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5일 올림푸스홀
유홍 님. 베를린에서의 음악활동은 어떤가요? 당신이 간만에 들린 이곳은, 기대를 당기는 전통음악 공연도 별로 없고, 눈먼 지원금과 그것이 키운 허약한 예술가들이 대중에게 다가간다는 명목으로 정의 내리기 힘든 무대가 이어지고 있는 곳입니다. 모든 것이 ‘문제’라 하면서 모두가 입을 모읍니다만, 실제로 그런 그들(차마 ‘예술가’라고 못 하겠습니다)의 침묵과 공모의 무게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이 점은 저보다는 여러 이유와 의문을 들고 유럽으로 간 당신이 더 잘 아리라 생각됩니다.
약 두 시간에 걸친 당신의 무대를 보면서 당신이 걸어온 여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내에서 정가악회의 창단 멤버로서의 활동, 홀로 떠난 영국에서 런던대학교 민족음악학과 연주자과정 수학, 현재 베를린에서 예술인 자격으로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당신은 마치 ‘난 이렇게 살았다’라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기라도 하듯 여섯 곡을 싸들고 와서 무대에 풀어놓았습니다. 여섯 명의 작곡가들 중 당신과 정가악회 창단 멤버였던 이태원을 제외하면, 클라우스 하인리히 슈타머·하라다 게이코·정일련·톰 로호 폴러·조은화의 이름은 참으로 생소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가 이번 연주회를 통해 접한 것은 여섯 곡의 작품이 아니라 그 안에 울려 퍼졌던 ‘유홍(만)의 대금언어’였습니다. 당신은 무대의 중심이면서도 곡의 일부였고 눈앞에 보였던 무대를 떠나 생각을 넓혀보면, 당신의 대금 또한 여러 작곡가들에게 부지런히 영감을 준 마술피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슈타머의 ‘바람소리’는 플라스틱 관을 흐르는 바람 소리가 녹음된 음원을 배경으로 대금 소리가 일부분으로 더해졌고, 인상 깊게 들었던 하라다의 ‘소실점 연구’에서 당신은 최수열의 지휘 아래 바이올린(이석중)·비올라(이한나)·첼로(양지욱)와 함께 사각형 중 한 꼭짓점 역할을 했습니다. 독일에서 태어난 한국계 작곡가 정일련의 ‘모멘텀’도 같은 구성이었고, 2부의 막을 열던 폴러의 ‘리스케터드 멜로디’에서는 녹음된 산조가 흐르는 이어폰을 당신과 김호정(첼로)이 나누어 끼고 청취자로서의 연주자라는 새로운 표현 주체를 보여줬습니다. 그 외 장구(김웅식)와 함께 한 조은화의 ‘대금과 장구를 위한 자연으로’와 이태원의 ‘바람, 흐튼’에서는 한국 작곡가의 ‘의도적인 거리 두기’를 통해 대금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보고자 하는 작곡가와 당신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서울-런던-베를린을 잇는 여정 속에서 당신의 대금과 음악언어, 그리고 대금의 역사는 더 확장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못 보던 기법으로 일궈진 작품이어서만이 아니라, 이 땅의 많은 이들이 상상에만 그치고 실천하지 못하는 기법들이 악기 주법 역사에 틈을 내어, 그 틈이 닫히지 않도록 단단한 쐐기를 박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점도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정일련의 ‘모멘텀’을 들을 때, 그 복잡다단한 화성, 전조, 불협화음이 일군 소리들의 흐름 속에서 최수열의 손은 세마치장단을 타며 지휘를 하고 있었다는 점이요. 한국의 음악적 문법이 이렇게 은유적인 차원에서 활용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쉽습니다. 이렇게 연주자-악기-전통음악에 대해 많은 생각을 던져준 공연이 단 한 번으로 그쳤다는 것이.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이 눈먼 나랏돈에 힘입어 비행기에 편하게 몸을 싣기보다는, 이 젊은이처럼 이방인으로, 떠돌고 부딪히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만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최민호(MVER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