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오페라단의 ‘파르지팔’은 2013년 10월, 대한민국 공연계의 주요 화두 중 하나였다. 순수 러닝 타임만 4시간이 넘는 ‘파르지팔’은 한국 초연이라는 이력뿐 아니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공연 사상 가장 긴 공연으로 기록됐다. 여기에 베이스 연광철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가수진과 제작진까지. 바그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며 올려진 ‘파르지팔’은 한국에서 쉽사리 볼 수 없었던 장면과 기록들을 선명하게 남겼다. 그렇기에 무대 위에 펼쳐진 ‘파르지팔’, 그리고 ‘파르지팔’이 우리에게 남긴 것에 관해 되돌아볼 이유도 분명했다. 먼저, 지난 10월 1·3·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파르지팔’을 관람한 음악 칼럼니스트 유형종과 오페라평론가 이용숙의 이야기를 통해 ‘파르지팔’을 다시 기록해본다. 두 사람은 각각 첫째 날과 마지막 날(이용숙), 둘째 날(유형종) 공연을 관람했다.
명가수들과 어우러진 코리안심포니의 호연
유형종 바그너 작품이 거의 공연되지 않는 우리나라 현실에서 상식적인 순서를 따진다면 국립오페라단의 바그너는 ‘로엔그린’이 적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난해한 ‘파르지팔’이 선택된 이유는 세계 최고의 구르네만츠로 우뚝 선 연광철의 존재 때문이었다.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은 인상적인 무대와 연주, 그리고 관객의 반응은 성공적인 결과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정도의 연주력은 당연히 나왔어야 했다. 확고한 믿음을 준 연광철이 중심에 있었고, 지휘자 로타 차그로세크는 바그너의 나라 독일에서 풍부한 바그너 작품을 지휘한 세계적 거장이 아닌가. 게다가 당초 파르지팔과 쿤드리로 캐스팅된 가수의 출연이 어렵게 되었지만, 대신 초청된 크리스토퍼 벤트리스(파르지팔)와 이본 네프(쿤드리)는 이 오페라에서 기대할 수 있는 현역 최고의 명가수들이었다.
이용숙 ‘파르지팔’ 한국 초연은 성악 면에서 단연 최고였다. 바이로이트·뮌헨에서 공연을 보았을 때도 가수진이 이 정도로 만족스러웠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연광철과 크리스토퍼 벤트리스는 기존의 프로덕션에서도 자주 보아왔기 때문에 그리 새로운 느낌은 아니었으나,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배역에서는 단연 최고라고 손꼽을 만했다. 연광철의 구르네만츠는 언제나 만족스럽거니와 크리스토퍼 벤트리스 역시 바그너가 요구하는 헬덴테너, 미성과 파워를 갖춰 파르지팔에 완벽하게 어울렸다.
유형종 크리스토퍼 벤트리스는 요즘 바그너 헬덴테너의 추세가 미성으로 흐르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물론 그냥 미성이 아니라 힘과 지구력이 뒷받침된 미성이다. 그는 영상물로 만났을 때보다 훨씬 ‘연민으로 깨달음을 얻는 바보’ 역에 어울렸다. 이본 네프도 놀라웠다. 50대 중반이 넘은 나이인데다가 바그너 전문 가수가 아니라 베르디를 포함한 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하는 가수이지만, 풍부한 성량과 혼신을 다한 연기로 타락한 여인과 정화된 여인 사이를 오가는 정체 불명의 쿤드리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2막 후반부에서 파르지팔과 선보인 긴 이중창은 압도적이었다.
이용숙 2막에서 쿤드리는 고음을 비롯해 상당한 힘이 요구되는 노래를 소화해야 하는데, 이본 네프는 표현력이나 연기력 면에서 거의 나무랄 데가 없었다. 다른 영상물에서 본 여성 가수들과 비교하더라도 역대 최고의 쿤드리로 꼽고 싶을 정도다.
유형종 연광철은 그야말로 구르네만츠의 화신이었다. 그의 실제 성격과도 닮은 듯 차분하고 헌신적인 캐릭터를 본고장 명가수보다도 가사의 의미를 정확하고 깊게 음미할 수 있도록 노래했다. 절제되었지만 명확하게 전달되는 연기도 훌륭했다. 클링조르 역의 양준모는 정교한 맛은 부족했지만 악의 세력을 이끄는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를 탁월하게 살렸다.
이용숙 오케스트라 연주는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공연 전 금관 파트 부분을 많이 걱정했는데,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금관 주자 네 명을 데려와서인지 예상보다 탄탄했다. 첫째 날과 셋째 날 공연을 관람했는데, 첫날에는 1막에서 현과 목관 모두 조심스러워하는 느낌이 들어 좀 불안해보였고, 아쉬웠다. 마지막 날에는 오케스트라가 전체적으로 훨씬 높아진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들을 수 있는 바그너 음악으로는 최고의 수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유형종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를 만났어도 바그너의 본고장 악단에서 나오는 소리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현은 괜찮았으나 목관은 지휘자를 따라가기에 급급했고, 금관은 정교하게 반응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기도 했다. 어렵게 구한 4개의 공(타악기)은 기대한 소리를 내지 못했다. 둘째 날인 10월 3일에 관람했는데, 첫날보다 연주가 향상됐다는 의견을 들을 수 있었고, 마지막 공연에서는 더 정돈된 연주를 선보였다고 들었다. 코리안심포니의 바그너 경험이 일천한 것을 감안하면 무난한 수준을 넘어선 호연이었다.
흥미를 배가시킨 다양한 무대장치
유형종 프랑스 출신 연출가인 필리프 아를로는 1막과 3막 무대에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빙해’를 차용했다. 얼어붙은 빙하는 생명력이 죽어있는 성배의 왕국의 암울한 상황을 상징하고, 숲은 마지막 남은 나무 한 그루로 표현됐다. 너무 단출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의자 몇 개만 달랑 놓는 것으로 무대장치를 끝내기도 하는 요즘 추세로 보면 무난한 편이었다.
이용숙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빙해’에 담긴 인간의 상처와 좌절에 관한 주제의식을 ‘파르지팔’과 탁월하게 연결시켰다고 생각한다. 2007년 바이로이트에서 아를로 연출의 ‘탄호이저’를 봤는데, 정말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의미상으로는 새롭지 않았지만, 당시 아를로가 보여준 무대의 색상과 빛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의상이나 무대 배경이 SF 느낌으로 굉장히 밝고 아름다우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보여줬다. 아를로는 푸른색에서 차츰 보라색으로 넘어가는 색상을 즐겨 쓰는 편인데, 이번 ‘파르지팔’에서도 흰색·푸른색·붉은색·보라색을 적절하게 사용하며 색채와 빛에 관한 일가견을 보여주었다.
유형종 2막은 빛의 유희였다. 무대 미술가이자 조명 디자이너이기도 한 아를로는 사악한 마법사 클링조르의 성을 가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2막 2장에서 파르지팔과 쿤드리를 중심 조명 안으로 끌어들였다가, 내보냈다가 하는 방식으로 집중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이중창 장면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각 막에서 거대한 거울을 무대 뒤에서 기울여 무대 전체를 자세히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전체적인 입체감을 크게 살려냈다. 다만 요즘 흔히 쓰이는 방식이어서 참신한 맛은 부족했다. 그렇지만 1막과 같은 무대장치를 사용하는 3막에서 거울을 통해 지휘자의 움직임을 자세히 보여준 다음에, 객석을 비춤으로써 관객들이 무대와 하나가 되는 듯한 효과를 연출한 것은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이 극의 본질에 어울리는 시도였는지는 둘째로 치더라도 관객들이 이번 연출을 흥미진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일등 공신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막 1장에서 꽃처녀들이 전혀 매혹적이지 않았던 것은 극에 대한 매력을 반감시키고 말았다.
이용숙 꽃처녀들 의상은 알폰스 무하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으나, 전체적으로 답답하게 느껴졌고,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하지만 거울을 통해 보이는 꽃처녀들의 모습은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꽃밭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어, 이러한 시선을 계산해 의상을 제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면으로 바라볼 때는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은 의상이 거울로 봤을 때는 효과적으로 다가왔다.
유형종 가장 큰 논란의 여지는 1막의 성찬식 의식과 3막의 성배 의식이 무대를 정리하지 않은 채 산만하게 진행된 장면일 것이다. 전통적인 경건함이 사라진 무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유럽에서도 신성극으로서 ‘파르지팔’에 담긴 내용을 바그너를 비판적으로, 심지어 조롱하듯이 바라보는 것이 대세다. 따라서 아를로 무대의 산만함은 바그너가 의도한 의식에 도취되지 않고 한발 떨어져 관찰할 수 있는 방식을 취한 것이어서 오히려 바람직한 면이 있었다.
바그너의 성배 의식이 모두 끝나고 난 뒤
이용숙 관객 사이에서 공연 자막에 대한 호불호도 있었다. 내용이 눈에 잘 들어오고 이해하기 쉬웠다는 의견이 있는 반면, 일부 바그너 애호가들에게서는 지나친 의역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주로 지적된 부분은 1막에서 “이곳에서는 시간이 공간이 된다”를 “시공간을 초월하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네”라고 번역한 것이었다. 내막을 알고 보니 정주영 씨 번역을 받아 연출부가 실제 장면과 맞춰보며 일부를 수정한 것이라고 한다. 오페라에서 가사가 바뀌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바그너의 원전을 관객이 모르는 것을 감안해 무대 상황에 맞게 수정하는 유연성이 발휘된 것이라 생각한다. 엄밀하게 “이곳에서는 시간이 공간이 된다”라는 말은 바그너가 음률을 맞추기 위해서 문장을 시적으로 만든 것이다. 개인적으론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의역이 적절했다고 본다. 시제가 맞지 않거나 가벼운 오역이 일부 있었으나 그리 중요한 대목이 아니었고, 전체적인 자막이 관객의 이해를 도왔다고 생각한다. 그 외에 마지막 장면에서 쿤드리를 죽이지 않고 꽃처녀들을 등장시켜 성배 기사들과 짝을 지을 것 같은 느낌을 연출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것, 양성의 조화를 통해 미래를 나아간다는 의미를 암시한 것이 참신하게 느껴졌다. 백조를 무용수로 등장시킨 것이나 3막 마지막 장면에 살아있는 비둘기를 등장시킨 것은 연출가의 센스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바그너가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런 점들이 당연히 이 작품에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파르지팔’ 연출에 있어서 정치적인 해석이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바이로이트에서 연출했던 헤르헤임은 작품의 본질을 꿰뚫어보았다. 동시에 정치적 해석이 완전히 배제된 아를로의 연출에 아쉬움을 느꼈다. 다만 한국 초연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바이로이트 무대에서처럼 나치의 역사를 끌어들였다면 한국 관객으로선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면에선 우리나라에서 ‘파르지팔’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에게는 작품 자체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연출이었다.
유형종 이제 바그너의 성배 의식은 끝났다. 그 반향도 상당했다. 그러나 공연 중간에 박수를 칠 틈을 주지 않는 바그너의 무한선율을 길게 즐겼으면서도 막의 커튼이 내려오기 시작하자마자 박수를 치기 시작하여 남은 음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우리 관객들은 과연 오페라를 제대로 즐기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또는 ‘파르지팔’이 바그너의 모든 것이 집대성된 마지막 걸작이란 사실에 동조하느라 바그너 사상의 기저에 깔린 인종차별 등 문제가 될 만한 요소를 망각하고 바그너를 무비판적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한편 결코 부족하지 않은 예산 덕분에 최고의 연주자들을 불러올 수 있었지만 오페라 공연의 근간인 연출가와 지휘자 자리를 매번 외국인에게 맡기고 있는 국립오페라단에 축적되고 있는 우리 내부의 역량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