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아다지오 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구소련 시절 독설 평론가로 유명했던 이즈라일 네스티예프가 1956년 출간한 프로코피예프 전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두 작곡가는 애초 가는 길이 다른 것 같은데, 도대체 프로코피예프의 어느 작품이 베토벤과 동일시되는 걸까? 바로 1935년에 초연된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의 2악장을 두고 한 말이다. 1934년 제1회 작가 회의에서 소련 공산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해 그 첫 번째 희생자로 쇼스타코비치를 지목했다. 이 무시무시한 스탈린 체제의 암흑기에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의 안단테 악장은 독재자를 비웃듯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무궁동(無窮動)처럼 무한 반복되는 셋잇단음표 위로 흐르는 독주 바이올린 선율은 15년간의 망명 후 조국으로 돌아온 프로코피예프의 눈물이나 다름없다.
음반 쇼핑몰에서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검색하면 무려 100여 종 가까이나 쏟아져 나온다. 식상할 법도 한데 또 하나의 연주가 등장했다. 웬만한 자신감이 아니고서야 선배 바이올리니스트 거장들의 숲을 뚫고 빛을 보기는 불가능할 터. 파트리치아 코파친스카야는 다섯 번째 협주곡 앨범에 기어이 프로코피예프 2번을 추가하고야 말았다. 습관적으로 먼저 2악장을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로 들었다. 그가 뿜어내는 찰지고 윤택한 음률은 역시나 비교 불가였다. 내친 김에 이 곡을 널리 알린 하이페츠도 오랜만에 꺼냈다. 속사포 같은 활긋기는 프로코피예프의 ‘토카타’적인 면만을 강조해 귀에 거슬렸다. 자랑스러운 우리 연주자 정경화는 또 어떤가. 촉촉한 질감 속에 비수처럼 강렬한 고음이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는 명연이었다.
앞선 세 거장을 한달음에 섭렵한 뒤에야 코파친스카야의 신보를 조심스레 플레이어에 걸었다. 고음질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나이브 레이블의 녹음답게 명징한 스타카토가 현악기와 클라리넷에 의해 싱그럽게 대두된다. 드디어 세 마디째, 놀랍다! 코파친스카야의 1834년 산 조반니 프란체스코 프레센다 바이올린은 잔뜩 웅크린 채 실낱같은 볼륨으로 슬며시 들어온다. 하이페츠와는 상극이며 완벽한 은(隱)의 세계를 노래한다. 뒤이어 약음기 낀 현 위로 날아오르는 고음역에서의 대위선율은 아찔하기까지 하다. 비브라토는 과하지 않고 살갑다. 낮은 음에서의 여유는 2013년 5월, 녹음 당시 36세 젊은이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코다에서의 셋잇단음표 피치카토는 너무도 선명해 선혈이 낭자하다.
소비에트 체제하 몰도바에서 태어난 코파친스카야의 어머니 에밀리아는 바이올리니스트였고, 아버지 빅토르는 침발롬의 대가였다. 가족이 1989년 빈으로 이주하기까지 그녀는 오이스트라흐의 제자였던 미하엘라 슐뢰글에게 배웠다. 러시아 바이올린 학파의 계보를 충실히 이어받았기 때문일까. 코파친스카야의 이번 러시아 음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이스트라흐의 향기가 감지된다. 그건 역시 따뜻함으로 대표되는 인간미다. 1악장, 무반주 바이올린의 구슬픈 노래에서는 가녀림 이면에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1악장을 끝맺음하는 현악기의 피치카토는 특히 더블베이스에서 해머로 머리를 때리는 듯 둔탁하다. 온전히 모스크바 출신의 지휘자 유롭스키의 몫이다. 더블스토핑의 향연이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3악장에서 런던 필하모닉은 마치 스베틀라노프의 구소련 국립교향악단의 그것처럼 거칠게 밀어붙인다.
함께 커플링 된 스트라빈스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은 어떨까. 1927년 ‘바흐로 돌아가자’를 표방하며 신고전주의로의 회귀를 선언했던 스트라빈스키의 걸작을 다루는 코파친스카야의 해석은 프로코피예프와 동일선상에 있다. 난해한 기교를 일찌감치 넘어서서 자신만의 색깔을 두툼하게 칠하고 있다.
1악장 ‘토카타’ 시작 부분 저현악기의 피치카토를 타고 벅벅 그어대는 더블스토핑의 둔중한 울림은 오디오적인 쾌감을 굉장히 자극한다. 2주제의 전개부에서 코파친스카야는 난삽한 음표를 단숨에 제압해 질주한다. 리드미컬함은 하늘을 찌른다. 2악장 도입부의 시작음은 1악장과 같지만, 한층 더 나아가 강력한 피치카토를 쏘아댄다. 3악장의 제2아리아는 러시아적인 노스탤지어로 충만하다. 유롭스키의 뒷받침 또한 탁월하다. 감상적인 멜로디 사이사이에 작렬하는 중음의 스포르찬도는 대단히 자극적이다. 드디어 카프리치오, 피날레의 현란함에 도취돼 아파트에서 볼륨을 계속 올리다 보면 아래층의 항의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독주자·지휘자·오케스트라는 하나가 되어 널뛴다. 곡은 다 끝났는데 느닷없이 바흐의 무반주 느린 악장과도 같은 적적한 카덴차가 등장한다. 런던 필의 악장 피터르 쇠먼이 쓴 ‘깜짝 선물’은 점차 바이올린의 초절기교가 하나씩 가미되며 듣는 이의 정신 줄을 놓게 한다.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예프는 클래식 음악 입문자에게는 여전히 까다로운 작곡가다. 바이올린 협주곡은 더욱 그렇다. 이 음반의 가장 큰 매력은 애호가와 비애호가 모두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오이스트라흐의 온기와 정경화의 열기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사족 하나, 스탈린과 프로코피예프는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정치가는 잊히고 예술가는 살아남았다.
글 유혁준(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