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故) 김수남의 작, ‘제주 신굿’
김수남은 삶의 끝과 시작을 음악으로 담아내려는
‘굿판’을 찾아다닌 사진작가다. 그가 찍어낸 음악은 예술
그 자체다. 그의 말을 빌자면, 음악을 대할 때 그는
“한 발 더 다가갔다.” 대상을 더욱 대상답게 찍기 위하여.
이제는 국악이라는 용어조차 고루함을 넘어선 고루함이 되었다. ‘우리음악’이라고 변칭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음악은 하나’라는 인식이 확산되어감으로써 더 이상 근대를 풍미하던 ‘양악과 국악’이라는 이분법적 태도가 이어질 것 같지는 않은 양태가 보인다. 한때는 ‘퓨전 국악’으로 회개한 장르가 피어오르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러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발화자나 수용자 모두 ‘음악’이라는 용어로 통칭하기를 원하는 추세다. 이들이 인식하듯 기호의 벽이 무너지면 음악은 조금 더 자유로운 형태를 띨 수도 있겠다고 기대하면서도 아직까지 선전하고 있는 국악으로서의 ‘음악’은 ‘음악’의 역할을 만들어내기에는 그 애호의 층이 여전히 극소수다.
“이데올로기 종언의 이데올로기”라는 말이 있듯이, 무언가 형식을 탈피하기 위해서 기호를 깨뜨리면 다음의 행동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국악의 역할이나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먼 세대를 말하는 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온 영역이며, 그것을 다시 파헤칠 생각은 없다. 나는 단지 이 시대를 이야기 하고 싶고, 또 같이 생각해보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겪는 국악, 우리가 보는 국악, 그리고 듣는 국악을 온전히 바라보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 주변의 우리 음악을 돌아보길 강권한다. 어느 곳 어느 때에 국악이 울리고 있는가. 현대에 종적을 감춘 국악은 언제, 어느 세대에서 음률을 감추게 되었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정의 체계는 어떤 연유로 바뀌게 되었는가. 더 이상 우리는 어떤 음악을 찾고, 원하고 있는가. 고루의 영역을 넘어서 변모해가고 있는 국악의 모습은 어떠한 얼굴을 하고 있는가. 지금의 취향은 무엇이 만들어주고 있는가. 이 모든 것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묻고 싶다.
지난 백 년간 바뀐 한국의 모습은 비단 외적인 형식만이 아니다. 문화의 내적 가치관이며, 미를 추구하는 시각의 변화가 현재에 남아 있는 잔재의 온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전의 세대가 수준 이상의 음악적 이상을 표현하며 지내왔다는 말은 아니다. 어디에 있든지 아류는 있는 법으로, 예술의 영역 역시 모든 것이 진상이라는 표현은 삼가고 싶다. 그러나 강점기와 냉전의 사건을 거친 우리문화가 아무런 역사의 영향이 없이 땅에 심은 민초처럼 강인하게 뿌리를 내리고 지내왔다고는 누구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시대가 추구하는 이상에 따라 문화의 중요도는 달라지고, 해석과 역사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었음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사회를 결정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면, 지난 이데올로기는 정치와 연관된 사고관이 완연한 유교 가치의 나라에서 음악의 순위를 지탱해준 체계를 의미한다. 때문에 음악가(다시 말해 국악인)는 완고한 가치 체계를 가지게 되며, 그들에게 심어진 이상을 꼭 지켜야만 하는 무엇으로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 나아가 그 속에서 마저 순위를 형성하는 또 다른 관념을 창출하기도 했다. 누구의 잘못으로도 넘길 수 없는 이 문제는 더 이상 ‘문제’로만 끝낼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작용하고 있는 ‘오류’의 지적과 ‘맹목적이고, 바르지 못한 태도’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소외’라는 개념을 낳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유럽의 철학자들은 일찍이 ‘소외’는 이미 신과 인간의 구분에서부터 생겨났다고 생각했고, 이것은 나아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격으로 발전되었음을 설명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간은 또다시 ‘인식’이라는 관념을 낳고, 그것이 ‘허위의식’과 ‘계급’을 만들어낸다. 이 사이에서 지배 계층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공익을 획득하기 위해 ‘보편화’를 얻어내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전략을 세우는”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과정 속에 국악이 놓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 글은 시작된다. 짧거나 혹은 긴 연재가 될 이 글에서 결론적으로 발견하고 싶은 것은 문화 내에서 갖는 국악의 소외 양상이 될 것이고, 국악 내부에서도 이뤄지는 소외 현상이 있을 수도 있다.
고(故) 김수남 작가는 사진을 찍을 때 “신을 찍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다”라고 종종 말했다. 그는 신을 만나고 싶어 했다. 국악에 스민 ‘신’이라는 의미는 음악 이상의 영역으로 기예가 하나의 영성으로 도합하는 지점을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가 무엇과 만나기를 원하는 괘도에 있는 자들. 이 안에서 발견되는 신적 요소야말로 우리가 현대사회 무대 위에서는 자주 보기 힘든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어도 그들은 표현하기를 원하며, 그들이 설정하는 대상이 대중의 관점은 아니었다. 때문에 영성의 깊은 곳까지 맞닿아 영혼을 뒤흔드는 연주가 가능했으며, 그것을 비운의 사건으로 바라볼 것은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아주 어리석은 안목과 시안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국악 중에서도 특히 민속악을 유심히 지켜보면, 예술의 정점을 찍는 교류가 가능했다고 본다.
적어도 60년 전의 연주자들은 감정의 정점을 찍으려는 태도가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고,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무언가에 온전하게 집중하는 연주자들의 태도에서 예술은 피어난다. ‘유희’와 ‘의식’의 영역을 넘나드는 자신들의 음악적 태도가 현대 무대에서 어떻게 조합을 이룰 것인가 고민한 연주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연주자들은 ‘음악’과 ‘국악’의 영역의 터울만을 깨기를 바랄 뿐, 이러한 이상을 바라보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싶다. 독일의 작가 귄터 그라스는 ‘독일의 비공식적 양심’이라 불리며, 작품에 녹여낸 세계관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뒤흔들어놓았다. 그에게 피어났던 작가정신은 비단 개인적인 영역에 한한 것은 아닐 것이며, 그가 겪었던 어두웠던 사회와 표현하고자 했던 욕망, 그리고 당대 작가들의 연합된 정신에 대한 발언권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시선을 돌려 국악을 본다. (국악을 넘어서 한국 예술 전반에도 해당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겪었을 시간·정신·공간적 타박에 대하여 더욱 하고 싶은 말이 많아야 하는 건 아닐까. 사진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저 ‘제주 신굿’의 삼베마저도 끈기 있게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는데, 정녕 이들은 할 말이 없는 걸까. 국가의 가부장적 태도로 음악가를 저작거리 놀이꾼으로 내몰던 시대는 지났다. 작가에게 정신만 있다면 더 이상 표현하지 못할 것은 없으며, 우리 모두 그것을 바라볼 의향이 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나는 ‘국악’을 이야기하고 싶다.
글 정우정 기자(wjj@) 사진 김수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