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닐 트리포노프의 쇼팽 프렐류드 ‘빗방울’이 울려 퍼질 때, 잔뜩 흐렸던 베르비에 하늘 어디에선가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베르비에 페스티벌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다. 1994년 창단된 이래, 베르비에 페스티벌은 전 세계에 모인 젊은 연주자들을 위한 마스터클래스·오케스트라 체험뿐 아니라 세계적인 거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양한 형태의 연주를 선보이는 독보적인 페스티벌로 자리를 굳혔다. 7월 19일부터 8월 4일까지 열린 페스티벌에서 20주년 기념 연주를 중심으로 7월 26일부터 28일까지의 페스티벌 현장을 살펴보았다.
20주년을 맞이한 페스티벌의 기운은 공연장에 도착하기도 전, 마을의 길목마다 새겨진 20주년 로고만 봐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7월 20일 마이스키 트리오, 23일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리사이틀이 있었다. 이어 25일,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알렉산드르스 안토넨코와 안나 네트렙코가 각각 오셀로와 데스몬다로 분해 ‘오셀로’ 1막을 선보였고, 브린 터펠과 에바 마리아 베스트브룩은 각각 보탄과 지글린데로 분하며 ‘발퀴레’ 2막을 공연했다. 28일에는 서른두 명의 거장들이 함께 모여 20주년 기념 갈라 공연을 펼쳤다. 8월 2일 메나헴 프레슬러의 피아노로 막심 벤게로프 리사이틀이 있었고, 8월 4일 켄트 나가노/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미하일 플레트뇨프의 협연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정곡을 찌르는 거장의 한마디
올해 페스티벌 프로그램은 다소 유감스러웠다. 양질의 홀을 지니지 못한 곳에서 막강한 스타 시스템에 기댄 편성에서 오는 식상함일까? 금융기업인 유비에스(UBS) 철수 후 페스티벌의 미래가 불분명했던 때도 있었지만, 베르비에는 점점 더 재정적으로나 규모로 비대해지고만 있다. 언제, 어디까지 커질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시스템이 젊은 연주자들에게 긍정적인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다면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그 예로 토마스 크바스토프와 알프레트 브렌델이 펼친 마스터클래스는 베르비에 페스티벌이 가져야 할 진정한 의미를 더해주었다.
7월 27일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성악 마스터클래스가 열렸다. 유창한 영어로 레슨과 개그를 섞어가며 청중을 압도하는 그의 마스터클래스는 베르비에 페스티벌에서 꼭 한 번 봐야 할 명 프로그램이다. 그는 마스터클래스에서 아리아를 부르던 어느 소프라노에게 발음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스코틀랜드 영어를 쓰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때 크바스토프는 즉시 그가 직접 겪은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나는 항상 내 영어가 아주 우수하다고 자부해왔어요. 어느 날은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악센트를 흉내 내며 이해가 안 되는 말을 중얼거렸다) 정작 도착한 곳은 완전히 다른 장소였어요”라고 말하며,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닌 본질임을 강조했다.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청중이 배꼽을 잡고 폭소를 터뜨렸음은 물론이다.
7월 28일에 있었던 알프레트 브렌델의 실내악 마스터클래스 역시 또 하나의 명품이었다. 30도를 넘나드는 뜨거운 기온에도 불구하고, 브렌델은 체크 무늬 정장을 입고 있었다. 나이든 노신사의 조심스러움일까?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중 한 악장을 듣던 그는 이런저런 조언 대신 “제 경험에 의하면 베토벤의 음악에는 긴장과 이완의 개념이 중요합니다. 이 점을 잘 적용해 연주해보세요”라고 매우 겸손하게 이야기를 던졌다. 정곡을 찌르는 거장의 말이었다.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발레리 게르기예프·샤를 뒤투아 그리고 10년 만의 공백을 깨고 다시 베르비에를 찾은 켄트 나가노와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올해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 참여한 바이올리니스트 반선경은 “베르비에 페스티벌은 합격한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참가하는 경비 일체를 모두 부담합니다. 이후에도 연락 체계가 잘 구축되어 있어서, 서로 원활하게 교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이 마련되죠. 한 달 정도의 짧은 기간이지만 다양한 스타일을 가진 여러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정말 환상적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김남윤을 사사한 그녀는 현재 예일대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양과 질, 페스티벌의 딜레마
7월 26일 콩방홀에서는 예브게니 키신의 리사이틀이 있었다. 그가 연주한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62번은 고전주의 특유의 형식미보다는 아름답고도 유연한 프레이징과 화성 간 뉘앙스 처리에 더 민감한 해석이었다. 베토벤 소나타 32번 1악장은 엄청나게 에네르지코한 주제로 시작한다. 이어서 제2주제는 바람 앞에서 일렁이는 촛불처럼 형태를 변형하며 다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재현된다. 이 작품은 거시적인 시각에서 무질서에 가까운 음들의 표류를 질서 있는 거대한 하나의 흐름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점에서 난곡이다. 유감스럽게도 키신의 디테일한 테마나 뉘앙스에 치중한 연주 경향은 이런 승화감을 전달하기 어려웠다. 모든 것은 조각난 파편처럼 끊어졌고 소화가 안 되는 음식처럼 무겁고 처지기만 했다. 2악장 아리에타는 키신 특유의 감성으로 거대한 풍경화를 펼쳐냈다. 그러나 키신이 어릴 적 들었던 전원 교향곡 같은 느낌에 불과했을 뿐 베토벤적인 희열은 와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 성공한 것은 아리에타 중 미궁 같은 음들의 난해한 흐름에서 ‘환희의 찬가’ 첫 주제를 구성하는 8음을 명제처럼 부각하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이번 연주에서 다소 베토벤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키신보다 더 유감스러웠던 경우는 요즘 폭발적인 지명도를 얻고 있는 젊은 러시아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였다. 베르비에 페스티벌 신문이 깜짝 놀랄 만한 중요 연주로 선정한 그의 공연은 7월 28일 베르비에 교회에서 있었다. 쇼팽 콩쿠르 3등, 차이콥스키 콩쿠르 1등이라는 경력이 말해주듯 그는 매우 비르투오소적인 스크랴빈의 피아노 소나타 환상곡 2번과 리스트 소나타 B단조, 쇼팽의 프렐류드 스물네 곡을 환상적으로 연주해냈다.
젊고도 아름다우며 열정적인 이 연주자는 그야말로 온몸을 다해 100퍼센트 이상의 스펙터클을 선사했다. 특히 쇼팽의 경우 한 음 한 음이 풍경화를 이뤄낼 만큼 놀라운 시각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연주한 쇼팽 프렐류드 ‘빗방울’은 실제로 흐렸던 베르비에의 하늘에서 빗방울 하나하나가 빠르게 떨어지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켰다.
문제는 모든 연주가 마친 뒤 밖을 나설 때였다. 공연 중 느꼈던 압도감이 모두 사라진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과했고, 또 찰나였다. 스크랴빈과 리스트, 심지어 쇼팽마저 거의 같은 감성과 강도로 연주한 트리포노프의 연주가 피상적으로 느껴진 것은 어떤 이유일까. 스펙터클한 레퍼토리 대신 오히려 베토벤 같은 소수의 레퍼토리에 평생을 헌신해온 브렌델 같은 현자형 피아니스트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같은 날 저녁 콩방홀에서 열린 20주년 기념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당일까지도 지구상에서 가장 잘 지켜진 비밀이었을 것이다. TV 앵커이자 르노 카퓌송의 아내인 로랑스 페라리와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사회로 진행된 이번 기념 연주회는 베르비에 페스티벌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첫째는 젊은 음악인들을 위한 아카데미의 중요성, 둘째는 주프로그램이 실내악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셋째는 러시아 출신 음악인들의 놀라운 참여도로 페스티벌이 이루어진다는 점, 마지막으로 클래식 음악에서 재즈 음악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다양성을 선호한다는 점이었다.
기념 연주회 무대의 1부는 베르비에 체임버 오케스트라·에벤 현악 4중주단과 마르틴 프뢰스트·미샤 마이스키 같은 솔리스트들이 함께 실내악으로 꾸몄다. 2부는 쇼팽의 프렐류드 스물네 곡으로 꾸며졌다. 무대 위에는 붉은 미니 원피스 차림의 유자 왕의 솔로를 시작으로 총 서른두 명의 연주자들이 섰다. 드미트리 싯코베츠키가 실내악 편성으로 두 번째 프렐류드를 연주했다. 네 번째 프렐류드는 마르틴 프뢰스트의 클라리넷, 여섯 번째는 미샤 마이스키와 릴리 마이스키의 듀오였다. 이런 식으로 연주가 진행되면서 열세 번째에는 올해 89세인 맨하임 프레슬러가 나섰다. 그는 너무나도 작은 피아니시모로 콩방홀 전체를 울렸다. 이것이야말로 테크닉인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후 마지막 스물네 번째는 키신이 마무리 지었다. 이후 연주자들과 페스티벌 음악감독인 마르틴 엥스트로엠이 무대로 나와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축배를 나눴다.
스위스의 한 유력 일간지 블로그에 실린 의견처럼, 이번 페스티벌은 20주년치고 소박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거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실내악을 통해 나누는 교감만큼은 풍성했다. 모든 페스티벌의 딜레마는 양과 질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의 문제일 것이다. 콩방홀을 나서는 청중은 20주년 로고가 그려진 초콜릿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진짜 축제는 관객 한 명 한 명의 상상에 달려 있을 것이다.
글 배윤미(파리 통신원) 사진 Nicolas Brod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