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과 이탈리아 혈통을 동시에 물려받았으며, 특정한 학파나 사조 등에 영향 받지 않았기에 비슷한 시기 어느 작곡가와도 닮지 않았던 부소니는 연구나 분석을 위한 편의상의 규정짓기가 (그것이 시대든 스타일이든) 매우 어렵고 복잡한 존재다. 한 세대 이상 앞선 형식과 음향을 지녔지만, 정작 창작의 근원은 바흐를 포함한 바로크적인 발상에서 비롯된다는 점은 많은 연주자들에게 그의 작품이 널리 환영받지 못하게 된 대표적인 모순점이자 고민거리이다.
동시대 비르투오소이자 난해한 악상으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레오폴트 고도프스키와 비교해보면 부소니의 특징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텍스트를 꼼꼼히 채워 피아니스틱한 기법의 극을 달린 고도프스키의 경우 수많은 음표들을 통해 자신의 피아니즘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는 데 반해, 부소니의 음표들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설명을 최소화하고 거기에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화두만 제시하는 식인데, 그가 지닌 특유의 현학적 스타일은 음악은 물론이고 철학을 포함한 범문화적 지식이 동반된 이들에게만 모두 이해되는 특징을 지닌다.
‘건반 위의 슈퍼맨’ 마크 앙드레 아믈랭이 모처럼 ‘용기’를 발휘했다. 하이든·쇼팽·드뷔시 등 스탠더드 레퍼토리를 연주하는 그의 모습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소니의 오리지널 작품들을 세 장의 음반에 가득 담은 신보에서 참으로 홀가분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은 역시 이런 분야가 그의 본령이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부소니의 대표작 가운데 중요 작품들이 거의 망라됐지만 연대상 특징을 고려하여 ‘후기’ 피아노 작품집이라고 붙인 앨범 제목에서 연주자의 학구적인 자세와 의욕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첫 번째 음반은 시대적으로 가장 빠른 ‘엘레지’ 일곱 곡이 시작을 장식한다. 리스트의 ‘타란텔라’에 등장하는 곤돌라 노래를 패러디한 2번 ‘이탈리아 풍’, 훗날 오페라와 모음곡으로도 만든 ‘투란도트’에서 등장하는 모티브와 민요 ‘그린 슬리브스’를 스케르초 풍으로 엮은 4번 ‘투란도트의 방’ 등이 하이라이트다. 아믈랭의 해석은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나 풍자와 상징적 요소의 연출도 뛰어나다. 소품 ‘크리스마스의 밤’은 부소니의 작품 중 인상파적인 색채가 가장 두드러진 작품인데, 아믈랭의 터치는 달콤하고 서정적이다.
두 번째 음반에서 중요한 작품은 여섯 곡의 소나티나와 아메리카 인디언의 멜로디에서 힌트를 얻은 ‘인디언의 일기’ 네 곡이다. 피아니스트 마르크 함부르크에게 헌정된 소나티나 2번은 조성과 마디가 생략된 도입으로 시작하는 즉흥곡적인 악상이며, 소나티나 5번은 바흐의 판타지와 푸가 D단조 BWV905를 토대로 만든 소품이다. 잘 알려진 소나티나 6번은 비제의 ‘카르멘’에 등장하는 주요 멜로디들을 엮은 화려한 편곡이다. 아믈랭의 자세는 화사한 톤 컬러와 유연한 흐름으로 의외의 프랑스적 색채를 나타내 흥미롭다. 앨범 수록곡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인디언의 일기’ 네 곡은 냉정과 열정, 단순함과 방대한 스케일을 순간적으로 풀어내는 솜씨가 훌륭하다.
마지막 장에는 작곡가 최만년 작품들 가운데 클라비어위붕(연습곡) 중 발췌가 실려 있다. 작곡가 사후에 출판된 연습곡 중 트릴과 3도, 스타카토 등의 훈련을 위한 짧은 소품들에서 아믈랭의 능력은 극대화된다. 정교함과 위트, 과도하지 않은 명인기 등은 20세기 초 피아노의 황금 시기를 수놓았던 무수한 비르투오소적 작품들의 예비 훈련을 위한 모범 답안처럼 느껴진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