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열린 독창회에서 조수미는 7개국어로 바흐ㆍ퍼셀ㆍ헨델ㆍ비발디ㆍ포레ㆍ레이날도 한ㆍ드뷔시ㆍ헨리히 프로흐ㆍ호아킨 투리나ㆍ페르난도 오브라도스ㆍ호아킨 로드리고ㆍ빌라 로부스ㆍ말러ㆍ라흐마니노프ㆍ루이지 아르디티의 곡을 불렀다. 두 곡의 앙코르를 포함, 냉방이 되지 않는 극장에서도 노련하게 공연을 이끌어나갔다. 그녀의 목소리가 극한의 기교에 다다랐을 때 극장을 가득 메운 청중은 숨을 죽였다. 마지막 곡이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길게 이어진 기립박수는 영혼을 어루만지고 지나간 목소리에 대한 찬사였을 것이다. 그 목소리에 빛이 서려 있었는지 가슴 한구석에 반짝, 불이 들어왔다.
독창회 바로 전날 파리에서 그녀를 만나 ‘조수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1983년 이탈리아에 처음 갔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굉장히 힘들었어요. 영양실조로 길에서 쓰러진 적도 여러 번이었죠. 상상을 초월할 만큼 외롭게 지내왔어요. 그 텃세 강한 오페라의 나라에, 처음부터 유명해지겠다는 생각으로 간 건 아니었어요. 단지 제가 가진 재능에 자신이 있었고, 또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고, 게다가 남한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을 뿐이에요. 최소한 유럽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잘해야 하니까 늘 긴장 속에 있었죠.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했어요, 부모님과 조국,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연습 시작할 때부터 “쟤 누구야? 동양 여자?” 하며 구경거리가 되고, 시선이 집중됐어요. 그러니 첫 연습 때부터 완벽해야 했죠. 팽팽하게 당겨진 줄 위에서 거의 처절할 정도로 살았어요.
한편으로는 행운도 많았어요. 다들 어려워하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에 레퍼토리가 집중돼 있었고, 게다가 카라얀 선생님을 만났죠. 세계적인 음반 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은 것도 그렇고요. 지금까지 50장이 넘는 음반을 내고 여전히 음반 작업 중이에요. 매일 전쟁같이 살았고, 지금도 그래요. 저는 어지간한 일에는 별로 놀라지도 않아요. 난관을 극복하는 것도 잘해요. 타고난 성격 탓도 있을 거예요.
늘 아무도 없는 길을 향해 문을 열었고 스스로 길을 내면서 왔어요. 힘들었던 반면 성격에도 맞았던 게, 저는 누가 갔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별로예요. 가다가 큰 장애물이 있으면 오히려 도전하고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다행히 재능이 있었어요. 당시 ‘코리아 헤럴드’ 기자였던 어머니께서 헌신적으로 뒷바라지를 해주셨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처음 찾아 뵈었던 이경숙 선생님께서 오디션을 봤을 때부터 껴안아주시면서 축복의 말씀을 해주셨죠, 이탈리아 도착하자마자 어디서 배웠느냐며 내일 당장 무대에 서도 되겠다 할 정도로 한국에서 이미 발성·음악세계·가치관… 이런 걸 다 제대로 배웠어요. 유럽에 와서 배운 건 좀더 깊은 음악적 표현, 문화나 언어적인 측면이에요. 피아노를 잘 치는 것도 도움이 되었어요.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아파서 제가 무려 60명을 다 반주했어요. 사실 성악가들은 몸이 악기이고, 몸통을 울려서 소리 내는 방법을 각자가 깨달아야 해서, 자기 악기는 자기 자신이 가장 제대로 다룰 줄 알아야 해요. 그게 가장 어려워요.
처음 데뷔했던 1986년만 해도 한국의 이미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어요. 한국이라면 다들 한국 전쟁, 또는 아주 불쌍하고 가난하고 문화적으로 후진국인 약소국으로 알고 있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교민들, 유학생들 모두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 취급 받고, 연주 여행을 가도 한국 여권을 가진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어요. 그것이 지금 제가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만사 제치고 가는 이유이기도 해요. 나라가 잘 되어야지, 저에게도 잘 되는 일이라는 걸 체득했으니까요. 그래서 요즘 음악계에서 한국인들의 활약이 더욱 놀라워요. 이번에 ‘르 피가로’에서도 저를 필두로 젊은 한국 성악가들에 대한 심도 깊은 기사를 썼으니 좋은 일이에요. 저 혼자 이룬 건 아니죠. 1970년대부터 정경화 선생님이 있었고, 지휘자 정명훈, 작곡가 진은숙 선생님이라든지 각자의 분야에서 개별적으로 뛰어난 활동을 하셨으니 전체적으로 수준이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제일 싫어하는 게 매너리즘에 빠져 발전이 없는 거예요. 데뷔 이후 26년 동안, 처음에 넘치는 재능으로 반짝이던 별들이 정말 많이 사라졌어요. 자기 성대의 능력을 넘어서는 레퍼토리에 도전해서 목을 과하게 쓰고, 악기가 상하고 망가지는 무리한 도전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저는 그 부분을 정말 조심했어요. 1989년에 DG에서 플라시도 도밍고와 ‘가면무도회’를 녹음할 때 카라얀 선생님이 다음엔 벨리니의 ‘노르마’를 하고 싶다고 했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서 안 하겠다고 했어요. 그 당시 카라얀 선생님한테 “노(No)”라고 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죠. 저도 큰 용기를 내서 거절했어요. 카를로 베르곤치가 베르디의 ‘루이자 밀러’를 같이 하자고 했을 때도 저는 소프라노 레제로이지 리릭은 아니기 때문에 거절했어요. 좋은 기회라고 해서 안 되는 걸 무조건 하는 건, 커리어 욕심 때문에 흔히 저지르기 쉬운 실수예요. 당장은 몰라도 오히려 “노”라고 하는 게 길게 봤을 때에는 커리어에 도움이 돼요. 성대는 정말 섬세한 조직이고, 잘못하면 한 순간에 굉장히 많이 망가져서 회복 불가능이 되거든요. 그래서 늘 테크닉적으로 안정을 찾기 위해 노력하죠. 사람인 이상 컨디션이 늘 100퍼센트일 수는 없어요. 그런데 탄탄한 테크닉이 있으면 컨디션이 좋지 않더라도 관객이 그걸 눈치 챌 수 없게 덮을 수 있죠. 테크닉이 없거나 모자라는 일류 음악가는 없어요. 테크닉은 기본 중 기본이고 거기에 음악성·인성·카리스마·언어·성격 모두 중요하죠.
내일 샤틀레 극장에서 7개국어로 연주하는 건 저도 무척 떨려요. 외국어에 재능이 많은 건 아니지만, 도전을 좋아하고 판에 박힌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건 자존심이 상해요. 창법도 벨칸토를 배웠지만 모차르트·초기 바로크·요한 슈트라우스·프랑스 샹송과 아리아도 좋아해요. 언어도 에스파냐어·포르투갈어까지 계속 연습하고 있고, 그 언어들에 서린 정취를 제 것으로 만들어가는 게 재미있어요. 클래식을 어려워하는 분들을 위해 드라마나 가곡도 열심히 불러요. 종종 선배님들의 가곡 음반을 듣다 보면 가사 전달이 되지 않아 이해하는 게 좀 힘들어요. 물론 우리말이 힘들긴 해요. 저는 딕션에 정말 신경을 써서 발음이 과장되게 들릴 정도로 불러요. 가사를 못 알아들으면 그건 노래가 아니죠. 작곡가를 만날 수는 없지만 그의 의도를 상상하고 제 것으로 만들어가면서 중간자 역할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흥미롭고 거기서 책임감도 느껴져요. 지금도 여전히 해야 할 작품이 많아요. 이 세상에 있는 음악 중 아마 5퍼센트나 했을까. 너무 많아서, 그 생각을 하면 밤에 잠이 안 와요. 자는 시간도 아까워요. 욕심이 많은 편이에요.
음악가와 엔터테이너
아주 어릴 적부터 제가 독특한 재능이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았어요. 운명이 남달랐어요. 시집 가서 한 남자의 아내로 평범하게 살거나, 음악을 하면서도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예감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독특했고, 두려움이 없었고, 유럽에 와서도 그게 잘 맞아떨어졌어요. 진취적인 성향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활발한 성격, 쉽게 좌절하거나 어디 가서 우울해지지 않는 성격이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좀 많이 읽었어요.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책이 유일한 나의 벗이었어요. 기자인 어머니가 늘 책 읽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어요. 그래서인지 지금도 눈이 굉장히 안 좋아요. 한번 책을 펴면 이불 덮고 보더라도 결말을 알아야만 직성이 풀렸죠.
지금은 무대에 있는 걸 좋아해요. 여왕 같은 기분이 들어요. 천하를 지배하고 세상을 다 가진 그런 여왕이요. 노래할 때 콜로라투라 기교를 선보이면 관객들이 숨도 안 쉬거든요. 사람들의 집중이 바로 전해져요. 제가 노래하고 있는데 누가 움직이거나 딴짓하는 거 싫어해요. 무대에서 제가 최고라는 확신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무대에서 빛이 나니까요. 최소한 아티스트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면, 이 무대는 내가 서기 때문에 중요하고, 나의 최고는 이 무대에서 펼쳐진다는 자세로 임해야겠죠. 모든 아티스트에게는 자만심이 아닌 자신감과 자존감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최고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하고요. 자기 관리도 노력의 일부예요. 감기 안 걸리려고 늘 터틀넥을 입고, 운동하고… 제약이 많아요. 늘 제대로 먹고, 와인은 절대 안 마셔요. 아름다운 백조가 물 밑에서 열심히 발을 움직이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요. 성악가들은 겉으로는 화려할지 몰라도 그건 순간일 뿐이에요.
저도 사람이니까 무대가 두렵고 연습을 백만 번 해도 힘들어요. 그렇지만 그저 맡기는 수밖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죠. 무대에서 즐기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어요. 짜릿함도 있죠. 무대에 서는 건 뭐랄까, 애인을 만나러 가는 느낌이에요. 매번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준비하고, 잠 안 오고 설레고… 그리고 아주 깊고 내밀한 소통을 하고요.
다음 생에는… 노래는 안 할 거예요. 수의사 아니면 어린이들과 함께 있는 유치원 교사, 사회복지사 이런 일을 할 것 같아요. 뭔가 바뀌는 걸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음악의 힘이 있지만, 그 작용이 쉽게 보이지는 않아요. 지금까지 어느 곳에서든 노래 하나로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고, 공연이 끝나면 기립박수가 쏟아졌어요. 그런데 살아보니까 음악이 사치인 경우도 있더군요. 생활고에 찌들거나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는 음악의 힘이 닿지 않아요. 그런 뉴스를 접하면 허탈하죠.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의사 같으면 눈앞에서 환자의 병이 고쳐지는 게 보이겠지만 음악은 어디 그런가요.
가끔은 제가 음악가가 아니라 엔터테이너라고 생각해요. 예술도 이제 재미가 없으면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아요. 사람들이 좋아하고 흥미를 보여야 예술로서 남을 수 있죠. 저는 예술을 즐길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지점에 포커스를 두고 있어요. 유네스코 평화의 아티스트 등으로 일하고 있지만, 제일 중요한 건 역시 대한민국이에요. 나라가 문제가 많으면 그게 다 같이 가니까 사회의식이 투철해진 것 같아요. 음악인으로서 음악을 통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면, 중요한 메시지를 저의 음악과 얼굴을 통해 전달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합니다.
나한테 참 맞는 세상
트위터나 페이스북, 미니홈피도 열심히 합니다. 트위터 팔로워가 팔천 명이 넘어요. 저랑 직접적 관계가 없는 학생이나 주부, 회사원 그런 사람들의 생활을 알고 싶거든요. 어떻게 사나, 무슨 생각을 하나 이런 걸 보려고요. SNS를 직접 다 하고 사진도 직접 다 올리고 댓글도 다 써요. 그래서 요즘 많이 바빠졌어요. 음악하는 사람들은 섬에 갇혀 있기가 쉬워요. 단절된 세계 속에서 ‘내 음악’만 하는 거예요. 저는 그게 못마땅해요. 물론 음악이라는 것이 얼마나 혼자 시간을 보내며 매달려야 하는지 알지만, 어느 정도 그 시간을 보냈으면 이제는 바깥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음악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의식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음악을 하는 의미가 없어요. 음악을 좋아하고 클래식을 좋아하는 소수를 위해 하는 음악은 이제 현실에 안 맞는 것 같아요. 사회와 세계가 바뀌고 있으니까요.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그걸 이용해야겠죠.
세상이 변하면 우리도 변해야 하고 거기에 맞춰가야 해요. 클래식 음악을 하는 젊은 사람들 보면 새로운 시도들을 많이 하는데, 저는 그 모두를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어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고요. 유튜브랑 구글은 ‘베스트 프렌드’예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저 같은 사람한테 정말 너무나 좋은 소통 방식이에요. 다 대답은 못하지만 트위터로 응원 멘션도 많이 들어오고… 저한테 참 맞는 세상이 온 것 같아요. 1980년대 인터넷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1980년대에는 손으로 일기를 열심히 썼는데 이제는 더 이상 일기장에 쓰지 않으니 그런 아날로그적 감성은 사라져가겠죠. 기록하는 걸 좋아하고 읽는 것도 워낙 좋아해요. 나랑 동시대에 살지 않았지만 우리를 이끄는 프리마돈나의 자서전·일대기를 여러 권 읽으면서 비교해봐요. 왜냐하면 제가 사는 생활이 그 사람들과 거의 비슷하니까요. 고민되는 순간에 그 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꼼꼼히 읽고 몇몇 문장은 옮겨 적기도 해요. 읽고 또 읽어요. 종교나 철학 관련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해요. 예전에는 소설이나 유명한 베스트 셀러들 위주로만 읽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삶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책이 더 필요해지더라고요.
못 본 척, 모르는 척하지 않는 삶
인성적으로 불완전하달까, 너무 자기 자신에게만 빠져 있던 시기가 저에게도 있었어요. 1995년부터 2000년 사이에 연주가 너무 많았고, 어디에서든 제가 제일 잘해야 하고 눈에 띄어야 했어요. 철저하게 나만을, 나의 음악만을 위해서 살았어요. 아시아 출신 프리마돈나로서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제가 뛰어나다는 걸 증명해야 했어요. 전쟁터에서 살 듯이 살았어요. 언제나 제일 잘해야 하니까. 살고 연습하고 연주하기에도 바빴어요. 연주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뭔가를 하고 싶어도 마음만 굴뚝 같고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이제는 여유도 있고, 음악적인 것도 어느 정도 이뤘고, 받은 걸 베풀고 싶어졌어요. 인생에 몇몇 터닝 포인트가 있더라고요. 몇 년 전 브라질에 가서 빈민굴을 봤을 때의 충격이 결정적이었어요. 그 어린 아이들이 맨발에, 동물보다 못한 상상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걸 본 충격이 잊히지 않았어요. 제일 좋은 호텔, 아름다운 옷과 깨끗한 물, 맛있는 음식을 취하는 일을 너무 당연히 여겨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과 동시에 죄책감마저 들었어요. 옛날에는 ‘나랑은 상관없어, 나 살기 바빠’ 이랬는데 이제는 시간을 좀더 내서 뭔가를 하고 있어요. 9월 14·15일 파크 콘서트는 추석을 앞두고 가곡과 친숙한 레퍼토리 위주로 클래식 음악을 어려워하거나 접하기 힘들어 하는 분들께 선물처럼 준비하는 공연이에요. 9월 초에는 브라질 상파울루 어린이들을 위한 뇌종양 수술 전문 병원에서 자선 공연을 하고요. 한국의 재활병원에 기부도 해요. 뭔가 해야 할 것 같아요. 재능이든 기부금이든 뭐라도 해야 발 뻗고 잠이 올 것 같은 사회적 책임감이 오더라고요. 20대에는 그런 거 없었죠. 여기에서 최고가 되려면 실력으로 모든 걸 다 뛰어넘어야 했으니까. 이제는 음악계에 성악가로서 ‘조수미’라는 이름이 각인되었으니 제 이름값을 더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연주를 조금은 덜 하더라도 사회활동을 하는 게 값어치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저의 본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이가 들면서 그냥 못 본 척, 모른 척 비겁하게 사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참 비겁하게 살기가 쉬워요. 자기 몸 사리고 조심하는 건 좋은데, 소리를 내고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건 비겁한 것 같아요.
늘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죠. 말하는 것보다 행동하는 게 더 중요해요. 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힘들지, 말은 누구든 잘 할 수 있죠. 이제는 일을 한 다음에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망을 말할 때에는 진심을 담아요.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요. 나이가 들고 인생을 알아가면서, 흰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닌 회색이 되기 쉬워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흑백이 분명해요. 맺고 끊는 것도요. 어떨 때는 불편할 정도로 최소한 저 자신에게는 정직하니까, 저는 이게 좋아요.
예술가에게 투명하지 않은 삶은 있을 수 없어요. 노래할 때 다 보여요. 그게 다 보이니까 무섭고 두려운 거죠. 잘못 살면 그게 다 보일까 봐.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을 봐서 그런지, 특히 노래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소리만 들어도 대강은 알 것 같아요. 저는 두 사람인 것 같아요. 바라보는 나와 ‘진짜 나’. 오래전부터 내가 둘이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자신을 분석하고 반성하며 살았어요.
무대 위에 있는 나, 무대 밖에 있는 나, 하루의 생활, 나의 행동, 항상 철저하게 떨어져서 분석하고, 반성하고, 정당한지 아닌지를 평가하고 그랬어요. 자신에게 마조히즘에 가까울 정도로 그렇게 쥐어짜면서 살았어요. 이젠 습관이 되어서 편안하게 살아지지가 않아요. 남들이 하는 건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게 안 돼요. 완벽주의자라기보다도, 저는 대강 하는 건 못하는 사람이에요.
노래하면서 참 행복한 일도 많았고 시련도 많았어요. 아버님 임종도 못 보고 노래를 해야 했던 건 참 잔인한 일이었죠. 몸도 많이 다쳤고요. 연주가 있는 사람한테는 아플 자유도 없는 거예요. 앉아서도, 열이 40도 넘어가는데도 노래하고, 목소리가 하나도 안 나오는데도 무대에 섰고, 어머니는 수술이 있어도 이야기 안 하시죠. 예술가로 산다는 게 쉬운 세상이 아니고 악도 많고, 지저분한 일이 벌어지고, 그걸 자주 지켜보게 돼요. 흙탕물 같은 세상에서, 영혼을 울리고 음악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감명을 줄 수 있다는 건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착하고 선하게 살려고 처절하게 노력해야 해요. 다른 악기와는 달리 특히 성악은, 영혼이 다 비쳐 나오니까, 순수하게 살아야 하죠. 100퍼센트 투명한 영혼을 지키려고 노력해요. 노래 잘하는 거야 한두 번 잘할 수 있고, 노래 잘하는 사람은 여럿이죠. 하지만 뭔가 다르게, 신성한 연주를 하려면 내공이 필요해요. 쉽지 않은 일이에요. 어느 땐 저도 악해지거든요. 사람이 나빠지는 건 한 순간이에요. 미친 듯이 빨리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이 실제 일어나는 현실에서… 빛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불가능한 것은 아니죠. 많이 참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노력하고, 그러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자기 자신을 다독이면서 용기를 주면서, 그렇게 가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그렇게 왔으니까요. 게다가 이젠 인생 선배로서 같이 가는 사람들도 토닥거려줘야 해요. 저는 이제 투정을 해도 안 통하는 나이가 되었어요. 그래도 이렇게 가려고요. 영혼의 순수함과 온기 어린 시선을 간직하고, 이젠 긴장 속에서 저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음악에서 받은 것을 더 넓고 깊게 갚아나가고 싶어요. 제 노래로요.
*조수미 파크 콘서트 ‘라 판타지아’ – 9월 14·15일 오후 6시, 올림픽공원 88잔디마당 야외 무대. 소프라노 조수미·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보컬 앙상블 로티니·지휘자 아드리엘 김·디토 오케스트라 출연
글 김나희(파리 통신원) 사진 크레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