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에서 ‘음악’은 작곡가 사후에도 남을 영구한 원재료이며, ‘연출’은 무한히 열린 가능성을 지닌 동시대의 ‘재해석’이다. 국가 주도의 대형 오페라를 만들어 올릴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에 ‘한국적 오페라’가 요구된다면, ‘한국적’이어야 하는 것은 연출이 아닌 반드시 음악이어야 한다. ‘일회용 오페라’가 아닌 긴 생명력을 지닌 창작 오페라의 탄생을 바라며 이영조와의 대화는 시작됐다.
작곡가 이영조는 꾸준히 한국적 요소를 작품에 담아왔다. 오페라 ‘처용’ ‘황진이’, 칸타타 ‘용비어천가’, 클라라 주미 강의 음반에 실려 더욱 유명해진 바이올린 솔로곡 ‘혼자놀이’… 제목만으로도 그 안에 있을 ‘우리’를 짐작할 수 있다. 이영조의 음악은 왜 한국적인가. 그것은 철저한 개인의 취향일 수도, 혹은 시대가 낳은 결과일 수도 있다.
뜻밖에도 계기는 안이 아닌 밖으로부터 왔다. 군 복무 시절, 미군사령관이 ‘한국의 음악’에 대해 알고 싶다 하자 이영조는 김만복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 공연에 사령관을 데려갔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이방인은 “이것은 한국의 음악이 아니다”라며, 진짜 한국 음악을 들려달라 했다.
미군사령관의 청이니 나라에서도 조금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김기수ㆍ이주환ㆍ성경린 등이 모여 정식으로 연주회를 열었다. 그러자 이번엔 “당나라ㆍ송나라 악기들이고, 한국 악기는 몇 없는 것 아니냐”라는 물음이 돌아왔다. 이영조는 답을 할 수 없었다. 충격에 빠졌다.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음악ㆍ우리 악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사실에, 그 모습을 ‘외국인’ 앞에 보이고 말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것이 이영조가 우리 음악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한 계기였다.
제대 후, 그는 아버지를 졸라 국립국악원에 들어갔다. 정재국에게 피리를 배웠다. 절대음감을 갖춘 덕에 ‘스승’이 부는 대로 음을 기억했고, 서양음악을 한 탓에 박자에 딱딱 맞춰 들은 대로 연주했다. 그러자 “왜 지난번과 똑같이 부느냐”라는 질책이 돌아왔다. 저번은 비 오는 저녁이었고 오늘은 청명한 대낮인데, 어떻게 똑같은 음악이 나오느냐는 얘기였다. 이영조는 서양음악과 국악의 차이를 그렇게 직접 경험하며, 상한 자존심에 시작한 국악 공부에 점점 빠져들었다. 경험과 배움을 바탕으로, 1970년대부터 한국적 요소를 곡에 녹여냈다. 처음엔 “국악 가르쳤더니 ‘튀기’를 만들어놓았다”라며 국악계 어른들께 야단을 많이 맞았다. 그럴수록 이영조의 심지는 굳어졌다. 세상이 조금씩 변했다고 느낀 건 88서울올림픽을 전후해서였다.
오페라 ‘처용’은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국립극장이 제작, 1987년에 초연됐다. 청탁 받을 당시 이영조는 미국에 있었다. “초연 연출가 백의현 선생이 전화를 해서 가사를 보낼 테니 곡을 써달라 하더군요. 지금 돈으로 1억 원이 넘는 작품료를 준다면서요. 올림픽에 대비해 오페라를 만들어야 하는데 인성(人聲)에 대한 이해가 있는 작곡가가 누굴까, 수소문을 하던 중 몇몇이 나를 추천했다고 합니다. 나는 합창곡이 많지 않던 시절에 국립합창단 나영수 선생을 만나 인성에 대해 알게 됐거든요. 막상 대본을 보니, 여자 하나에 남자 여섯. 게다가 노승ㆍ옥황상제ㆍ역신 등 저음이 많아 앙상블이 불가능했죠. 결국 남성 중창을 주로 하게 됐는데, 여기서는 남성 중심 오페라가 나왔다고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나 봐요. 이번 재연을 위해 조금 보강을 했지만, 장면을 추가한 것이지 음악적 스트럭처와 오케스트레이션 등은 초연 때와 같습니다.”
‘처용’은 1987년 초연 당시는 물론이고 27년이 지난 이번 공연에서도 ‘유도동기 기법의 도입’ 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올해는 ‘바그너의 해’인지라 ‘바그너가 확립한 유도동기 도입’이라는 수식이 더욱 크게 놓였다. 사실 유도동기 기법은 몬테베르디 시절부터 쓰인 요소라며 이영조는 말을 이어갔다.
“바그너는 세세히 자르면 조성이 다 나와요. 전조가 많을 뿐이지 무조는 아니죠. 나는 조성이 없어요. 마지막 남성 합창은 르네상스의 성가로 돌아가기도 하고요. 화성을 해결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20여 개의 색을 만들어놓고 그걸 텍스트에 맞춰 집어넣은 식입니다.”
그럼에도 ‘처용’에 유도동기 기법을 도입한 데는 바그너의 그림자가 지긋이 깔려있다. 이영조는 카를 오르프 문하에서 열 달을 수학했다. 오르프의 건강이 암으로 점점 악화되자 그의 뒤를 이어 뮌헨 음대 수업을 맡은 이는 오르프의 제자인 빌헬름 킬마이어였다. 작곡가이자 당시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서 지휘를 하기도 했던 그는 학생들에게 오페라극장으로 레슨을 오게 했다. 이영조는 그곳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들었다. 4년간 바그너의 작품을 거의 다 봤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용’은 “춘향이가 왜 빈 왈츠에 맞춰 춤을 추는가(현제명의 오페라 ‘춘향전’)” “바그너로부터 한발자국 더 나아가고 싶다” “반음계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등 창작 오페라에 대한 이영조의 회의(懷疑)와 바람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1970ㆍ1980년대, 독일과 미국에서 살았던 이영조이기에 이러한 자성과 고민은 유독 선명히 가슴에 새겨졌으리라.
말이 다르니 음악도 다르다
이영조는 지난해 열린 핵안보정상회의에서 음악위원을 맡았다. 세계 정상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줄 것인가. 전통이 아니면 없었다. 한국 주재 해외 대사들은 보허자와 수제천을 열 번도 넘게 들었다며 새로운 것을 요구했다. 마치 수십 년 전 그 미군사령관처럼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으되 좀더 세련되고 현대화된 작품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민속’을 넘어 ‘예술’로서 국제적 수준에 걸맞는 작품의 탄생이 ‘무려’ 정책적으로도 요구되는 시대이지만 이영조의 말대로 “국악을 모르고 쓰면 어색하고 억지스러운 게 나올 뿐이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제대로 된 국악 교육이 없었습니다. 세마치ㆍ굿거리ㆍ대금ㆍ피리… 장단 몇 개, 악기 몇 개. 그 이상 아는 것이 없는데 한국적인 작품을 어떻게 씁니까. 국악의 현대화라는데, 뭐가 현대화인지. ‘오리지널’을 모르는데. ‘한국형 창작 오페라’가 나오려면 장기적 관점의 교육이 우선이에요. 젊은 세대가 국악을 편히 대할 수 있는 교육적 바탕이 있다면, 한국 사람은 반드시 한국 곡을 쓰게 돼 있습니다. (한예종 산하) 한국예술영재교육원에서 작곡과 아이들에게 단소를 배우게 했어요. 처음엔 ‘새야 새야’ 같은 쉬운 곡을 배우는데, 그걸 익힌 아이들이 변주를 하는 걸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와요. 이제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인 아이들이에요. 그 애들이 크면 자연스럽게 우리 것을 쓸 수 있죠.”
그렇다면 젊은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위촉할 때, 나라에서 배려할 것은 없는가?
“작곡가의 개성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전통이 담긴 곡을 원한다면, 그걸 쓸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죠. 전통에 어둡고 그게 싫은 사람에게 위촉을 하면 좋은 곡이 나올 수가 없죠. 그게 나라에서 할 일이고. 작곡가들은 기회가 오면 하세요. 다만 충분한 공부와 인식, 신념이 있지 않고,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작곡료 받고 그렇게 쓰면 안 돼요. 그건 단지 ‘그리기’예요. 악보를 눈으로만 보면 정말 멋있는데, 들을 수는 없는.”
그러나 여전히 물음은 남는다. 청탁을 받았다 하더라도, 특별한 주문이 있더라도, 결국 ‘작곡’은 작곡가 개인의 창작이다. 더군다나 시간이 흐르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사조’가 아닌 국적불문 개인 역량으로 탄생되는 오늘날의 음악 앞에서 ‘우리’를 논하는 것은 촌스럽고 무의미한 일… 아닌가? 이에 이영조는 “흥부놀부 이야기로 오페라를 써달라는데 ‘앨리스’ 같은 음악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답한다. 이는 ‘우리 이야기니까 우리 장단과 우리 선율을 교묘하든 또렷하든 넣어야 하지 않겠냐’ 식의 단순하고 일방적인 의미가 아니다. ‘우리’에 대한 작곡가의 고민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보다 ‘우리말’에 있다.
실제로 ‘처용’은 4분의 5, 4분의 7… 시종일관 변하는 박자 속에 흐른다. 말의 강약에 맞춰 마디를 나눠놓았기 때문이다. 청자의 입장에서는 마디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음악이 흐를 뿐이지만, 노래하는 사람은 쉬지 않는 변박에 적응해야 한다. 우리말의 음악화에 대한 고민은 작곡가만의 영역이 아니다. 대본을 쓰고 작사를 하는 사람은 반대로 오페라 발성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영조는 대본가들과 상의해 가사의 여럿을 고쳤다. 오페라 장르의 묘미 중 하나가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오는 성악가들의 엄청난 성량과 비르투오시티인데, 우리 어말에 자주 등장하는 모음 ‘어’로는 뚫린 발성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말에 따라 가사와 박자와 선율… 모든 음악 요소가 달라진다. 말이 다르면 음악도 다르다.
2013년, 서울 강남의 환락을 배경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처용’. 시대불문ㆍ국적불문의 오페라 연출이 대세인 오늘날, 전통의상을 입지 않은 처용과 가실의 모습, 신라 서라벌이 청담동으로 바뀐 점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처용’은 오페라다. ‘음악’은 영구한 원재료이며 ‘연출’은 무한히 열린 가능성을 지닌 ‘재해석’이다. 국가 주도의 대형 오페라를 만들어 올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한국적 오페라’가 요구된다면, 여기서 ‘한국적’이어야 하는 것은 연출이 아닌 반드시 음악이어야 한다. 한국적 음악, 아니 한국적 서양음악… 한국적 오페라. 이영조와의 긴 대화 후에도 여전히 석연찮게 맴도는 ‘한국적 오페라’라는 정의이자 질문을 품고 나는 정치용을 만나러 나섰다.
글 박용완 기자(spir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