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의 교향곡 전집 CD 세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면서 “오래지 않아 그 속에 압축된 거대한 사운드가 핵분열을 일으켜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는 미국의 어느 음악평론가의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던 게 벌써 20년 가까운 옛일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40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형성된 온갖 종류의 클래식 사운드가 담긴 50장의 CD 세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아도 더 이상 그런 식의 미적 감흥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이 박스 세트는 워너 뮤직 산하 레이블인 텔덱과 에라토, 다스 알테 베르크의 음원들을 각각 50장의 CD에 담아 발매한 세 종류의 ‘전설의 명연’ 시리즈 박스 세트 가운데 하나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에라토의 음원들이 50개의 종이 커버 CD에 담겨 이 초록빛 박스 안에 촘촘하게 열 지어 선 모습에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은 반가움보다는 씁쓸한 감정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1953년에 설립되어 프랑스를 대표하는 음반 레이블로 성장한 에라토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레퍼토리들을 폭넓게 발굴했고, 프랑스 연주자와 작곡가를 중심으로 한 현대음악 녹음에도 힘을 쏟았다. 이 박스 세트의 처음 6장의 CD 면면을 순서대로 열거해봐도 이러한 레이블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모리스 앙드레의 트럼펫 협연이 어우러지는 알비노니·타르티니·헨델 등의 바로크 협주곡을 시작으로 마리 클레르 알랭이 연주하는 ‘토카타와 푸가’를 비롯한 바흐의 오르간 작품들을 지나, 로린 마젤이 이끄는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의 비제 ‘카르멘’ 발췌 음반, 그리고 작곡가 자신이 직접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혼례의 얼굴’과 같은 불레즈의 관현악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바로크와 프랑스라는 키워드들이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이 두 가지 키워드의 조합 속에서 존 엘리엇 가드너·윌리엄 크리스티·마르크 민코프스키와 같은 고음악 분야의 명지휘자들과 릴리 라스킨과 장 피에르 랑팔 등의 연주자들, 그리고 풀랑크·프랑크 등의 프랑스 작곡가들이 이 음반 세트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몇 개의 CD를 특기하기가 어려울 만큼 명연주 명음반들로 가득 차 있을 뿐만 아니라 CD 순서도 청취에 적절하게 배열되어 있어서 1번 CD부터 한 장씩 차례로 들어도 좋을 듯하다. 레자르 플로리상을 이끄는 크리스티의 샤르팡티에와 퍼셀 연주가 귀에 쏙 들어오며, 불레즈와 뒤뤼플레가 직접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반들도 돋보인다. 유일한 한국 연주자인 조수미의 오페라 아리아 음반도 눈에 들어온다.
형체가 없는 디지털 음원이 주류 매체를 장악한 이 ‘포스트 음반 시대’에도 CD라는 마지막 ‘음반’ 매체는 꽤 오래도록 살아남을 전망이지만, LP시대의 명연주가 담긴 음원들이 이토록 획일적인 종이 포장 속에서 덤핑으로 처리되는 모습은 클래식의 한 시대에 대한 종말론적 명상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박스 세트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오래전 서향이 깃든 도서관에서 도서 목록 카드를 뒤지듯 CD를 더듬어 한 장씩 꺼내 들으면서 얻게 되는 즐거움과 포만감이 쏠쏠하다. 그것은 물론 이 박스 세트가 어느 한 장도 버릴 게 없는 확실한 명반 컬렉션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LP시대의 음원이지만 음질이 상당히 좋다는 점도 그에 덧붙여야겠다.
글 최유준(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