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5월 1일 12:00 오전

춤처럼 인류의 역사에서 다양하고 많은 형식을 가진 것이 있을까? 그것은 선사 이전부터라는 ‘역사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인류가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어느 곳에서라도 발견되는 광범위한 ‘지역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춤은 공시(共時)와 통시(通時)가 만나는 어느 지점에도 존재하며 바로 그 접점에서 인간의 삶, 즉 인간의 몸과 생활이 부딪히고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춤의 꽃이 피었고, 춤의 열매가 맺혔다.
사냥의 방법과 전쟁 승리의 오랜 기억을 위해서 춤은 언어 이전에 전달 수단이 되었으며, 주변 환경에서 자주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흉내 내기’와 ‘따라 하기’는 환경을 익히고 이해하는 중요한 모방춤들이 되었다.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여 일상적인 마음에서 떠나는 고도의 의식적인 춤이 있었는가 하면, 그 힘을 집단적으로 모아 신이나 조상과 소통하여 현실을 넘어서는 힘을 발휘하는 강력한 제의의 춤들도 존재했다.
물론 춤의 가장 특징적인 사실은 춤과 표현의 수단인 몸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 이외의 다른 매체를 사용하지 않고 바로 ‘일상의 몸’이 언제라도 ‘춤추는 몸’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춤이 가장 현실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추상적인 것까지 포괄해내는 춤의 광범위한 폭이 되기도 하며, 가장 육욕적인 동시에 숭고한 것일 수 있는 이해하기 어려운 양면성의 기초가 된다. 바로 이 몸으로 밥 먹고 잠자고 놀다가 짝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 춤을 추고, 엄습하는 공포와 경외 앞에서 마음을 모아 머리를 조아리며 춤추고, 신비한 약초와 연기, 술의 힘에 취한 몸으로 춤을 춰 또 다른 차원의 세계에 머물기도 하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눈으로 현실을 볼 힘을 얻어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이렇게 다양한 춤에 대해 누구나 서로의 춤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때는 기독교 교리에 입각한 춤 금지령의 반복된 발효로도 춤은 절대 금지시킬 수 없었으나 춤은 지속적으로 억압당했다. 뿐만 아니라 집단적으로 본능을 제지당하는 시간이 길어졌던 중세 말기에 와서는 유럽 도처에서 억압을 견디다 못한 신경들이 발작하기 시작해 감수성 여린 소녀들의 몸을 타고 일어나는 경련을 죽음에 이를 때까지 말릴 수 없는 ‘무도병(Danceomania)’이 번지기도 했다. 춤이 아니면, 몸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는 비장한 중세적 몸의 반항이었다. 근세 들어 선교를 앞세운 식민통치 과정에서 유럽 중심적인 시각으로 태평양과 아시아의 춤들은 난삽하고 저속하고 비문명적인 것으로 수모를 받거나, 공산주의 침략에 의해 봉건문화의 것으로 말살 위기에 처한 캄보디아의 궁정춤 역시 수백 명 궁정무용수들의 몰살이라는 위기에도 목숨을 건진 몇몇의 춤꾼들에 의해 숨어서 전수되는 비운의 시간도 있었다.
손가락의 터치와 엄지와 검지를 벌렸다 줄였다 하는 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조정할 수 있을 것같이 느껴지는 스마트한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오락거리가 카드 결제를 마치는 순간 눈앞에 당도해 감각적 쾌락의 나라로 금세 옮겨지는 요즘에도 춤의 이러한 아날로그적이고 철저하게 몸적인 근거에 충실한 측면은 곧 사라지거나 변질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다. 춤은 사이보그에게나 줘버려? 그러나 언어와 논리를 넘어선 말도 안 되는 싸이의 춤에서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는 쾌감을 느끼고 스스로 털고 일어나 두 손목을 모아 말이라도 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듯이 마구 달린다. 점점 조여 오는 0과 1의 파도에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조각난 정보의 밀물 속에서 어쩌면 우리의 몸은 지금 조난 중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을 구조할 수 있는 것은 버추얼(가상)의 조난선이 아니라, 바로 내 몸을 스스로 찾고 챙겨야 하는 아주 구체적인 것으로 이행했다.


▲ 니콜 자일러 ‘리빙룸 댄서스’

우리나라 성인의 연간 소주 소비량은 약 66병이라고 한다. OECD 국가 중 음주는 11위이고, 자살률은 1위다. 음주가 당뇨·고혈압·간질환 등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맨 정신으로 살기 어려워 몸이 죽도록 술을 마시거나 그냥 죽는 것을 선택해버리는 아주 처절한 순간에 처해 있다. 우리나라는 의료 강국에 넘치는 건강 정보 속에서 수명은 길어졌을지 몰라도 어쩐 일인지 우리의 몸이 더 건강해진 것 같지는 않다. 인간은 몸이나 정신 가운데 한 축만으로는 살 수 없는 오묘하고 온전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우리를 소비주체가 아닌 몸과 정신이 조화를 이뤄 살아야 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 보는 시선은 빈약해졌으며, 건강하고 온전한 인간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해 스스로 챙길 만한 시간을 갖고 살기 어렵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노래와 춤으로 모여 놀기를 좋아했다. 함께 하는 것을 유독 좋아하고 집단적일 때 자신도 모르는 힘이 나와 집단에 자신을 투여하기를 좋아하는 습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춤을 좋아하고 즐기며 춤에 재능이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춤은 문화가 공유되는 사람들의 것이며, 그렇게 공유될 때 더 많은 즐거움을 느끼고 소통됨을 느끼는 집단성이 강한 것이기에 집단적으로 춰야 더 맛이 나고 재미있으며, 개인 집단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존재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남도 추고, 나도 추고, 같이 춰야 재미있는 게 춤이다.
그동안 대중 매체의 춤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극장 무대에만 고고하게 머물던 춤들이 무대 밖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미 극장 안에서도 관객은 그저 수동적인 입장을 벗어나 어려운 현대춤 역시도 관객의 다양한 ‘받아들임’과 ‘이해’ 속에서 완성된다고 생각된 지 오래다. 관객은 이제 춤을 감상하는 데서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 춤들도 원래의 생명력을 회복해 다시 사람들 곁으로 다가와 각양각색의 것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그 과정에 많은 안무가들과 무용가들이 일반인과 더불어 춤을 추고 그들에게 춤을 안내하고 그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여서 어설픈 부분도 많지만 나는 이런 변화를 매우 중요하고도 발전적인 징후들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춤추기 시작했다는 것은 삶의 차원을 바꿔줄 새로운 인간선언이며, 살아있음에 대한 강력한 보고다. 나는 곧 내 몸이다. 그간 추위에 떨고, 술에 절고, 피곤에 녹아있는 몸을 돌아보라. 그리고 그 몸이 원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동안 너무 무심했음을 사과하고 그럼에도 아직 잘 살아있음에 감사하라. 처음엔 어색해하거나 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을지라도 천천히 조금씩 만족하라. 몸은 반드시 보답할 것이다. 가장 충실한 물질의 법칙에 따르는 동시에 물질도 초월하는 강력한 신비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심장박동을 느끼고 호흡을 따라가라. 그리고 천천히 유전자 깊숙이 있는 춤의 DNA를 깨워라. 춤의 신이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글 이지현(춤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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