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9일 올림푸스홀
공연을 볼 때, 내게는 몇 개의 기준이 있다. 특히 젊은 연주자의 무대일 경우 ‘감각’을 기준으로 둔다. 그들이 가장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 음악을 통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내세우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하지만 하나의 의견에는 생각이 모아지는 듯하다. 정악이나 민속악과 같은 전통음악으로는 ‘감각’을 내세울 수 없다는 생각. 그래서인지 대부분 창작곡만을 선호한다.
천지윤은 장영규가 이끄는 음악그룹 비빙의 멤버다. 감히 말하자면 이 그룹은 첨단의 길을 탐사하고 있는 그룹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천지윤의 이번 무대 구성을 보면 약간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1부는 최태현 구성의 지영희류 긴 산조. 2부는 장영규가 작곡한 ‘경기굿 #1’과 ‘경기굿 #2’. 첨단을 지향하는 음악그룹의 멤버가 챙겨가기에는 약간 의아한 구성,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감각’이 잘 안 묻어나는 구성으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공연장에 들어서니 무대 위에 놓인 색동이 입혀진 단과 촛불은 이런 기대를 더 부풀게 했다. 한껏 멋으로 치장한 한복이 아닌 먹빛의 한복을 입은 천지윤의 모습 또한 그랬다. 하지만 무대 위의 그녀는 이동훈의 반주에 맞춰 덤덤했고 담담하게 연주에만 집중했다. 진양·중모리·중중모리·굿거리·자진모리로 장단이 넘어갈 때, 혹은 조(調)가 바뀔 때마다 영상을 통해 주황색과 노란색, 초록색 등이 미니멀한 회화의 화폭처럼 은은히 펼쳐진 것이 전부였다. 많은 이들이 2부의 레퍼토리에 패를 걸었던 것 같았다. 고인이 된 경기도당굿의 조한춘 명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천지윤은 죽은 자와 대화를 나누듯 해금 소리를 밀어 넣었다. 천지윤과 함께 비빙에 몸담고 있는 신원영의 타악기와 박순아의 가야금, 너울거리는 촛불, 영상에 담긴 섬뜩한 무속화의 ‘관계항’ 속에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음악적인 대화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어떻게 보면 1부 산조, 2부 창작곡이라는 흔한 구도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해금 하나로 지영희 명인(1909~1979)과의 음악적 연결점, 그리고 명인의 음악적 피와 살이 되었던 경기무악과 경기굿의 계보를 찾아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서려 있는 시간이었다. 그 연결점들을 탐색하고, 이접(異接)과 접속 시 연결의 경계에서 생겨나는 새로움이 ‘천지윤’이라는 젊은 주자와 ‘굿’이라는 보고를 돌아보게 했다고 할까.
앞서 말했듯 젊은 세대의 음악인들은 민속악 등의 전통음악으로는 본인의 ‘감각’을 내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통의 계보와의 차디찬 ‘단절’이 창작의 에너지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몇 년을 부여잡고 있던 산조 ‘한 자락’이 어설픈 창작품의 ‘한 조각’으로 소모되는 경우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천지윤의 공연을 보면서 받았던 강한 인상은 전통의 농도가 감각의 농도를 대변할 수 있다는 그녀의 믿음이었다. 이러한 ‘믿음’이 일군 무대를 올해에는 좀 자주 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번 무대의 제목을 자세히 보니 제목 뒤에 ‘1’이 붙었다. 첫 번째 무대. 시리즈로 계속될 듯하다. 몇 번의 숫자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전통=감각’이라는 그녀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천지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