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 내 삶의 길목에서 만난 음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4월 15일 8:00 오전

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3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피아니스트 이경숙

내 삶의 길목에서 만난 음악

 

 

이경숙(1945~) 이화여중을 졸업하고, 서울예고 재학 중 장학생으로 도미해 커티스 음악원에서 호르쵸프스키, 루돌프 제르킨을 사사했다. 1967년 제네바 콩쿠르 입상 및 난파음악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옥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뮌헨 피아노 콩쿠르, 일본 소노다 콩쿠르, 영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대 음악원장 및 연세대 음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연세대 음대 명예교수이자, 서울사이버대학 피아노과 석좌교수다.

 

 

어린 날에 들었던 어머니의 노래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음악적 영감을 받은 곡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바리톤)·제럴드 무어(피아노)

 

감상 포인트 내면의 깊이와 테크닉적 완성도가 높은 명반

 

어머니는 이화여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활기차고 호기심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1·4후퇴 당시 피난 온 부산에서 합창단을 다니며 저를 키우셨죠. 우리가 살던 집에는 피아노가 한 대 있었는데, 어머니와 친하게 지내던 미국인 선교사가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어머니에게 남기고 간 조그만 한 악기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마땅한 피아노 악보가 없었기에 어머니는 당신이 보시던 코르위붕겐(프란츠 뷜너의 합창 연습 교본)으로 제게 악보 읽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후, 어머니가 구해주신 두 권의 명곡집에 수록된 재미있는 곡들을 쳐보려고 노력했지만, 기초가 부족해서였는지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명곡집에는 바흐, 베토벤의 명곡부터 터키 행진곡, 꽃노래, 은파까지 다양한 곡들이 고루 섞여 있었는데 이러한 곡들은 훗날까지 제게 음악적으로 큰 영감을 주었지요. 어머니가 숙제를 내고 가시면 늘 집에서 혼자 피아노를 치며 연습하다가, 마침 당시 부산에 계시던 신재덕(1917~1987) 선생님께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항상 집에서 노래 연습을 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처음 들은 곡은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중 ‘보리수’였습니다. 어머니가 반주하며 그 곡을 부를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처음으로 음악적 영감을 받은 곡 역시 어머니가 부르시던 슈베르트의 가곡이었습니다. 지금도 ‘겨울 나그네’를 듣고 있으면 외롭고 쓸쓸하지만, 비바람을 뚫고 앞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의 삶과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 더욱 마음에 와닿습니다. 저의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우리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골드베르크 선율에 담긴 추억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유학 시절 나를 성장시킨 음악

타티야나 니콜라예바(피아노)

 

감상 포인트 여유와 낭만이 가득한, 긴 원곡의 악보가 잘 담겨 잔잔한 감동과 함께 만년의 깊이가 빛나는 음반

 

유학이 흔치 않았을 당시,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가 계신 미국으로 피아노 공부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화경향음악콩쿠르를 비롯해 여러 콩쿠르에서 입상할 만큼 꼬마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았지만, 미국에서의 생활은 그야말로 좌절 그 자체였습니다. 피아노의 기본기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못해서인지 유학 생활 초기의 공부는 너무 힘들었고, 앞날에 대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실력을 키운 끝에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미예치슬라브 호르쵸프스키(1892~1993), 루돌프 제르킨(1903~1991) 선생님에게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그리고 브람스를 깊이 있게 배웠습니다. 음악원에서 만난 친구 중에는 리처드 구드(1943~), 피터 제르킨(1947~2020), 제임스 헨리 필즈(1948~1984) 등이 있었는데, 후에 모두 훌륭한 피아니스트로 활발한 활동을 했지요. 특히, 같은 클래스에서 공부했던 피터 제르킨은 루돌프 제르킨 선생님의 아들이었는데, 그가 연주하는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저도 그 곡을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소속되었던 매니지먼트의 소개로 조그만 대학 강당에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강당의 바닥이 너무 미끄러운 탓에 의자에 앉다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부끄럽고 불안한 마음에 긴 변주곡을 더 길게 연주하다 보니, 연주를 듣던 학생들이 지루했던지 하나둘씩 공연장을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지금도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곤 합니다. 치열하게 피아노와 싸웠던, 나를 성장시킨 유학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말이죠.

 

내가 베토벤을 사랑하는 이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연주

카를 뵘/빈 필하모닉(협연 마우리치오 폴리니)

 

감상 포인트 폴리니의 아름다운 2악장 아다지오가 빛나는 최고의 명연

 

제게는 평생 잊지 못할 연주회가 있습니다. 바로 1984년 11월, 리카르도 샤이가 이끄는 로열 필하모닉과 베토벤 협주곡 5번 ‘황제’를 협연했던 날이죠(세종문화회관). 당시에는 해외 오케스트라의 내한이 드문 일이었기에 매진될 만큼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사실, 당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은 꽤 오래 전에 연주했던 작품이었기에 프로그램에 대한 부담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오케스트라의 오전 리허설이 취소되고, 짧은 드레스 리허설로 끝이 나면서 제 마음은 더욱 불안하고 초조해졌습니다.

그렇게 리허설 없이 공연이 시작되었고, 1악장 오프닝 카덴차가 끝난 후 그만 암보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긴장감에서 비롯된 블랙아웃 때문이었죠. 잠시 후, 다시 정신을 바로잡고 연주를 무사히 마쳤지만,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 무서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또 블랙아웃이 오면 어쩌나 불안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을 떠올립니다. 이 고통이 지나면 어떤 신비한 인연과 인생이 나를 기다릴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면서 말이죠. 은퇴 후, 음악을 통해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던 제게 정말로 신비한 인연이 찾아왔습니다. 10년 전 ‘나이와 실력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시스템을 통해 음악을 배울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서울사이버대학의 이상에 감명받아 온라인이라는 새롭고 낯선 환경 속에서 다시 교육자로서의 삶을 그려나가게 된 것이죠.

잊을 수 없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연주회.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베토벤은 언제나 변함없이 저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음악은 힘든 순간마다 제 인생의 길을 비춰주었지요. 제가 베토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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