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앤 롤프의 오페라 의상

탐미여, 이제 무대로!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2월 1일 12:00 오전

“극장을 위해 옷을 만드는 것은 더 쉽다. 우리의 옷이 순수하게 예술적으로만 평가받기 때문이다.”
연출가 로버트 윌슨의 ‘마탄의 사수’에 참여한 듀오 디자이너 빅터 앤 롤프(Viktor & Rolf)의 말이다. 오페라 프로덕션 크레딧에 저명한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이 점차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 크리스티앙 라크루아·카를 라거펠트·비비안 웨스트우드, 그리고 오페라에서의 역할이 만개하기 전에 안타깝게 세상을 뜬 알렉산더 맥퀸 등 수많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대중문화를 넘어 극 무대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네덜란드 출신의 빅터 앤 롤프가 오페라에 발을 담그게 된 사연은 필연적인 우연에 의해서였다.
패션에 문외한인 사람이 빅터 앤 롤프의 런웨이를 볼 기회가 있었다면, 그건 그들의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이슈가 되어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빅터 앤 롤프의 패션쇼는 무용이나 오페라를 만나기 전부터 극 무대와 닮아 있다. 네덜란드의 아른험 예술학교에서 만난 1969년생 동갑내기 듀오는 패션 산업계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예술세계와 철학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 팀을 꾸려 파리로 이주한 빅터 앤 롤프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건 1995년 ‘공간의 모습’이라는 전시를 통해서였다. 이들은 입을 수 없는 금색 의상들을 천장에 매달고, 검은색 옷을 그림자처럼 펼쳐놓아 허상을 좇는 패션계를 표현했다.
빅터 앤 롤프의 패션 세계를 한마디로 특징지을 수 없는 건 이들의 이중적인 태도 덕분이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개념적으로 작업하고, 한편으로는 오롯이 심미적으로 작업한다. 어느 해 컬렉션은 전형적인 검은 실루엣으로 통일되는가 하면, 그 다음 해엔 색채의 홍수 속에 과장된 디테일이 시각의 혁신을 일으킨다. 이들은 장미·리본·프릴·레이스 등 전통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요소들을 변형하기도 하고, 왜곡시키기도 하고, 한껏 과장시키기도 한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의상보다는 향수로 돈을 버는 현실을 꼬집으면서도 자신들은 잘 나가는 안경 브랜드를 내놓은 것처럼, 패션 세계의 본질을 때로는 한 발짝 옆에서 비꼬고 때로는 정면으로 침투하여 맞닥뜨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성질이 있다면, 그들의 런웨이는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2005년 F/W 컬렉션에서는 싱어송라이터 토리 에이머스의 피아노 무대를 주변으로 모델들이 워킹을 선보였고, 2007년 S/S 컬렉션에서는 루퍼스 웨인라이트와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런웨이로 등장해 살롱 무도회장이 펼쳐졌다. 지난해 F/W 쿠튀르 쇼에서는 모델들이 현대무용가로 탈바꿈해 13분간의 무대를 선보였다.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무거웠던 오페라 의상
빅터 앤 롤프가 스스로의 무대를 꾸미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의 협업을 통해 무대 위에 의상을 올린 건 세 차례다. 2004년 로버트 윌슨의 연출로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DTⅢ)의 ‘두 개의 입술과 무용수들과 공간(2 Lips and Dancers and Space)’ 무대 의상을 맡은 게 그 시작이었다. 2009년 바덴바덴 페스티벌에서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로 오페라 무대에 데뷔하게 된 것은 순전히 윌슨과의 호의적인 관계 덕분이었다. 빅터와 롤프는 무대 의상 제안을 받았을 당시만 해도 오페라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이들을 매료시킨 건 ‘마탄의 사수’가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라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마탄의 사수’가 “어쩐지 키치적이지만 그 의미와 내용이 완전히 열려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뒤틀려 있다는 데 매료됐다”라고 한다. 당시 사이즈를 과장되게 확대시키거나 축소시키고, 두 사람만의 상상 속 세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빅터와 롤프는 이 우스꽝스러운 낭만주의에 흥미를 느꼈던 것이다.
세속적인 욕망과 연인에 대한 사랑에 눈이 멀어 마법 탄환으로 대회를 이기고자 하는 사수의 이야기를 담은 ‘마탄의 사수’를 작곡가 막스 베버가 뛰어난 관현악 작법을 통해 악마적인 공포스러움을 자극하고, 또 한편으로는 민요 풍의 멜로디를 통해 대중성을 자극했다면, 빅터 앤 롤프는 의상을 통해 이 환상적인 세계를 구축해냈다.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무거운 옷은 탐미적이었지만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했고, 오페라 가수들은 거대한 꽃과 같은 모습으로 무대 위에 섰다. “낭만의 과잉으로 키치가 되어버린 19세기 낭만주의를 비꼬기 위해” 100만 개가 넘는 스와로브스키 보석이 의상을 뒤덮었다. 초연 무대에서 이들 듀오는 기립 박수를 받았고,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요소를 통해 마법의 세계를 만들어냈다”라는 평단의 호평이 쏟아졌다.
로버트 윌슨과의 작업 후 그의 손에 이끌려 ‘라 보엠’ ‘나비부인’ 등을 메트 오페라에서 관람한 빅터와 롤프의 또 다른 오페라 무대를 만날 일이 있을까? 패션과 달리 의상(costume)은 현실 세계에서의 ‘기능’을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되기에 더없이 매력적이라는 그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그 시점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백조의 호수’가 참으로 아름답다고 기대에 부푼 모습을 보니 발레 팬들에게 희소식이 먼저 도착할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글 김여항 기자(yeohang@gaeksuk.com)


▲ 아가테 역의 율리아네 반제가
입은 입체적인 부케 드레스는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털로 장식되었다
Photo by Lesley Leslie-Spin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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