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세이 류비모프의 베토벤 앨범은 이제 세 장 발매됐지만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비단 시대 악기 애호가가 아닐지라도 한번쯤 들어볼 만한 해석과 사운드의 묘미를 지녔고, 그 매력에 빠지다 보면 베토벤 건반 음악에 대한 고정관념은 무참히 무너진다.
1994년 ‘비창’ ‘월광’ ‘발트슈타인’ 히트작을 모았던 첫 앨범(Erato)은 1806년산 브로드우드 앤드 선스 모델의 명징한 울림과 연주자의 농익은 해석이 결합돼 주목받았지만 금세 단종돼 잊혔다. 이후 현대와 고전의 극단을 오가며 오디세이적인 여정을 펼친 류비모프는 2009년 30~32번 후기작(Zig-Zag Territoires)을 모아 발매하며 다시 센세이셔널한 베토벤을 선보였다.
마치 전집을 시작할 듯 분위기를 잡더니 후속작은 다른 레이블인 알파에서 4년 만에 발매됐다. 류비모프는 신보를 통해 첫 앨범 수록했던 14·21번을 다시 들려주고 17번 ‘템페스트’를 새로 선보였다.
4년 전 후기작 앨범이 1828년산 알로이스 그라프 모델 사용이 주효했듯 이번엔 세 작품의 작곡 시기에 맞게 1802년 프랑스 에라르 모델을 써서 명확한 시대성을 반영함과 동시에 청감을 부드럽게 자극한다.
악기는 기본적으로 풍부한 양감의 공명을 지니고 있으며, 저음으로 내려가고 고음으로 올라갈수록 금속성 울림의 비중이 높아지는 특성이 있다. 그러면서도 전역에 걸쳐 울림의 밀도는 대단히 높아 피아노포르테를 사용한 다른 앨범에 비해 빈약한 소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비단 악기 특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기술·낭만적인 해석·고해상도를 자랑하는 레이블의 녹음 특성이 어우러진 결과일 것이다.
류비모프의 베토벤은 시대 악기 연주임에도 낭만주의에 기운 경향을 보여준다. 전편에 걸쳐 서두르지 않는 템포가 두드러지고, 느린 악구에선 감상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소나타 ‘월광’ 1악장은 깊은 사색과 낭만성이 표제적인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여유가 넘친 2악장 미뉴에트와 질주하는 음표들이 논리 정연하게 배열된 3악장은 매우 이지적으로 들리면서도 악상 고유의 성격은 희석되지 않았다.
빠른 악장에서도 두 번째 주제에선 템포를 뚝 떨어뜨려 대비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발트슈타인’ 1악장에서 경과구를 거쳐 2주제로 넘어갈 때나, 3악장 주제부가 미끄러지듯 서서히 빨라지는 과정은 대단히 아름답다. 후자에서 멜로디를 점증하고 가속하는 표현력과 조형미는 다른 현대악기 연주에 비해 손색없는 웅대한 풍모를 지녔다.
‘템페스트’ 역시 다른 작품 못지 않게 음표의 시가를 충분히 음미하면서 응축된 긴장을 빚는 호연이다. 1악장 2주제의 팽팽한 터치감과 3악장 1주제의 창백한 표정은 외향적이지 않으면서도 드라마틱한 힘을 전달한다.
류비모프의 베토벤은 느리고 주관성이 짙다는 점에서 다른 시대 악기 연주와 차별된다. 파울 바두라 스코다(Astree)와 로날트 브라우티함(BIS)의 전집과 비교하면 악기 매력도에서 한 수 위일뿐더러 연주자의 해석에서도 ‘마성’이라고 할 만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올해 일흔을 맞은 연주자가 더 늙기 전에 더 많은 베토벤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글 이재준(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