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준, 극의 음악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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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7월 1일 12:00 오전

‘메디아’가 끝난 지 3주가 지난 국립극장은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이번 작품의 작곡과 작창을 맡은 작곡가 황호준을 만나러 해오름극장 옆 벤치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메디아’의 출연자들로 보임 직한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온통 ‘메디아’ 이야기. 그들의 대화는 대부분 ‘메디아 가락’이다. 가락으로 대화를 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니. “힘들었습니다. 장의 구분은 있어도, 막의 구분이 없이 하나로 연결된 곡을 쓰자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 이하 작곡가 황호준과의 일문일답.

이 작품을 쓰는 데 얼마나 걸렸나.
작품은 2월 초에 대본을 받았고, 작곡은 3월 말, 4월 둘째 주, 이렇게 두 번을 엎었다. 최종적으로 3주가 걸린 셈이다. 두 달여 가까이 했던 작업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다시 꺼내 쓸까봐 모두 지웠다.
이번 창극 작업을 제의받았을 때의 마음이 궁금하다.
희랍비극이자 서구서사의 교과서적인 작품을 가지고 창극을 만든다는 것이 창작가로서는 굉장히 반가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막상 작업에 돌입하는 순간부터 ‘생각보다 만만한 작업이 아니겠구나’ 하고 느꼈다. 기존 창극에서 벗어난 작품 형식을 하자고 했기에 호기심과 책임감이 동반했다. 서사를 충분히 살리고 그것을 음악극에 맞는 효율적인 방식들로 풀어낸 한아름 작가의 역할이 컸다.
그것이 기존의 창극과 어떤 차이를 생산해냈다고 보면 되나. 기존 창극의 방식은 뭔가.
창극은 ‘창극’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대본을 많이 써왔다. 음악 역시 기존의 판소리 바탕에 맞춰 곡이 만들어지는 형식이다. 그러나 ‘메디아’에서는 정해진 곡조가 없으니 좀더 자유로울 수 있었고, 철저하게 극 중심으로 엮어나갔다고 보면 된다. 캐릭터의 정서들이 음악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닌 연기나 대사로 처리가 되고, 노래로 끼어드는 것. 이것이 그동안 창극의 방식이었다면, ‘메디아’는 철저하게 드라마에 복무했다. 음악이 극에 봉사하는 현대음악극 양식에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작품 구성, 구조 자체가 이전과는 다르게 시작한 것으로 읽힌다. 작업을 두 번이나 엎은 이유는.
곡을 쓰다 보니, 어느 순간 작곡가의 ‘욕망’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했다. 작곡가로서 과다한 욕망, 작곡 테크닉의 과시, 그것이 악보에서 보이는 순간 엎었다. 중간중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기존의 익숙해져 있는 창극을 만드는 방식에서부터 다른 방식이 도입되어야만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고, 작곡가의 과다한 욕심은 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긍정적인 에너지로서 작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음악극임에도 불구하고 작곡가의 욕망은 왜 억제되어야 하나.
작곡가가 대본을 두고 그냥 음악극으로 풀어내는 것은 쉽지만, 그것은 현재의 창극이 ‘새로운 창극’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돕는 일이 절대 아니다. 국립창극단, 그리고 국립극장은 관습을 깨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표상으로 자리해야 한다. 작곡가로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창극 대안의 방향과 그동안 국립창극단이 해왔던 관습적인 형식들, 실험적인 부분들이 만나는 지점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많이 고민했다. 창극이 이렇게 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과 그것을 조직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사실 창작자는 그것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현재 창극의 단계에서는 작곡가가 그 부분까지도 고려를 해야만 한다는 스스로의 사명 의식이 작용했다. 이러한 실험을 딛고, 앞으로 누군가가 더 나아갈 수 있는 초석이 되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했다. 이로 인해 앞으로의 시도 자체가 차단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에.
극 전체를 음악으로 이끄는 ‘송스루(Song-through)’ 형식을 창극에 도입한다고 해서 주목을 끌었다.
‘송스루’를 도입한 가장 큰 이유는 창극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 역량에 철저하게 기대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다. 어떤 경우는 인간의 언어에서만 표현될 수 있는 뉘앙스가 있다. 우리 언어의 억양이 아닌, 음악적 억양으로 바뀌었을 때 그 정서의 밀도가 유지되기 힘든 경우는 생긴다. 그러나 시도가 중요했다. 시작 전에는 창극 배우들이 연극배우보다 연기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지만, 그것은 연습 과정을 통해 오판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막의 구분이 없었다. 그것은 작곡가로서 굉장히 힘든 부분 같은데.
맞다. 음악에 종지부가 없다는 것은 힘들다. 음악은 곳곳에서 다음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극은 연결되고 있는데 음악은 단절될 수 없다. 보통의 음악극이나 뮤지컬에서는 몇 곡을 썼다는 것으로 통상 이야기하지만, ‘메디아’는 엄연히 한 곡을 쓴 셈이다. ‘메디아’는 ‘송 넘버 원’.
오페라 ‘아랑’, 뮤지컬 ‘왕세자 실종사건’, 창극 ‘심청’ ‘이순신’ ‘홍길동’, 소리극 ‘오늘이’ 등 음악극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음악극을 어떠한 방식으로 쓰는지 궁금하다.
보통의 기악곡과는 작업 방식이 다르다. 대사를 직접 입으로 읊고, 연기를 하면서 쓴다. 배우들이 처음 대본을 리딩한 것을 녹음해 많이 듣기도 한다. 그들이 은연중에 말하는 대사의 높이나 템포가 있다.
당신이 이해한 ‘메디아’는.
나는 여성의 분노 크기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것을 객관적인 이해로 접근하게 된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생길 것이라고 본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감성이 도처에 있다. 이것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날카로운 소리들과 극단적인 소리의 결합들로 표현했다.
이번에 도입한 낯선 음 진행이 궁금하다.
우리의 음이 훼손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 음을 선별적으로 찾았다. 우리 음악의 음 진행에서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보통 C에서 Eb으로 가거나 C에서 F로 간다. 상행시 단 3도와 완전4도. 혹은 장2도. 하행을 할 때는 단2도를 많이 쓴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단2도 상행을 많이 썼다. 특히 감5도, 증4도를 썼을 때, 전통 가창에 익숙해져 있는 배우에게는 몹시 생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가창의 특성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음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음의 새로운 진행을 유도하면서도 우리 발성이 유지되는 방법에 대하여 말이다.
전통어법을 훼손 하지 않으면서도 기존에 없던 음의 진행을 찾는다는 것이 가능한가.
판소리를 줄곧 들어왔으니 당연히 가능하다. 그리고 스스로도 수없이 부르면서 확인했다. 우리 음악에는 선율적 뉘앙스라는 것이 있다. 독립적으로 C는 어떤 음을 가져야 한다가 아니라, 어떠한 음과 만났을 때 C를 떨어야 하는지 평으로 내어야 하는 지 등의 진행 방법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법의 진행에서 ‘관습’을 탈피하는 방법은 무엇이었나.
서양에서 말하는 전조의 개념이 우리 음악에서는 ‘길바꿈’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본청을 우조길로, 혹은 계면길로 가는 형태다. 그러한 전통적인 조바꿈을 하지 않았다. 길을 바꾸기보다 철저하게 서양의 전조의 방식을 차용했다. 그것은 1차원적인 온음계 전조 방식이 아니라 반음계 전조라든지, 장3도나 단3도를 뛰어넘는 전조 방식 등 이미 진행되어온 습관 속에서 특정 음이 어떻게 부합될 수 있는가를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어색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국악’에서 허용하는 추임새, 즉 관객이 끼어들 수 있는 틈을 허용하고자 노력했고, 그것은 소리들의 배치를 통해 진행시켰다. 전통적인 어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코러스에 많이 도입했다.
익숙한 소리 배열이 있는 소리꾼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전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20~40년씩 쌓아오던 ‘말법’, 엄밀하자면 ‘톤’을 바꾸는 일일 텐데.
전조되는 그 순간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었을 때 오는 선율적 특징이나 가창 방식은 여전히 우리 전통 방식을 그대로 택했기 때문에 쉬울 수 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그 바뀌는 순간들을 제외하고는 전통적인 가창 방식이 부숴지지 않는 한도를 택했다. 그것이 이번 ‘메디아’ 음악의 중점이다.
보통의 뮤지컬에는 ‘넘버’가 있고, 판소리에도 ‘눈대목’이 있다. 넘버가 없는 것은 의도한 것인가.
그렇다. 서재형 연출과도 끊임없이 논의했다. 음악극은 극의 전체적인 작품이 빛나야 하는 것이지, 특정한 한 부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작품 전체의 호평이 결국 작품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메디아’에 완전히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힘인가.
연출의 힘이 아닐까. 연출의 역할은 무대를 상상하는 힘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그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조직하는 능력이다. 작품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장악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그 사람들이 낼 수 있는 에너지 100을 끌어낼 수 있는가는 지금에선 연출의 힘이다. 그것을 통해서 한번 만들어진 에너지는 작품의 과정 내 스스로 재생산되어질 것이다. ‘메디아’ 연습 과정 내 그 분위기가 압도를 하고 있었다. 일부 ‘이것이 창극으로서 가능할까’하고 의심했던 분들조차도 ‘이것은 된다.’ 하고 확신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곡가로서 지켜본 국립창극단 배우들의 에너지는 어땠나.
코러스의 마지막에 선 사람들의 움직임도 거의 주연 배우만큼의 에너지를 가지고 움직였다. 그것은 연습 초기에 분위기가 이미 다 잡혔다. 거듭되는 작곡 작업으로 인해 작곡가가 곡을 늦게 내놓아 단원들은 음악을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런데 연습 밀도가 무척 높아 악보가 나가고 2, 3일이면 거의 어느 정도 작품이 익을 정도였다. 악보에 익숙하지 않은 단원들은 젊은 단원들에게 악보를 목소리로 따서(듣고) 익히기도 했다고 들었다. 작곡가로서 감사한 일이다.
이번 작품에 주연은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 박애리와 신입단원 정은혜였다. 그들이 표독하게 혹은 애절하게 그려낸 ‘메디아’의 이면에 깃든 ‘음악’에 대하여 작곡가로서 곡을 쓴 후기를 말해 달라.
실은 작곡가로서 그들을 만족시키려 무던한 애를 썼다고 고백한다. 소리꾼이 가지고 있는 기량, 그 사람이 오랫동안 보냈던 시간을 무대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작품은 어떠한 작품이 시작되는 시간부터 보여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의 어린 시절부터 노력해온 결과, 판소리로 고민했던 그 시간의 결과가 노래하면서 보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을 보여줄 수 있게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그것이 창작자로서 매번 고민하고, 곡을 쓰는 것에 있어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당신은 내게 ‘메디아’를 쓰는 데 얼마나 걸렸느냐고 처음 질문했다. 나는 두 달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두 달이었을까. 나의 20년의 음악적 고민, 삶의 태도, 우리의 그 자세가 그 안에 담긴 것 아니었을까. 결국 박애리나 정은혜, 그리고 많은 코러스 배우들이 몇 십 년을 거쳐 지켜온 판소리의 자신감을 작품 스스로가 발견하게 해주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살아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글 정우정 기자(w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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