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국제음악제 저명연주가 시리즈

진정한 선물, 음악이 만들어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9월 1일 12:00 오전


▲ 정경화·로버트 맥도널드

예술가의 예민한 감각은 작곡가의 기질과 합해져 엄청난 힘으로 다가왔다

지금 이 순간, 절실히 듣고 싶은 음악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음악을 만나는 방법은 있다. 바로 여행 속에서 만나는 음악이다. 산과 바다를 찾아 내 영혼이 원하는 장면 하나하나를 마음속에 담으면서 마치 그림엽서에 빈 칸을 채우듯 멋진 음악을 곁에 놓아두는 여정은 발걸음뿐 아니라 우리의 귀마저 즐겁게 한다. 그곳에서 함께 한 음악은 자신만의 특별한 추억과 합쳐져 결코 잊을 수 없는 선물이 되기 마련이다.
이제 한여름 클래식 축제를 대표하는 이름이 된 대관령국제음악제가 올해로 10년을 맞았다. ‘노던 라이트(Northern Lights) – 오로라의 노래’를 주제로 한 이번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북유럽 하늘을 신비하게 수놓는 오로라와 같이 빛나는 국민 음악파 작곡가들의 곡을 메인 요리로 삼았다. 여름철에 걸 맞는 주제 아래, 신구 조화에서 다분히 신예 음악가들의 약진으로 초점이 맞춰진 이번 공연들에서는 북유럽의 서늘함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낸 무대 위의 젊고 뜨거운 집중력이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연주자와 프로그램 구성에 따라 각각 ‘저명연주가’ ‘떠오르는 신예’ 등으로 나뉘어 강원도 각 지역에서 열린 약 30여 회의 음악회 가운데, 7월 26일 오후 7시 30분과 27일 오후 2시에 알펜시아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저명연주가 시리즈를 감상했다. 두 공연 모두 창의력과 재치가 돋보이는 프로그램과 실내악의 미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연주자들의 예민한 교감이 청중들의 피부로 다가오는 무대였다.

시원한 감성과 뜨거운 집중력이 돋보인 연주
7월 26일 저녁 공연의 첫 곡은 코다이가 1920년에 만든 두 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세 악장의 세레나데였다. 전통적인 형식 안에 다조 화성과 민속 리듬, 당시 헝가리의 암울한 정치 상황이 반영된 변화무쌍한 악상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듯한 난곡을 세 명의 현악기 주자들은 시종 즐겁고 활기찬 분위기로 이끌어나갔다. 제1바이올린의 김수연은 정확한 인토네이션과 넘치는 에너지로 제 역할을 해냈고, 이를 받아주는 황천원(폴 황)의 바이올린은 상대적으로 가늘지만 옹골차게 작품의 선율미를 찾아냈다. 이유라의 비올라 연주는 카리스마와 깊은 표현력에서 단연 뛰어났는데, 전곡의 기둥을 든든하게 맡는 동시에 은근한 주인공으로서의 활약도 돋보였다.
레퍼토리의 폭이나 활동 범위에 있어서 현역 첼리스트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다비드 게링가스와 피아니스트 김다솔이 호흡을 맞춘 작품은 브리튼의 첼로 소나타였다.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된 이 작품은 브리튼이 대가를 통해 표현한 악기에 대한 존경심과 바로크 음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 난곡이다. 게링가스의 존재감은 여유로움과 정제된 음악성을 통해 서서히 나타나는 종류의 것이라고 하겠는데, 이번 연주에서도 그러한 특색이 여실히 드러났다. 세련된 음상과 과장이 없는 노래, 쉼표를 포함한 갖가지 여백의 미를 살린 뉘앙스의 표현 등은 스케르초-행진곡-무궁동으로 이어지는 악상의 고조에서 멋지게 그려졌다. 김다솔의 자세는 그가 실내악의 여러 무대와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흥미로운 음향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드러냈다. 특히 시종 조심스러움의 기조 위에서 작품의 얼개를 분명히 잡아내는 모습이 뛰어났다.
스트라스부르와 파리에서 공부했으며, 실험정신이 뛰어난 지휘자인 동시에 작·편곡자로도 활동하고 있는 장 폴 프냉의 왈츠곡집 ‘1930년 파리의 추억’ 중 피아노 2중주를 이번 프로그램에 넣은 것은 기획자의 재치이자 적절한 분위기 전환이다. 벨빌-오르세-간주곡, 붉은 얼룩의 카바레-예술의 다리로 이어지는 네 개의 왈츠는 흥겨운 동시에 센티멘털하며, 즉흥적인 동시에 표면적인 감상을 담고 있다. 유연한 호흡으로 네 개의 손을 건반 위에 올린 피아니스트들은 손열음과 김다솔이었다. 촉촉한 멜랑콜리가 감도는 배경을 마련해준 김다솔의 명민함, 상대적으로 끈적임이 덜한 대신 새초롬한 감성을 과하지 않게 노래한 손열음의 조화는 세련된 균형미를 이루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대가 그리그의 대표적 실내악곡인 바이올린 소나타 3번 C단조는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가 무대를 장악하는 방법은 늘 비슷하나 무서운 흡인력을 지닌다. 자신의 예민한 감각을 온전히 청중들과 나누는데, 그 일체화된 아우라가 작곡가의 기질과 합쳐지는 순간 엄청난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내제된 정열을 솔직히 보여주는 능력은 다소 내성적인 감성의 그리그에서도 절절하게 드러났다. 간혹 과도한 활놀림에서 그 정열이 조절 능력 밖으로 잠시 나간 것을 제외하고, 대가의 풍모는 결코 흐트러짐 없이 작품의 매력을 나타내는 것에 백 퍼센트 몰입했다. 체임버 연주자로서의 노련함이 뛰어났던 로버트 맥도널드의 조력은 넉넉한 아량을 보이며 솔리스트의 카리스마에 손을 들어주었다.


▲ 김다솔·다비드 게링가스

무대 위에 불어온 서늘한 이국의 바람
7월 27일 오후 2시에 있었던 저명연주가 시리즈 세 번째 무대는 더욱 이국적인 분위기로, 더운 계절에 적절하게 어울리는 시원한 선곡이었다. 첫 곡인 파가니니의 기타 4중주 15번 A단조는 바이올린뿐 아니라 비올라·기타 등의 연주에도 높은 기량을 지니고 있었던 작곡가의 대곡이다. 그가 음악가로서의 전성기를 보냈던 1820년 만들어진 이 4중주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아홉 곡 가운데 비올라의 활약이 돋보이는 특이한 구성이다. 이번 연주에서도 비올라를 맡은 로베르토 디아스의 활약이 우선 눈에 띄었다. 바이올린 이상으로 현란한 패시지들의 처리와 리더십이 돋보였으며, 오케스트라와 실내악을 통해 쌓은 연륜이 여유롭게 묻어났다. 첫 악장인 마에스토소의 화려함과 아다지오 칸타빌레의 오페라적인 연출은 디아즈의 공이라고 하겠다. 바이올린의 클라라 주미 강은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내세우며 이탈리아적 감수성을 드러냈으며, 박상민의 첼로 역시 낙천적이고 즐거운 배경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무대 특성상 다소 음량이 작았던 아쉬움은 있지만 달콤한 음색과 서정성을 듬뿍 지닌 장대건의 기타 역시 우아했다.
이어진 국립합창단의 스칸디나비아 합창 모음곡은 지휘자 이상훈의 학구적 면모와 치밀함이 돋보였다. 엄숙한 가톨릭 신앙의 반영인 얀 산드스트룀의 ‘글로리아’는 청명한 음색과 부드러운 악상 변화가 두드러졌다. 역시 구약성서의 텍스트를 배경으로 한 토마스 옌네펠트의 ‘풍요로움에 대한 경고’는 강렬한 가사 연출과 인상적인 불협화음, 교묘한 다이내믹 배열이 훌륭했다. 다성부 처리와 이에 따른 입체적인 화성 구성이 인상적이었던 다비드 비칸데르의 ‘은방울꽃’에 이어 마지막은 야코 멘튀예르비의 ‘가짜 요이크’였다. 자국의 민요 전통을 살리면서도 가짜 핀란드어를 사용해 흥미로운 위트를 살린 작품에서 국립합창단은 변화무쌍한 리듬과 강렬한 에너지를 유감없이 발산하는 모습이었다.
평소 잘 연주되지 않는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트리오 B♭장조 Op.21의 선택은 아마도 팀워크의 중심인 첼리스트 정명화의 의견이 반영됐을 것이라 추측해본다. 다량의 실내악 작품을 썼으나 연주자와 청중 모두 편식의 책임을 면할 수 없는 드보르자크의 세계를 흔히 만날 수 없는 길을 통해 만났던 소중한 기회였다. 작곡가 특유의 낙천성과 젊음의 매력이 가미된 풋풋함이 조화로운 이 작품은 시종 흐뭇함과 흥겨움이 녹아들어 있는 분위기로 연주됐다. 악기 간의 균형 역시 세심한 배려를 통해 적절히 이루어졌으며, 주제의 발전과 긴장의 고조 등을 연출하는 과정에서도 빈틈없이 긴밀한 호흡이 돋보였다. 특유의 비르투오소적 표현을 살짝 감춘 백혜선의 피아노는 입체적인 다이내믹으로 텍스트 적재적소에 양념과 같은 역할을 했으며, 러시아의 신예인 바이올린의 보리스 브롭친은 작품의 포인트들이 모인 ‘봉우리들’을 멋지게 그려낸 동시에 개인 기량 면에서도 큰 그릇의 모습을 보였다. 언제나 넉넉한 음상으로 다른 연주자들을 포용하는 정명화의 진가 역시 유감없이 발휘됐으며, 의식적인 음악적 제스처 없이 자연스러운 스케일을 편안하게 이끌어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 사진 대관령국제음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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