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의 기품과 자비로움이 넘쳐흐른다. 흔히 베토벤의 음악은 외향적이고 웅장하며 압도적이라는 통념이 강하지만, 트리오 오원은 깊은 성찰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베토벤 음악의 또 다른 측면을 발견하게 한다. 최근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전곡 연주회를 선보인 트리오 오원은 그 가운데서도 특히 고상한 기품을 담고 있는 피아노 트리오 Op.70-2와 Op.72 ‘대공’을 골라 음반으로 내놓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대공’과 더불어 ‘유령’이란 부제로 유명한 Op.70-1을 대표 작품으로 내놓을 법하지만, 이들이 선택한 곡은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Op.70-2다. 연주를 들어보면 선곡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음반을 듣는 동안 베토벤의 음악이 얼마나 부드럽고 겸손한지 느끼게 되며, 아마도 트리오 오원이 의도한 바가 이런 점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대공’은 베토벤의 음악 양식이 변화를 보인 시점에 탄생한 작품이다. 베토벤이 이 곡을 작곡한 시기는 1810년에서 1811년 사이로, 이 시기부터 베토벤은 젊은 날의 투쟁과 열정을 부드럽고 명상적인 음악으로 승화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베토벤의 후원자 루돌프 대공에게 헌정된 이 작품은 베토벤의 작품 가운데서도 매우 독특한 점이 많다. 1악장은 자비롭고 고상한 느낌의 주제로 시작하지만 중간중간 의외의 반전이 숨어있다. 특히 1악장 중간 전개부에서 현악기들이 손가락으로 현을 퉁기는 피치카토 주법으로 다소 기괴한 음향을 만들어내는 부분이나, 2악장 스케르초의 명랑한 주제에 이어 중간 부분에 갑자기 심각한 분위기의 반음계적인 선율이 흐르며 분위기를 급격히 바꾸는 부분은 매우 독특하다. 이런 악보를 마주 대하는 연주자에겐 두 가지 선택이 가능할 것이다. 각 섹션의 성격을 뚜렷하고 과장된 어조로 전하며 급격한 반전을 시도하거나, 혹은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연결해내는 것이다. 트리오 오원은 매우 능숙하게 후자의 방법을 선택해 하나의 음악 속에 기쁨과 슬픔,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코 음색이나 리듬이 튀지 않도록 각 섹션을 부드럽게 이어내는 연주 덕분에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결코 끝나지 않는 밤과 낮의 순환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3악장에서 4악장으로 이어지는 부분에서 트리오 오원은 급격한 반전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명상적인 3악장에서 하나하나의 변주가 진행되는 동안 끝없이 이어지는 우리 삶의 무한함이 떠오르지만 4악장 도입부에서 그 심오한 성찰은 곧바로 삶의 즐거움으로 표현된다. 아마도 ‘대공’ 피아노 트리오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 할 만한 4악장 도입부에서 피아니스트 에마뉘엘 스트로세의 유려하고 생기 넘치는 연주는 단연 돋보인다.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 Op.70의 2번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는 더욱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베토벤의 트리오곡 가운데 석 대의 악기들이 거의 동등한 비중을 지니고 있는 이 곡에서 트리오 오원은 결코 한 악기가 튀지 않고 적절한 밸런스를 유지한다. 이 작품은 느린 서주로 시작하는 대신 안단테나 아다지오로 된 느린 악장이 없는 곡이지만, 명상적인 연주로 인해 이 곡의 중간 2·3악장의 알레그레토가 마치 안단테처럼 느껴져서 독특하다.
글 최은규(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