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음악가가 있다. 삐삐롱스타킹·원더버드·모조소년의 보컬로, 혹은 고구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권병준. 그리고 리코더 연주자로 콩코르디무지치와 함께 음반을 내는 한편으로는 종종 작은 클럽에서 공연을 가지는 권민석. 전자음악을 배우러 간 권병준과 고음악을 배우러 간 권민석은 네덜란드의 헤이그왕립음악원에서 처음 만났다.
이것은 전자음악에 대한 이야기다. 정확히는 클래식 음악가와 전자음악가(사운드 디자이너)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1874년, 뮤지컬 텔레그래프라는 최초의 전자 악기가 생김과 동시에 전자 사운드를 두고 클래식 음악계와 대중음악계는 핑퐁처럼 영향력을 주고 받았다. 1920년대 소음과 전자 기술의 조합을 시도한 ‘전자시’를 발표하며 에드가 바레즈가 전자 악기의 개발을 주장하고 케이지·슈토크하우젠 등이 전자적 사운드로 작품을 써내면서, 그리고 1960년대 테이프 루핑과 시퀀싱을 이용한 미니멀리즘 음악이 흥행하면서 클래식 음악은 아방가르드의 선봉에 섰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전자음악을 대중화시켰다. 1965년경 신시사이저가 시중에 상품으로 등장하면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에서는 신시사이저라는 악기를 밴드의 기본 편성으로 정착시켰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팝 음악계에서는 전자 기타 소리의 비중이 점차 즐어들면서 전자음의 홍수가 밀려왔다. 1980년대 시카고와 디트로이트의 지하 클럽에서 은밀하게 소비되던, 시퀀싱을 통해 프레이즈를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하는 이른바 테크노 음악이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대중음악계에서는 일렉트로닉 음악, 또는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결합된 팝 음악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
새로운 소리에 대한 호기심. 전자음악의 가능성은 음악계의 모든 진영을 흥분시켰다. 누군가는 극단적인 실험을 감행하고, 누군가는 인간 감각의 쾌에 들어맞는 소리와 리듬을 만들어내면서 전자 소리는 인간의 몸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이제는 모든 소리를 녹음하여 기계적으로 변형·합성시키는 구체음악과 같은 실험들이 더 이상 실험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 작곡가들은 에드가 바레즈가 “소리의 해방”이라 부른 것을 성취했다. 이것은 곧 “어떤 소리로도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권리”였다. 그 권리의 성취는 이제 일상으로 내려왔다. 우리는 기계음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는 현상이 더 이상 신기하지 않다. 전자음악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던 1990년대 초반, 본지에서는 전자음악을 두고 “종종 슬라이드나 필름, 조명 쇼, 제스처, 연극적 행위 등과 같은 시각적 대응물들과 함께 제시된다”고 소개했는데, 이제는 전자음악이 배경음악인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가 되었다.
둘이 걸어온 각자의 길
권병준과 권민석
서울 휘문고등학교의 15년 차이 동문인 두 사람이 네덜란드라는 낯선 땅에서 만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먼저 권병준의 이야기. 권병준은 1997년 삐삐롱스타킹으로 반항아적인 모습을 공중파에 보여주던 짧은 밴드 활동을 뒤로 하고 ‘옛날사람’이라는 히트곡을 낸 원더버드, 그리고 2004년 달파란과 함께 한 일렉트로닉 사운드 베이스의 모조소년 활동까지 여러 밴드를 만들고 해체했다. 그 기간 동안 영화에도 종종 출연하곤 했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그가 전자 사운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전자음악이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에 이끌려서였다. 자신이 악기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악기를 만들어 사용하고 싶었다. 그 점에서 전자 사운드를 다루는 것은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자본에서도 좀더 떨어져 있기 쉬운 장점이 있었다. “음악을 찾아 듣는 성격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권병준은 특정한 아티스트의 영향을 받아 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아니라 한다. 대신 모조소년을 함께 했던 강기영(달파란)과 함께 홍대 앞 작은 클럽들의 여러 공연을 보러 다녔다.
“전자음악의 종류가 굉장히 많죠. 댄스 음악도 있고, 디제이들이 연주하는 음악도 있고. 어쿠스틱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주파수 대역은 한정되어 있거든요. 사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더 많은 주파수 대역이 사실상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 비어 있는 지점들을 찾아서 극단적으로 실험하고 공연들을 하는 거죠. 사실 클럽 가서 음악을 듣는 것도 일종의 극단적인 체험이에요. 저음들을 몸으로 들어보고, 여태껏 없었던 소리들을 경험하는 체험인 것입니다.” 모조소년은 인디 음악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 ‘핫’한 음악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권병준은 버튼의 1집 싱글을 마지막으로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듬해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왕립음악원의 예술과학(ArtScience) 과정으로 유학을 떠나 전자음악과 미디어아트를 공부했다.
그리고 권민석의 이야기. 권민석 또한 네덜란드에 갔다. 프란스 브뤼헌의 앨범을 듣고 리코더 연주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과 이론 전공으로 진학했다. 대학 동기와 리코더·기타·피아노로 구성된 티미르호라는 이름의 트리오를 꾸려 홍대 앞 클럽을 비롯한 여기저기의 장소에서 공연을 했다. 그리고 권민석은 2006년, 리코더를 좀더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헤이그왕립음악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음악을 듣는 권민석의 피 안에는 당연히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고, 그는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톤 코프만·프란스 브뤼헌·귀스타브 레온하르트 등 고음악 대가들의 고향으로 유명한 네덜란드는, 한편에는 스타임이라는 전자 악기 연구 개발 스튜디오가 있는 전자음악의 메카이기도 했다. 고음악·재즈·작곡·지휘와 함께 소리의 기술, 예술과학 등 과학기술과 융합된 음악을 가르치는 헤이그왕립음악원을 각기 다른 공부를 위해 찾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전부터 전자음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전자음악 수업도 들었는데, 실제로 소놀로지과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수학을 많이 공부하더라고요. 악기를 연주하면서 컴퓨터를 계속 공부할 수는 없으니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았죠. 혼자 하는 방법을 찾다가 이펙터를 쓰거나, 드럼 머신을 이용해봤죠. 헤이그왕립음악원의 전자음악 스튜디오가 큰 편이라 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슈토크하우젠의 영향을 받아서 전자음악으로 작곡하는 사람, 일렉트로 어쿠스틱 음악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나봤죠. 그러다 자연스럽게 술자리에서 권병준 씨를 만나게 되어 함께 도움을 많이 얻게 되었어요. 하드 록 음악을 하다가 즉흥 연주를 하게 된 재즈 아티스트인 에번 파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음악을 활용하는 방식이 팝이나 재즈 쪽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리코더와 전자음악의 합작품들
2008년, 권병준은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스타임이라는 전자 악기 제작 스튜디오에 들어간다. 말 그대로 전자 악기를 제작하는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4년간 일했다. 엔지니어로 먹고살기 위해서 인터넷도 뒤지고 책도 사서 보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몸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센서로 소리와 전자 기기를 연결시키는 악기, 음향을 영상화시키는 비디오 프로세서 등 여러 하드웨어들을 제작했다. 스타임에 간 권병준은 자신의 첫 번째 작품으로 권민석을 위해 리코더에 연결하는 전자 악기(Recorder+CrackleBox+Arduino)를 만들었다. 소리를 수음하는 피에조라는 마이크 같은 물질을 리코더의 리드에 부착해 소리를 빼내서 다시 프로세싱하는 장치다. 데이터들을 받아서 전달해주는 센서 인터페이스 같은 것으로, 리코더를 불면 손으로 만지게 되는 정보가 회로로 들어가서 그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보내주고, 이를 컴퓨터로 모아서 받은 소리를 다시 처리하는 원리이다. 이펙터를 사용하면 손으로 직접 제어해야 하는 데 반해, 이 악기에는 자동 센서가 부착되어 있으니 연주 몰입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권민석은 권병준이 제작해준 악기를 가지고 2009년 몬트리올 국제 리코더 콩쿠르에서 1위를 수상했다. 바로크 음악과 함께 현대음악을 동일한 비중으로 결선 무대에 올린 권민석은 록 그룹 라디오헤드의 ‘패러노이드 안드로이드’를 현대적으로 변주한 즉흥곡을 선보였다.
현재
권민석은 네덜란드에서, 권병준은 한국에서 활동 중이다. 따라서 이들의 합동 무대는 게릴라 공연처럼 이뤄진다. 홍대의 살롱 바다비라는 클럽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제목 아래 소규모로 공연을 펼치기도 했고, 최근에는 이천도자기축제에서 설봉호수를 배경으로 연주를 하기도 했다. 둘은 이 공연에서 도자기를 이용한 음향과 울려 퍼지는 물소리, 어쿠스틱 악기가 만들어내는 소리들로 구성된 ’낮은 땅’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올해 10월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1세대 전위예술가 김구림의 전시에서 권병준은 연계 퍼포먼스를 펼쳤다. 김구림의 작업이 설치된 공간을 손전등의 빛으로 가르며 그 그림자를 이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고, 실시간으로 어쿠스틱 악기의 소리를 컴퓨터로 프로세싱하여 들려주는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였다. 한국에 들어와 있던 권민석이 마침 리허설 중인 권병준에게 전화를 걸게 되어 둘은 ‘즉흥적으로’ 즉흥 음악 공연을 펼쳤다.
타인의 소리에 반응하기
순수한
전자음으로 이루어진 권병준의 음악을 들으면 한번에 그 사운드가 귀에 친숙히 담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적응을 하지 못하는 관객도 있다. 권병준은 꽤나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똑같은 산을 보면서도 디테일을 보고, 또 계절에 따른 변화를 보려면 어느 정도 소양이 있어야겠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굳이 찾아가서 들을 음악이 아니에요. 거부감 들고 귀도 아프고. 다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런저런 이유로 권병준이 만들어내는 사운드의 공간에 들어선 사람들은 점차적으로 그 전자 사운드에 몰입하게 된다. 전자음으로만 이뤄진 그의 이야기는 뚝심 있게 자기 목소리를 내고, 그래서 그 사운드의 내러티브가 신기하게도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에게 있어 연주란 각종 콘트롤러를 작동하는 제스처들로 이루어진, 음악과 연관 있는 움직임이 함께하는 하나의 퍼포먼스이다. 이에 따라 권병준은 컴퓨터로 타자를 치듯 고개를 숙이고 전자 기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는 ’악기‘에만 몰두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관객과 소통한다고 설명한다. “연주를 하고 있으면 관객이 몰입하는 정도나 그들의 감정이 느껴집니다. 관객들이 주는 피드백을 즉흥적으로 받아서 다음 이야기들이 나오는 겁니다. 소리의 반응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내는 소리를 받아서 그때그때 자기 안에서 재조합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의 느낌을 받아 해석된 소리를 던지기도 하고, 민석 씨처럼 함께 하는 연주자로부터 받은 반응에 응답하기도 하죠.”
권병준은 반(反)클래식의 입장에 있다고 말한다. 작곡가·지휘자·연주자가 따로 나뉘어진 음악들에 대해서는 별로 흥미를 못 느낀다는 것이다. “동양 음악은 다르죠. 연주자가 작곡가가 되고, 그들의 연주가 음악이 되는 방식이잖아요. 전자음악은 그런 면에서 동양이 갖고 있던 정서와 훨씬 더 가까운 느낌입니다. 대가 밑에서 배우기도 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소리를 만들어가는 방식이었으니까요. 서양 현대음악에는 아무 생각 없는 연주자들이 많잖아요. 악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고. 물론 감정은 싣겠지만요. 민석 씨처럼 음악적인 폭을 넓혀 보고 싶은 연주자들을 만나면 저도 함께 하는 거죠.”
새로운 소리에 대한 천착, 그리고 자신의 소리에 대한 탐구는 기술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는 음악을 주고 받는 사람이 있고, 음악을 듣는 관객도 있다. 권병준과 권민석의 만남은 과거가 그러했듯 앞으로도 즉흥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전자음악의 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즉흥적으로 만나고 흩어지고를 반복한다. 결국, 이것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다.
글 김여항 객원기자 사진 이천도자기축제 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