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이 함께한 대한민국 공연예술사 30년 2001

스리 테너, 드디어 한국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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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2001
스리 테너, 드디어 한국을 찾다!

2001년 스리 테너 내한 콘서트 유치는 문화 외교의 작은 승리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당시 이들의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은 전 세계로부터 ‘문화의 도시’로 인정받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 6월 22일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4만 5천 명 관객 앞에 펼쳐진 스리 테너 콘서트는 주최 측인 MBC가 2년간의 설득으로 이뤄낸 자리였다. 비슷한 시기에 공연을 갖는 중국과의 접전 끝에 유리한 날짜를 확보했거니와 상대적으로 낮은 개런티로 이루어낸 성과는 전년도 파바로티 공연 당시 구축한 스리 테너와의 신뢰 관계에 대한 화답으로 해석됐다. 당시 ‘객석’은 스리 테너의 리허설부터 공연까지 내한 과정을 밀착 취재해 보도했다.

2001년 7월호 ‛스리 테너 콘서트’ 현장 취재 기사에서
6월 22일, 심란한 분위기 속에 인천공항에서 논스톱으로 달려온 스리 테너를 실은 승용차들이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예술의전당 음악당 옆에 도착했다. 공연을 제외하고 취재진들에게 공개된 유일한 시간은 리허설. 그것도 약 10분에 불과했다. 기자회견도 마련되지 않았고, 개별 인터뷰는 더더욱 없었다. 여장을 풀 새도 없이 바로 리허설장으로 달려와야 할 만큼 그들의 일정은 빡빡했다.
리허설 룸에는 오케스트라 단원과 스리 테너, 지휘자 야노스 아치, 시간을 체크하는 방송사 직원 두 명, 그리고 뒤에 포진하는 그들의 경호원만이 남아있었다. 컨디션 조절 탓인지 성량을 있는 그대로 발휘하지는 않았지만 리허설은 꽤 볼 만한 장면이었다.
메들리를 중심으로 진행된 리허설에서, 함께 부르는 메들리 레퍼토리별로 주도권이 바뀌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이를테면 칸초네 메들리의 경우 파바로티의 의견에 우선권이 있었으며, ‘마이 웨이’로 시작되는 할리우드 메들리는 카레라스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다. 세 사람의 카리스마에 가린 지휘자 야노스 아치는 음악적 보조자에 불과했다.
스리 테너 콘서트는 음악적으로 거의 99퍼센트 스리 테너의 자의성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까다로운 요구 조건을 적은 라이더는 백과사전 분량의 책으로 만들어져 매번 주최 측에 전달된다. 객실의 카펫을 치워달라(카레라스), 자주색과 체중계만 보면 재수가 없으니 눈에 안 띄게 해달라(파바로티) 등 우습지만 꼭 들어줘야 하는 요구 조건에 주최 측은 개업 이후 가장 까다로운 손님들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같은 날 오후 8시. 적게는 2만 원, 많게는 25만 원의 입장료를 내고 찾아온 잠실주경기장의 관객 수는 4만 5천 명. 광복 이후 열린 콘서트 가운데 최대 인파를 기록했다.
스리 테너 콘서트는 파바로티가 ‘카루소’를 부르지 않은 것을 빼면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파바로티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에서 유려하고 여유로운 고음 처리로 갈채를 받았고, 카레라스 또한 자신의 애창곡 ‘마이 웨이’를 멋들어지게 불렀다.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과 칠레아의 ‘페데리코의 탄식’ 등 스리 테너 콘서트를 통해 유명해진 오페라 아리아와 각종 월드 메들리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불렸다.
그런데 무엇인가 아쉬웠다. 이 아쉬움은 공연이 끝난 뒤 ‘축배의 노래’와 ‘오 솔레미오’가 앙코르로 이어지는 중에도 계속됐다. 은근히 기대하던 우리 가곡 ‘보리밭’은 끝내 불리지 않았다. “항상 그 나라의 특성을 살리고자 공연을 구성한다”라는 도밍고의 말과 달리, 이날 공연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은 조선시대 고궁을 본떠 만든 무대 디자인밖에 없었다.

그해의 화제와 인물


▲ 2001년 3월 국악전용방송국의 개국으로 국악FM이 출범했다. 9월 국악 공연장인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 이어 10월 서울 삼청각이 개관해 국악 인프라가 눈에 띄게 확충됐다.


▲ 5월 종묘제례가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종묘제례악이 세계 주요 무형문화유산으로 인정받았다.

서울무용제와 서울연극제를 통합한 제1회 서울공연예술제가 10월에 개최됐다. 이후 2004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로 개칭됐으며, 상근화된 축제 사무국을 개설하고 전문 예술감독제를 도입했다.


▲ 오선보로 작곡한 최초의 창작 창극 ‘영원한 사랑, 춘향이’(작곡 백대웅)가 12월 국립극장에서 공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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