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이 함께한 대한민국 공연예술사 30년 1986

음악가에겐 그리 긴 세월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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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1986
음악가에겐 그리 긴 세월이 아니다

백건우는 우리시대 진지하고 진솔한 음악가의 표상이다. 백건우가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진실한 음악’이다.
그가 마흔이 되던 1986년의 인터뷰에서 이미 그 면모가 묻어났다


요즘 순수음악이 정말 존재하는가라는 의아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1986년 순수음악계가 깊은 병을 앓고 있다고도 할 수 있지요. 이러한 결과는 비평가와 저널리스트들의 책임도 많습니다. 파괴적인 비판보다 도와주는 비평이 요구됩니다. 비단 예술계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2014년 순수하게 음악을 위한 음악을 해야 한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음악계에 종사하는 이들은 책임감 있게, 음악에 대한 좀더 깊은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더불어 상식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기악가 중에서도 피아니스트가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습니까?
1986년 세상에 그렇게나 많은 훌륭한 피아니스들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요. 서로가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기는 것은 무척 우스운 일입니다. 무명의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도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대가라고 항상 좋은 연주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좋은 연주를 할 가능성이 높을 뿐이지요.
2014년 연주자들이 많다는 건 그만큼 음악계가 풍성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더욱 얼만큼의 내용이 있는, 진실한 음악을 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해집니다.

30년 전의 백건우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음악에 있어서 30년이란 그리 긴 세월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음악이 무엇인지, 그 진실에 조금씩 다가갈 뿐입니다.

백건우는 배제중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공부했다. 1969년 부소니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스물여섯이 되던 1972년 라벨 피아노곡 전곡을 연주하며 뉴욕에서 데뷔했다. 국제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을 때, 백건우는 유럽으로 건너가 삶의 터전을 파리로 정했다. 즉 20대는 미국에서, 이후는 파리에서 보낸 셈이다.
1986년 파리에서 만난 백건우는 마흔 살의 음악가였다. 당시 ‘객석’이 백건우를 라벨과 메시앙으로 대변되는 프랑스 음악의 스페셜리스트라 정의 내리려 하자, “예술가는 한 곳에 머무르기 어렵지요”라며 그는 이를 유연히 거부했다. 백건우는 분명 특정 시점에 특정 작곡가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집중이 깊은 호수가 되었든 혹은 높은 산이 되었든, 걷기를 멈추진 않았다. 인터뷰 당시로부터 28년이 흘러 되돌아보니 더욱 확고해진다. 백건우는 호수나 산을 만들며 그렇게 여행을 이어갔다.
실제의 삶도 여행의 연속이었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엿본 바, 그는 연주 여행을 일로 느끼거나 힘들어하지 않는 듯했다. 실제로 웬만한 전문여행자만큼이나 많은 곳을 둘러봤을 그는, 여행의 추억을 얘기할 때면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부터는 국내의 외딴 섬에서 섬마을 콘서트를 열어가고 있다.

그해의 화제와 인물


▲ 2월 ‘객석’ 발행처인 예음재단이 실내악 전용 홀 예음챔버뮤직홀을 개관했다.


▲ 4월 동숭동에 2백 석 규모의 바탕골예술관이 개관했다. 전통과 현대 작품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포괄적으로 다루어 소극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 1975년 광복30주년기념대음악제의 성공에 힘입어 이듬해 시작된 대한민국음악제가 10회를 맞아 서울국제음악회로 명칭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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