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말, 바이칼 호수에 손을 넣었다.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얼어붙을 것 같은 두려움에 얼른 손을 빼냈다. 절기로는 여름의 초입이었지만 호수 변에는 이제 막 봄꽃을 피우고 있었다.
최석과 남정임. 바이칼 호로 가는 긴 노정 내내 머릿속에는 두 사람이 번갈아 말을 걸어왔다. 중년의 존경받는 교육자인 최석은 독립운동을 같이 한 친구 남상호가 죽자 북경에서 그의 딸 정임을데려다가 거두었다. 최석은 자신의 부인과 친딸 순임에게 출중한미모와 뛰어난 재능으로 질투와 시기를 받는 정임을 정신적으로사랑하게 되고, 오해가 더해져 결국 중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바이칼 호에 가서 죽는다. 정임은 인자한 사랑으로 자신을 감싸는 양아버지 최석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녀는 병중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칼 호로 최석을 뒤따라가고 최석이 머물렀던 여관에서 죽음을기다린다.
이광수의 소설, ‘유정(有情)’의 두 인물 이야기다. 친구의 딸이고 양딸이며 제자이기도 한 사이의 연정 못지않게 시베리아와 바이칼 호수에 대한 묘사는 당시 중학생인 나에게 충격이었다. 당시 수십 권짜리 한국문학전집 한 질을 선물받은 후, 장·단편을 가리지 않고 탐욕스럽게 읽어나가던 것이 ‘유정’의 최석과 정임이 도피해 들어간 바이칼 호수의 정경(情景)에서 멈췄다. 그리고 고장 난 레코드판마냥 제자리를 맴돌았다. 그때 나에겐 카세트플레이어와세계클래식명곡선집이라는 한 질의 테이프가 있었는데, ‘유정’을읽는 내내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만을 반복해 들었다.
지금까지 나에겐 적지 않은 실패와 좌절이 있었다. 깊은 절망으로인해 사람이 건네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나는 단 한 곡을 되풀이하며 들었다. 그 또한 ‘비창’이었다. 이 곡이 고금의 교향곡을 통틀어 걸작에 속하는지도, 차이콥스키 자신의 지휘로 이 곡을 초연한 후 9일 만에 급사했다는 것도 당시에는알지 못했다. 단지 ‘유정’을 읽으면서 느낀 최석과 정임의 안타까움,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바이칼 호수의 풍경과 뒤섞인 ‘비창’의 우울과 비애의 서정이 절망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을 뿐이다.
몇 번을 망설이다 겨우 약주(弱奏)로 들어가는 그 우유부단함이 오히려 나에겐 위무였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함께 울어주는 것이라는 것을, 절망에 또다시 절망을 섞으면 좌절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이 된다는 것을 이 곡이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음악을 통해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는 전 세계여행자들의 각기 다른 사연 속에서 또 다른 최석과 정임을 만나는 중이다.
‘동그라미를 꺼내다’에서는 ‘내 생애 잊지 못할 음반’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이번 호에는 헤이리 작가회 회장으로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서 창작 스튜디오이자 게스트하우스인 모티프원(www.motif.kr)을 운영하고 있는 이안수 씨의 동그라미를 나눴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