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수집에 대한 기억은 오래전 유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내에서 LP를 사 모으다, 1989년부터 2년간 미국에서 공부하던 동안에는 BMG클럽(염가음반 통신판매)에 가입도 하고 타워 레코드에 들러 CD를 사 모으곤 했다. 어떤 음반이 좋은지 알아보기 위해 펭귄 가이드 같은 책자들도 꽤나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하나 둘씩 모으던 음반이 은근하게 늘어나 유학 생활에 꽤 부담이 되었는데, 공부를 모두 마치고 돌아올 때는 600여 장이 되었다. 최근에는 DVD에 이어 블루레이까지 구입하다 보니,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불평 또한 상당하다.
요즘에는 공연장을 직접 찾을 여유가 점점 줄어들면서, 생생한 공연의 감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 크다. 하지만 오페라 DVD를 통해 실황 공연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고, 또 집 안에서 되풀이하며 감상할 수 있으니 지금이야말로 참 좋은 시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부터 예술계에서 흔히 쓰이는 수식어가 ‘???의 3대’라는 것인데,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최고로 꼽는 오페라는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와 비제의 ‘카르멘’이다. 요즘도 짬이 날 때면 두 작품의 음반이나 DVD를 찾아보곤 한다. 일상의 고단함 속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는 시간인 셈이다. 그중 ‘라 트라비아타’는 플라시도 도밍고와 테레사 스트라타스가 출연하고, 제임스 러바인/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아 영화 식으로 제작된 영상물을 제일로 손꼽을 때가 많다.
‘라 트라비아타’는 당대 사회의 이중윤리를 비판하는 작품이지만, 노래와 영상을 듣고 있노라면 비판적 사고보다는 감흥에 젖어드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귀공자의 자태를 풍기는 도밍고의 멋진 모습들과 더불어 1막에서 줄기차게 내달리는 연주는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노래와 화려한 장면들로 인해 마음을 쉽사리 빼앗길 수밖에 없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축배의 노래’뿐 아니라 알프레도가 비올레타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장면, 비올레타가 사랑과 인생에 대해 독백하는 장면 또한 그 아름다움이 참으로 뛰어나다.
비제의 ‘카르멘’은 근래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야닉 네제 세갱이 지휘를 맡고 엘리나 가란차와 로베르토 알라냐가 열연을 펼친 영상물이 특히 탁월하다. 가란차가 연기하는 카르멘의 매몰찬 모습을 보노라면 영상 너머로 전해지는 감정 표현에 가슴이 아련해진다. 돈 호세 역의 알라냐 역시 실제 성격이 극중 캐릭터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어리숙한 모습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여기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자랑이라 할 만한 무대 배경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상미 또한 뛰어나다. 특히 2막 초반 ‘집시의 노래’에 등장하는 집시들의 춤은 이제껏 나온 ‘카르멘’ 중에서 단연 최고로 손꼽고 싶다.
‘내 인생의 3대 오페라’의 마지막을 완성하기 위해 쉬는 날이면, 여러 DVD를 살피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비극적 사랑, 불꽃같은 인생…. 마음을 오랫동안 잡아당길 내 인생의 마지막 오페라는 무엇이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동그라미를 꺼내다’에서는 ‘내 생애 잊지 못할 음반’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이번 호에는 경기도 평택시장 김선기 씨의 동그라미를 나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