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로크 당테롱 페스티벌

피아노의 이토록 다양한 가능성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9월 1일 12:00 오전

올해로 33회를 맞은 라 로크 당테롱 피아노 페스티벌에서 반더러 트리오ㆍ프란체스코 트리스타노ㆍ알렉상드르 타로ㆍ피에르 로랑 에마르를 만났다


▲ 눈빛으로 통하는 반더러 트리오

7월 24일 반더러 트리오
아르모니아 문디의 간판 스타이자, 세계적 명성을 지닌 반더러 트리오는 그들의 장기인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1ㆍ2번으로 라 로크 당테롱 부근 랑베크의 야외무대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15년 동안 꾸준히 페스티벌에 매년 초대된 이 트리오는 끈질기게 울려 퍼지는 매미 소리와 무대 위를 지나가는 고양이의 출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놀라운 집중력으로 슈베르트가 지닌 시적 감수성을 차분히 풀어나갔다.
“25년 전 페스티벌에서 운영하는 마스터클래스에 학생으로 왔습니다. 당시에는 그 10년 후에 반더러 트리오의 멤버가 되어 연주를 위해 페스티벌에 다시 오고, 동시에 교수로서 마스터클래스에 오게 될 거라고 예상치 못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장 마르크 필리프 바르자베디앙은 페스티벌이 지니고 있는 교육적인 가치에 방점을 찍었다. “야외 공연이라 연주자에게는 어려운 점이 많고 별이 보이는 하늘 아래, 내밀한 분위기의 실내악을 듣는 건 마법과도 같은 기억이 됩니다. 지난 5월 내한 공연에서, 실내악에 적합한 홀에서 젊고 에너지 넘치는 관객들을 만났는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지금과는 참 다른 상황이지요. 트리오 연주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조화를 이루는 것이죠. 각종 유명 페스티벌에서 유명한 솔리스트들이 잠깐 이벤트성 실내악을 연주하는 것과는 달리, 좀더 오랜 시간 갈고 닦은 정교한 하모니가 우리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연은 만석이었다. 미처 공연장에 오지 못한 주민들은 창문을 활짝 열고 몸을 잔뜩 내밀어 반더러 트리오의 슈베르트에 귀를 기울였다.


▲ 아우프강의 무대. 이곳은 곧 클럽이 됩니다

7월 26일 아우프강
론에 도착하자 한눈에 들어온,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마련된 무대의 풍경은 다소 낯설었다. 의자 없이 놓인 피아노 두 대와 여러 대의 마이크, 드럼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사운드 엔지니어와 함께 꼼꼼하게 원하는 소리를 만들던 피아니스트 프란체스코 트리스타노는 틈틈이 하이네켄 맥주를 마셨다. 날렵한 몸에 셔츠를 입고 선 채, 피아노와 각종 전자 장비들을 다루는 그는 일렉트로닉 음악이 얼마나 사람을 즉각적으로 매료시키는지를 설파했다. 스탠딩 콘서트가 아니라 모두들 그냥 앉아서 들을 것 같다며 아쉬워했으나, 공연 중반 이후부터 대부분의 청중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고 막바지에는 객석 전체가 넘실거렸다.
드럼을 맡은 에메리크 베스트리히는 현란한 두 대의 피아노 사이를 파고들며 심장을 파고드는 드럼 소리로 뜨거운 그루브를 자아낸 진짜 주인공이었다. “피아노 역시 각종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 어떤 면에서는 전자 장비와 다를 바 없는 큰 상자”라 생각한다는 트리스타노는 스스로 신명에 취해 라이브 일렉트로닉의 정수를 선보였다. 해석의 여지가 많고 좀더 자유롭기 때문에 일찍이 현대음악과 바로크에 매혹되었다는 그가, 뉴욕에서 일렉트로닉을 접한 이후 그간 얼마나 진지하게 일렉트로닉 음악을 익혀왔는지, 객석의 열광적인 반응은 즉각적으로 그 답을 말하고 있었다. “라 로크 당테롱에서 연주하는 것이 벌써 세 번째다. 우리는 피아노가 지닌 다양한 가능성 중 하나를 찾아냈을 뿐, 클래식 음악만이 피아노의 유일한 장르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피아노와 일렉트로닉의 만남을 통해 피아노의 외연을 넓히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여름밤은 깊어갔고, 10대부터 50대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한 청중은 그들의 신보에 실린 음악에 흠뻑 취해 온몸을 흔들었다.


▲ 낯빛부터 섬세한 알렉상드르 타로

7월 28일 피에르 로랑 에마르
피에르 로랑 에마르는 아침 8시부터 조율사 드니스 드 빈터와 함께 신중하게 피아노를 골랐다. 드니스는 이미 피아노 다섯 대를 무대 위에 준비해둔 상태였다.“피에르 로랑 에마르는 그와 같이 완벽한 피아노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기온과 습도에서, 피아노 상태를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두 시간 동안 꼼꼼하게 다섯 대의 피아노를 두고 고심하던 에마르는 이윽고 한 대의 피아노 앞에 섰다. 그는 혼자 모차르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속, 영롱하게 울려 펴지는 모차르트는 순수의 결정체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와의 연습 도중(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5ㆍ17번) 에마르는 직접 피아노의 고정장치를 풀어 위치를 바꾸기도 했다. 한 뼘만 움직이더라도 오케스트라와의 소리가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하 에마르와의 일문일답.
페스티벌의 야외 콘서트에서 당신의 연주를 듣는 것은 처음이다. 콘서트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매미 소리가 시끄럽고, 날은 덥고, 습도가 높아 피아노가 울리지 않고, 사람들은 아무 때나 지나가고, 어디선가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며 각종 소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 이런 야외 공연이다. 집중력이 흩어지기 쉽다. 그래도 밤이 되면 매미들도 잦아들고 기온이 내려가면서 음향도 나아진다. 라 로크 당테롱까지 찾아온 청중의 집중과 에너지가 남다르다. 현재 예술감독으로 있는 올드버러 페스티벌은 야외무대가 아니라 음향이 좋은 콘서트홀이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환경에서 진행된다. 여름밤의 밤하늘과 서늘해진 공기, 특유의 분위기는 야외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 당신은 무적의 피아니스트로 보인다. 마치 완벽을 표상하는 존재가 된 듯.
남들은 나에게서 흔히 완벽과 무결점을 떠올리는데 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우선 나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자, 그저 음악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음악가’일 뿐이다. 완벽하면 좋지만, 그것이 목적이었던 적은 없다. 완벽주의자라고 하기에 나는 음악과 인생을 두고 숱한 위험을 감수해왔다. 내가 음악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작품 속 ‘음악을 살아있도록 하는 심장’에 다다라 그것을 손에 쥐기 위함이다. 곡마다 지닌 음악의 심장에 다다랐을 때 느끼는 희열을 위해 지금껏 나는 다양한 레퍼토리들을 가리지 않고 탐험해왔다.
음반을 들으면 당신은 차갑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피아니스트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실연에서 뜨거운 체온이 느껴지는 매우 인간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지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내가 안경을 쓴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일까?(웃음) 리게티 에튀드 음반의 경우, 작곡가 스스로 차가운 현대문명을 대변할 이미지를 원했다. 리게티가 직접 내 녹음을 이끌었고 나는 작곡가가 원하는 바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최근 작 드뷔시의 프렐류드집은 내면화된 수줍음, 숨김의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드뷔시는 내면에 커다란 불덩이를 지니고 있었고, 그걸 숨기기 위해 세상과 거리를 둔 채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오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내 연주를 듣고 비밀을 감춘 듯한 거리 두기를 느꼈다면 애초의 내 의도가 성공한 셈이다. 카네기 홀 실황만 보더라도 내 연주는 각양각색이다. 나는 상당히 충동적인 인간이고, 무대에서는 그 충동에 따라 흘러가듯 연주한다. 음악을 직관으로 느끼지만 동시에 이성으로 사유한다. 만약 내 연주에 특별함을 느낀다면 직관과 이성이라는 두 요소가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원래 지휘자 없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만으로 연주되는 곡이다. 그만큼 오케스트라와의 조화가 얼마나 이뤄지는지가 중요하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피아노가 돋보이는 것 ? 이 협주곡뿐만 아니라 내 커리어 전체를 두고 ? 피아노의 악기적 성취(instrumental achievement)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음악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다. 방법은 다양하다. 내가 언제나 숱한 레퍼토리를 시도하고 페스티벌과 가르치는 일까지 다양한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 인성과 피아노 편성의 티에리 페쿠 ‘얼굴, 심장’ 세계 초연

7월 28일 알렉상드르 타로
청중은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의 연주를 듣기 위해 생 마르탱 드 크로에 모여들었다. 타로가 직접 편곡한 말러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 베토벤 ‘열정 소나타’, 1965년생 젊은 프랑스 작곡가 티에리 페쿠(Thierry Pecou)의 ‘얼굴, 심장’이 연주되었다.
무용수처럼 우아한 몸짓으로 피아노 앞에 앉은 타로는 섬세한 터치로 말러의 아다지에토가 가진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말러의 관현악이 지닌 풍성함을 한 대의 피아노가 대신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엿보였다. 그러나 스스로의 편곡으로 아다지에토에 담긴 서정성을 매끈한 질감의 그릇에 담아낸 그의 시도는 오케스트라 없이도 많은 이들에게 이 유명한 곡이 가져오는 감동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이어진 베토벤 ‘열정 소나타’에서 특유의 투명한 음색과 반짝임, 과격하지만 결코 우아함을 잃지 않는 포르테와 빈틈없는 테크닉으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페쿠의 신작 ‘얼굴, 심장’ 세계 초연은 인성과 피아노의 만남이라는 시도는 참신했으나 다소 열악한 야외무대에서 온전히 곡이 지닌 매력을 평가받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축제의 창설자이자 기획을 맡은 총감독 르네 마르탱은 “젊은 작곡가에게 신작을 위촉함으로써 앞으로 피아노곡의 레퍼토리가 더 풍성해지고, 관객들에게 신선한 새로움을 줄 수 있다”라며 연주와 함께 꾸준한 창작 활동 역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또한 “다양한 연령대와 국적의 피아니스트들을 초대하고 재즈와 일렉트로닉과 타 장르와의 협동작업에도 열려 있음으로써 최대한 청중에게 가까이 다가가 늘 새롭고 특별한 공연을 선사하고자 한다”며 페스티벌 프로그래밍의 취지를 설명했다.
때마침 찾아온 무더위로 남부의 햇살은 한낮에 35도를 넘나들 만큼 강렬했다. 해가 지고 더위가 가신 후, 여름밤의 미풍에 몸을 맡긴 채 새까만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듣는 음악은 도시의 일상을 떠나온 모든 이들에게 한여름 밤의 꿈과도 같이 남지 않았을지.

글 김나희(파리 통신원) 사진 Festival de la Roque d’Anthe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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