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의 소멸과 생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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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7월 1일 12:00 오전

정우정의 이중술책
세상에는 ‘이중술책(二重術策)’이 많고 많다. 더 이상 뜬 구름 잡는 국악비평은 없다. ‘아름다움을 향한 예찬’도 없다. 예술의 ‘이중술책’을 읽어낼 뿐. 아, 아름다운 건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 1904년, 풍류의 모습
Carlo Rossetti(1876~1948)
사진 국립국악원 제공

국악의 소멸과 생성에 관하여

‘기호(嗜好), 즐거워 좋아하는 마음’이 없는 영역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어떠한 질서를 규정할 것이란 말인가. 이미 대중의 의식과 동떨어진 기치 속에서 국악은 오랫동안 성장해오고 있다. 국악은 ‘국가의 음악’(신라시대부터 시작해온 궁중음악기관 포함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 1951년 설립된 국립국악원에 이르기까지. 현대에 달라지고 있는 문화의 판도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전통에 대한 문화재 구축’(1945년부터 구축해온 문화재 관리사업) ‘국악의 해’(1994년) 등 끊임없이 자가적 가치를 발생시켜가고 있고, 이러한 내부의 가치는 그들을 존속해주는 유일한 끈으로 작용하고 있는 시대다.
표식을 뜻하는 기호(記號)를 생각해보자. 의미를 생성하지 않는 기호는 없다. 무엇을 묶어 두려고 하는 태도는 ‘기호(記號)’에서부터 시작된다. 국악도 ‘국악’ ‘한국 음악’ ‘전통음악’ ‘우리음악’ 등으로 명명함과 동시에 누군가 원하는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은 어쩌면 이미 지루한 이야기다. 문제는 그러한 시도를 위와 같이 수십 년 반복해오고 있으니, 아직도 국악은 대중의 물망 위에는 존재할 수 없는 아주 미약한 부분의 예술 형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국악은 20세기 들어 음악에 대한 구분을 위해 생성시킨 용어다. 쉽게 말해 서양의 것과 (당시의) 한국적인 것에 대한 구분을 위한 이름이었다. 지금의 ‘음악과 국악’이라고 하는 질서는 이전의 중국(혹은 조선이 인식한 대국) 중심의 사고에서 ‘아악과 속악’으로 규정되기도 했으며, 근대 들어 새롭게 형성된 국가의 관계로 인해 ‘음악과 국악’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질서의 규정이 빚는 기호의 의미와 한계가 바로 오늘날 국악이 처한 문제다. ‘기호’에 따른 질서는 때로는 강압적으로, 때로는 자생적인 개념으로 성장한다. 전자는 국가 간의 질서로 인한 의미 형성을 들 수 있으며, 후자는 그로부터 생겨난 대중의 ‘기호(記號)’ 아닌, ‘기호(嗜好)’를 들 수 있다. 이 두 개의 기호는 같은 기표를 가지고 있지만 굉장히 다른 뜻을 의미한다. 이 속에 생겨나는 ‘가치평가’는 또다시 ‘의식’의 생성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 혹은 국악인들은 ‘우리 것’에 대한 가치나 의식의 소멸을 의도적으로 염려했고, 문화재로 가두어 ‘그들의’ 것을 유일무이 지켜내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대단한 국수주의적 발상이며, 이러한 국수주의는 이제 현대와도 동떨어져버린 ‘고집’과 ‘아집’으로만 남게 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질서가 이미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얼마 전 한 의상 디자이너도 “예술에 있어서 높고 낮음도, 정답도 없지만 ‘미학’은 있다”고 말했듯이, 음악에 있어서 진리의 진의를 따지기 이전에 사회적인 규정을 통해 ‘구분 짓기’를 한다는 정세는 포스트모던을 주창하는 현대의 정서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대중의 ‘기호(嗜好)’에 관해서도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다. 왜 이러한 문제를 가슴을 치고 통탄하며 말하는 이들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이와 같은 구성의 과정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온 국가의 태도나 의식은 분명히 지적받아야 할 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식체계는 어떻게 변해야 할까. ‘국가의 음악’은 ‘국민의 음악’이 되어야 할 것이며, ‘전통의 문화재’는 ‘박재(迫財)’가 아닌 열린 자생적 문화의 테제 속에서 탄생해야 한다. 그것이 어떠한 기념의 해나 축제를 맞이했을 때에도 비로소 진정한 지표로서 작용할 수가 있다. 무엇이 생성되었을 때 그것을 박물관의 ‘박재(迫財)’된 대상 바라보듯 볼 수도 없고, 갇힌 문화재의 구현으로 음악을 지켜볼 수도 없는 일이다. 바로 우리가 음악을 대하는 기초적인 자세부터 확실한 변화가 있어야 하며, 그 시기와 그 땅에 부합한 음악적 태도는 반대로 진정한 음악을 생산시킬 수 있다.
지난해 국립국악원에서 개최한 ‘1900년 파리, 그곳에 국악’이라는 전시에서 사진 한 장을 만났다. 이탈리아 사진작가 카를로 로세티가 찍은 사진이다. 일장기 아래에서 삼현육각을 잡고 있는 연주자들. 그들이 살아있다면 당시의 심경을 물어봤을 것이다. 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자생이 없는 음악의 ‘무력(無力)’에 대해, 혹은 자생하는 음악의 ‘유력(有力)’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지금은 일장기가 아닌 또 다른 거대권력 아래에 존속하고 있지는 않을까.
실제로 국악은 한국에서 어떠한 예술 장르보다도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시도가 성공적인 모습으로 토착화되지 않았다. 이유는 아직도 보존의 가치를 구현하기에 급급한 연주자들의 태도에서 발생한다. 그들에게 무엇을 ‘생산’할 확실한 변화나 행위는 없다. 그들이 지켜낸 음악의 질서가 중요했듯이, 이제는 음악의 ‘정당성’이 대두되어야 할 시점이다.
시대가 변했다. 대통령도 국민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탄핵을 하고, 시국선언을 주창하는 민주적인 시대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인 사회를 보노라면 정세가 크게 변했다고 확언하지 못하겠지만, 움직여도 괜찮다는 말이다. 사회를 사는 시민의 의식은 분명히 크게 바뀌었다. ‘음악’ 역시 상하 고저를 구성했던 질서를 허물고 절대적인 ‘미추’의 개념으로 나아갈 시대가 도래했다.
길고 진부하게 이야기했지만 바라는 바는 ‘소멸과 생성’이다. 자연스럽게 소멸되어야 할 것이 소멸하지 않고 있을 때 생기는 불순물을 우리는 목격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절망적인 일이다. 그 속에서 제2, 제3의 피해자가 생기기 때문이다.
국악은 이제 ‘기호(記號)’에 따른 가치를 그만 벗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 기표 속에 깃든 ‘기의’ 즉 ‘의미, 뜻’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글 정우정 기자(w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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