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히, 통렬히, 진득이

통함을 위한 타인의 직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3년 11월 1일 12:00 오전

클래식 음악계 밖의 인물들과 음악과 예술을 논했던 연재 ‘리빙 넥스트 도어 뮤직’. 수년간 이 코너를 통해 만났던 대중음악가 혹은 대중매체 관계자들이 들려준 조언을 모았다. 과감히 편견을 깨고, 통렬히 현실을 직시하고, 진득이 내 음악을 지키는 것. 우리는… 할 수 있을까.
*직함은 인터뷰 당시의 것을 표기합니다.

타블로 에픽하이·가수·작곡가_ 여전히 좋은 음악은 팔린다
편견을 깨야 한다. 힙합도 그러한데 클래식은 말할 것도 없다. 과거에는 힙합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무거운 음악이다, 거친 음악이다, 막 나가는 애들의 음악이다 라는 소리를 들었다. 당연히 대중은 ‘이건 날 위한 음악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음악 자체보다 장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부각되는 경우가 있는데 클래식 음악이 그 대표적인 장르, 아니 문화다. 게다가 대중에게는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일이 ‘감상’이 아닌 ‘교육’이 된 지 오래고. 이러한 문제를 내가 갑자기 발견한 건 아니다. 아주 오래된 얘기다. 문제는 대중에게 나름대로 잘 알려진 클래식 음악인들, 즉 대중과 클래식 음악의 고리가 돼야 할 사람들에게 있다. 우리가 언급한, 클래식과 대중 사이의 소위 ‘고리’ 역할을 하는 연주자들은 내가 볼 때 클래식 음악인이 아니다. 장르 자체가 클래식이 아니고, 실력 면에서나 고민하는 자세에서나 아직은 부족함이 많다.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었다. 피아노 들고 나와서 “난 클래식 음악인이다”라고 말하면 우선 높게 평가받는다. 음악을 잘해도 “난 대중 음악인이다”라고 하면 수준 낮게 평가하고. 그 편견이 언제 깨질지 모르겠다. 크게 한번 뒤집어지지 않는 한 어려울 것이다. 튼튼하고 실력 있는 좋은 ‘고리’가 필요하다. 여전히 좋은 음악은 팔린다. 나도 이번 음반이 나온 후에야 깨달았다. 클래식 음악에서 가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는 점도 큰 한계다. 절절한 가사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재즈도 현대 장르지만 지금은 클래식 음악만큼이나 높고 먼 위치에 놓여 있다. 궁극적으로 재즈 역시 가사 없는 음악이니까.

김창완 산울림·가수·작곡가·연기자_ 청중 스스로의 발전
산울림 공연을 찾는 관객들의 연령층은 어떻게 되나? 20대부터 50대까지. 20대 초반이면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음악을 듣는 셈인데. 산울림 음악의 특징은 트렌디하지 않다는 것이다. 시대의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도 어떤 특정한 경향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기존에 없는 가사와 멜로디로 늘 새로운 시도를 해왔기에 생명력이 있는 게 아닐까. 거기에, 청자 스스로가 발전한 것도 큰 힘이 됐다. 우리가 데뷔했을 때, 가요는 성인의 음악이었다. 대학생은 클래식, 중고생은 팝… 이렇게 나이별로 장르를 구분해 들었다. 근데 산울림이 등장하면서 가요의 중심축을 성인에서 젊은이로 바꿔놓았다. 산울림으로 몇십 년 활동하다 보니, 나이를 극복하는 세대가 등장했다. 요즘 사람들은 음악을 음악으로 듣지, 나이 구분해서 듣지 않는다. 문화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 정도로 성숙하다. ‘이건 아빠 세대의 노래야, 엄마 때 노래야’ 하지 않고 산울림 노래 중에도 좋은 게 있으면 자기 음악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세대가 생겨났다는 게 큰 행운이다. 산울림은 사랑받을 수 있는 음악적 자양분이 있었고, 청자들도 많이 발전했다.

김태은 엠넷 PD_ 높으신 분들이 뭐라 그럴까
클래식 음악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만들라 하면 어떤 걸 만들겠나? 우리가 느끼는 클래식 음악은 고급스럽고, 우아하고,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그런 음악이다. 귀족 음악, 오래된 음악, 특정 계층을 위한 음악. 그걸 희화화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겉으로는 멀쩡한 음악가가 마누라 앞에서 찍소리 못했다거나, 잘 씻지 않았다거나… 그런 걸 웃기게 구성하고 싶다. 그럼 높으신 분들이 뭐라 그럴까? 뭐라 하고 말고를 떠나서, 희화화의 대상이 되기에는 국내 클래식 음악계의 산업적 혹은 대중적 기반이 너무 약하다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 클래식 음악을 듣긴 하나? 전혀 안 듣는다.

정석원 015B·작곡가_ 아무리 몸부림쳐도 변하는 시대를 바꿀 수 없다
(중학교 때 피아노로) 버르토크의 작품을 연주하면서 이런 음악을 왜 만드나 했다. 현대음악을 진짜 싫어한다. 물론 버르토크를 아직까지 현대음악이라고 부르진 않겠지만. 스트라빈스키는 좋아한다. 클래식 음악의 기본이 화성과 대위라면 대중음악은 멜로디와 테크놀로지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 모습에 관심이 많아서 대중음악 만드는 게 즐겁다. 시대는 변하고 기술은 발전한다. 시대에 따르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이다. 굉장히 음악을 잘했고,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들도 세월이 지나면 밀려날 수밖에 없다. ‘형님’으로 남을 수는 있어도 대중적인 인기는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 과정에서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요즘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면서 현실을 부정한다. 과거에 미디는 음악도 아니라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나이 들면 절대로 저렇게 되지는 말자,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미디음악, 미디가 아닌 음악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음악 만드는 데 미디는 기본이고, 컴퓨터로 작업한 음악들이 90퍼센트를 넘는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변하는 시대를 바꿀 순 없다. 그래서 의도적으로라도 요즘의 음악 세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신중현 가수·작곡가_ 음악은 본래 코드가 필요 없다
이교숙 선생님께 배운 게 음악의 근본이었다. 그 덕에 내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모든 걸 썼기 때문에, 시대에 뒤처진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신중현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코드의 변화가 극히 적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것도 시대를 초월하는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음악은 본래 코드가 필요 없다. 코드를 넣는 건 대중을 현혹하기 위해서다. 대중을 놀라게 하기 위해서 반짝쇼를 하는 것이다. 멜로디와 비트만으로 음악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씀인지. 결국 마지막에는 화성이 없어진다. 음악이 입체가 된다. 화성은 평면으로 보이도록 쌓아 올리는 건데, 음악은 속으로 파고들어야 할 입체이다. 한 음의 깊이를 추구하는 것이다. 화성도 필요하지만, 음 하나하나 깊게 파고들어가는 게 필요하다. 속으로 들어가는 깊이의 하모니라고 해야 할까. 결국 멜로디 안에 다 하모니가 있는 셈이다. 요즘 젊은 세대의 국악 수용 방식은 어떻게 보시는지. 마찬가지. 국악을 하모니로 본다. 국악이야말로 입체인데. 모든 토속음악이란 하모니가 없다. 결국 록음악도 그걸 추구하는 셈이고. 국악이 가지고 있는 순수성이 상실되는 걸 느낀다. 진정한 순수성을 보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게 우리를 과시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조영남 가수_ 음악은 아무 데서나 통해야 한다
클래식 음악이 외면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왜 ‘외면’이란 단어를 쓰나. 콤플렉스로 느껴진다. 누가 클래식 음악을 외면하고, 누가 (순수)미술을 외면하나. 공부해야 하고 어려우니까 관심을 갖지 않을 뿐이다. 낚시 안 하는 사람은 낚시하는 사람 보고 미친놈이라고 한다. 종일 지키고 있다가 새벽에 사진 한 장 찍는 사진 애호가도 미친놈이라고 불리기 딱 좋다. 마찬가지다. 모르니까 가만 있는 거지, 누가 외면을 했다고. 노! 자신감을 가져라.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될까? 그렇다. 그리고 실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실력 키우면 사람을 끌 수 있다. 반대로, 인순이가 예술의전당을 끊임없이 노크하는 모습은 어떻게 평가하나? 그것도 콤플렉스의 일환이라고 본다. 내가 거기서 노래한 사람이라 말하기가 애매하다. 근데 난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겠다고 말한 적도 없고, 기획사에서 대관 신청해서 오케이를 받았을 뿐이고, 그래서 잘 했을 뿐이다. 세종문화회관도 있고, 다른 좋은 공연장도 많은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이 방에서 노래 못하면 저 방 가서 하면 되지. 참 답답하다. 그렇게 장소에 따라 음악 하는 사람의 급이 정해진다면,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거리의 음악가들을 무시할 건가? 클래식 음악가들도 포스코 로비에서 공연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지휘자 게오르크 숄티는 좁다란 성당 길목에 청중을 앉혀놓고 공연하기도 했다. 그렇게 음악은 아무 데서나 통해야 한다.

이재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연출_ ‘귀족’의 진짜 의미
중요한 건 음악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소비할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음악과 관계없는 얘기를 할 수는 없다. 우리는 클래식이 왜 귀족을 위한 음악인가라는 테제를 던질 것이다. 여기서의 귀족이란,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통제된 생활을 해야만 비로소 원하는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지휘자 강마에다. 그리고 강마에와 충돌하며 음악을 만들어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귀족과는 거리가 먼 일반인들이다. 그들은 음악에 대한 과거의 끈을 가지고 있다. 그들과 강마에의 충돌 속에서, 클래식 음악이 우리에게 어떤 기쁨을 줄 수 있는지 얘기할 것이다. 물론 대부분이 인생과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문제다.

오세영 KBS TV제작본부 예능국장_ 아직은 그렇게 망가지진 않았다
KBS교향악단을 소재로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어떨까.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는 과정을 그린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든지…. 요즘 대중은 클래식 음악도 실질적으로 보여지고 느껴지길 원한다. 근본을 유지하면서 좀더 개방된 사고를 펼치는 것은 나도 찬성이다. 클래식 음악이 인포테인먼트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될 수는 있겠지만 그 근본이 훼손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그리고… 아직은 (그런 시도를 필요로 할 만큼) 그렇게 망가지진 않았다. KBS 예능제작국에 소위 ‘예능 마인드’로 클래식 음악을 다루고 싶어 하는 PD가 있나? 젊은 PD들 중에 비슷한 것을 준비해보려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문제는 클래식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고학력에 자존심도 굉장히 강해서 다른 장르로의 발전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걸 좀 없애면 방송과 접목해서 재미있게 만들 구석이 정말 많다. ‘변화’라는 것이 학구적으로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으면 한다.

박창학 작사가_ 타인의 지지에 대한 회의
예술이란 결국 시간의 흐름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존재다.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다.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면 지금 같은 시대의 사람들한테 굳이 지지를 받아야 할 필요도 없다. 이미 ‘입증된’ 음악이니까. 문제는 그 음악이 너무 방대하다는 것이다. 체계적인 교육과 자료 수급만 가능하다면, 우리 모두에게 클래식 음악은 다 좋을 것이다.

정재형 가수·작곡가_ 클래식인지 팝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클래식 작곡가로서 가요계를 보면, 가요 작곡가로서 우리 클래식 음악계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10년 가까이 파리에 머물고 있으니 더욱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텐데. 그냥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생각을 닫아버린 사람들 같다. 에콜 노르말에서 영화음악을 공부하다가 다시 클래식 작곡을 배우고 싶어 편입 시험을 치렀다. 내가 한국에서 가수도 했고, 영화음악도 했다는 걸 알면서도 미셸 메를레 선생은 아무런 편견 없이 내 음악을 들어줬다. 마음이 열려 있는 것과 취향이 같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파리에서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이다.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클래식은 여기까지, 가요는 여기까지만 표현해야 한다는 한계가 없다. 컴퓨터가 생겨난 후부터 유럽에서는 그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지 중요치 않다. 비주얼 아티스트와 작곡가가 함께 작업할 때 그 안에서의 역할 분담도 모호하다. 세계 최고의 전자음악연구소라는 이르캄에서도 그 음악이 클래식인지 팝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반면 한국에서는 가요를 했다고 하면 약간 내쳐지는 경향이 있다. 클래식 했다고 가요계에서 내쳐지는 반대의 경우는 드물지만…. 자기 것을 분명히 하는 게 예술가들의 습성이다 보니 배타적일 수밖에 없다. 이해한다. 다만 다른 음악에 대해 열려 있지 않은 태도가 아쉬울 뿐이다. 나도 그런 현실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왜 클래식 음악은 대중화되기 힘들까? 가사 없는 연주음악의 아름다움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는다’는 건 무엇일까. 그 근원적인 답을 어느 순간 잃게 됐다. 지금까지의 클래식 음악은 큰 무대에서 기교로써 어필하는 것, 그게 다였다. 늘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같은 큰 공연장에 오르는 연주만 들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첼리스트라면 특정 반열에 오른 몇몇만 있는 줄 안다. 그렇게 연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그 정도’라는 게 얼마나 훌륭한 연주인지 모르는 것 같다. 한정적인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음악을 들려줘야 한다. 틀이 좀 젊어졌으면 좋겠다.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공짜 귀국 독주회 말고, 만 원이라도 내고 듣는 홍대 클럽 독주회는 어떨까. 주변의 시선이 무섭고, 차이가 무섭겠지만 시도해볼 가치가 충분하다.

윤종신 가수·작곡가_ 경박·천박, 아니 친화라 불릴 수 있는 작업
지금까지 했던 예능 프로그램들을 보면 어떻게든 음악과 통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 그건… 허울이다. 나는 철저한 음악ㆍ예능 분리주의자다. 예능 프로그램 가면 작가들에게 내 음악 얘기는 꺼내지 말라고 부탁한다. 예능에서는 예능인, 음악 할 땐 음악인. 그렇게 되기까지 시간이 꽤나 필요했다. 음악을 알리기 위해 예능을 시작한 것은 절대 아니다. 요즘 내가 자주 주창하는 게 ‘이미지의 허울’이다. 자신의 원래 성격과 밖에서 보는 이미지가 같은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1990년대의 ‘발라드 가수’였고, 동시에 농담 즐기고 남 웃기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민도는 ‘웃긴 발라드 가수’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엄숙주의’를 경계한다. 대중음악의 엄숙주의라…. 대중음악도 예술이기에 변화와 실험은 태생적으로 필요하다. 앞서의 말대로라면, 대중음악에서의 실험은 그 어떤 장르에서보다도 자연발생적이어야 하겠다. 하나의 유행이 오래되다 보면 그 유행을 지겨워하는 세력이 점점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혁명이 일어난다. 나 같은 사람이 혁명세력은 아니다. 언제나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킨다. 나는 다만 혁명적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 대중음악 사조에 넣을 만한 작가의 기준은 어디에 둬야 할까? 나도 모른다. 대중음악 작가에 대한 분석, 사조의 정리는 음악가가 아닌 ‘누군가’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플레이어’이고 플레이어가 그런 짓 하고 다니는 것은 정말 싫다. 플레이어가 동료를 분류하거나 급을 나누는 것 자체가 콤플렉스의 발현이 아닐지. 누군가가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대중음악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대중’을 만족시키고 있음은 분명하다. 클래식 음악계엔 콩쿠르라는 전통적인 인재 등용의 장이 존재해왔다. 그런데 최근 유행하는 TV 오디션 프로그램들을 긴 호흡으로 보면, 인재의 발굴보다는 프로그램을 통한 이익 창출이 궁극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다 보니 ‘대국민 오디션’의 우승자는 스타가 될 수도 있고,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예능 프로그램에 사회적 책임을 묻고픈 마음은 없지만, 클래식 음악이 TV 오디션 프로그램의 소재로 사용될 움직임이 보이기에 이 둘이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은 해봐야겠다. 음악밖에 몰랐던 사람들이 ‘터프한’ 방송계와 만난다면…. 삶을 대하는 방식의 문제다. 어떤 일을 할 때 잃는 것부터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클래식 음악계가 그 대중화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면 이는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기자는 전자 바이올린 싫어하지 않나? 좋아하진 않는다. 그럼 뭐가 반가울까? 방송계는 대중과 친해지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작업’을 해왔다. ‘경박, 천박’이라 불릴 수 있고, ‘친화’라 불릴 수도 있는 작업이었다. 대중음악의 엄숙주의를 경계하는 나로서도 클래식 음악을 가지고 막 노는 것은 싫다. 막 놀아도 되는 건 우리 바닥이다. 결국 클래식 음악이든 가요든 눈속임으로 대중을 기만하지 않을, 최상의 것을 내놓아야 한다.

정동인 유희열 소속 안테나뮤직 대표_ 귀천의 구분이 없다
스스로 “동아리 같은 회사”라고 했는데, 대표로서 덩치를 크게 키우는 게 목표가 돼야 하지 않겠나? 개인적인 바람은 SMㆍYG처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생겨먹은 게 그렇게는 못 된다. 아티스트들은, 제작자들이 “이 부분은 이렇게 고쳐와라”라고 하는 것을 가장 힘들어한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고치면 많이 팔릴 수 있을 것 같아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데 특히 우리 아티스트들은 그런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작가’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리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쓰고 싶다 해도, ‘가요’라는 상업음악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대중과의 소통은 필수다. 클래식 음악에서도 그러하지 않은가. 요즘 쓰이는 곡들이 각광받지 못하고, 과거의 작품들이 퍼포먼스로서 주류시장을 형성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본다. “클래식 음악도 잘 팔리고 싶으면 희화화를 택하라”라는 조언을 들은 적이 있다. 본인들은 나 즐겁자고 한 일인데 결국 희화화로 성공한 입장에서, 클래식 음악에도 희화화가 답이 될 수 있다고 보나? 클래식 음악계가 과거와 같은 영화를 다시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이 역시 시대의 문제다. 그러나 시장이 줄어들 만큼 줄어들었다면, 더 줄어들지는 않을 거라 본다. 요즘 주류 소비자, 즉 어린 소비자들의 좋은 점이라면, 그들에겐 귀한 것과 천한 것의 구분이 없다. 과거에는 대학 나온 사람은 귀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학생이 귀해 보여 대학생 패션을 따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오히려 대학생이, 아이돌은 옷을 어떻게 입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귀천을 따지지 않는 젊은 사람들은 음악도 편견 없이 듣는다. 그건 참 좋아졌다. 그들이 들을 수 있도록, 희화화든 무엇이든 ‘벽’을 허무는 일은 필요하다.

글 박용완 기자(spirate@) 사진 강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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