신품으로 구입한 LP2000! 게다가 처음 써본 MC카드리지. 그보다 더 기막힌 것은 턴테이블 위에 가장 사랑하는 클렘페러의 바그너 서곡집이 올려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40만 원 넘게 주고 구입한 턴테이블보다 LP를 잃어버린 것이 더 원통했다. 이후 어찌어찌하여 같은 음반의 CD판을 구했지만 슬프게도 그 옛날 들었던 것과는 달랐다. 비트스트림 혹은 24비트 스펙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그 구수한 유장미를 CD로는 들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아이 셋이 태어나고 귀밑머리가 조금씩 희끗해지는 세월이 지났다. 나는 지금도 가끔 알맹이 없는 LP 케이스를 만지작거릴 때가 있다. 예전보다 오디오도 음반도 풍성해졌지만, 아직도 나는 다시 웃통을 벗고 미친 사람처럼 바그너를 지휘해보진 못했다.
‘동그라미를 꺼내다’에서는 ‘내 생애 잊지 못할 음반’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이번 호에는 KBS TV 교양국 차장 김영삼 PD의 동그라미를 나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