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이 함께한 대한민국 공연예술사 30년 2002

자율과 다양성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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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3월 1일 12:00 오전

2002
자율과 다양성의 시대

양성원은 콩쿠르라는 경쟁 체제를 벗어나 환경과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며 음악가로서의 길을 낼 수 있음을 입증한 대표적 인물이다. 자율과 다양성으로 대변되는 2000년대의 얼굴이 되기에 충분했다

2002년 4월호 양성원의 첫 ‘객석’ 표지에서
“저는 첼로를 연주하면서 천재라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남들 다 하는 그 흔한 콩쿠르 우승도 한 적 없었죠. 음악을 한다는 것은 유쾌한 경험만 남기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는 다 때려치운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어요. 손가락이 꼬이고, 피나고, 몸도 아프고 해서 연습이나 연주를 쉬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가 아직까지 음악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건은 ‘과연 다음 장에는 무엇이 있을까?’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에요. 다른 세상이 항상 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서죠. 그건 연주를 하며 어디는 어떻게 하고, 연주하면서 실수하면 안 되고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죠.”

1967년생인 첼리스트 양성원이 처음으로 ‘객석’의 지면을 장식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셋인 1990년, 첫 귀국 독주회 기사를 통해서다. 그로부터 햇수로 20년이 지난 2009년, 양성원은 객석예술인상의 초대 수상자로 선정됐고, 대원음악상의 연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잇단 수상 소식을 전해들은 그의 지인들은 “그간 상에 대한 운이 따르지 않았는데, 참 잘됐다”라고 입을 모았단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의 2차까지 갔어요. 수상을 못했을 뿐이지, 콩쿠르에 나가긴 했어요(웃음). 콩쿠르에서 당당히 우승하고 오는 요즘 젊은 연주자들, 참 대단합니다. 저희 형(바이올리니스트 양성식)도 늘 콩쿠르 상위권에 오르거나 우승을 하곤 했지요. 그런 연주자들을 보면 존경스럽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양성원이 거듭 “재미로 한 번 봤다”고 강조하는 사주팔자에 따르면, 양성원에게는 타고난 경쟁심이 없다. 경쟁 환경에는 어울리지 않고 타인과의 승부에 관심이 없는 천성이란다. 대신 자신과의 승부욕이 강한 편이라고. 실제로도 남들과 경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달래고 채찍질하며 살았다. 가장 치열한 경쟁 환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지금의 양성원은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내가 왜 이걸 하고 싶은지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면서까지 왜 하고 싶은지 알아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클래식 음악계를, 젊은 친구들을 걱정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요즘처럼 연주가 많았던 시절은 없었어요. 예술의전당ㆍ세종문화회관에서만 연주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재단ㆍ단체가 많아지고 복지 프로그램이 활성화됩니다. 음악가가 교수ㆍ솔리스트ㆍ오케스트라 뮤지션, 세 가지로 나눠지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음악을 통해 나눌 수 있는 게 많아졌고, 이보다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그해의 화제와 인물


▲ 백낙호·정은모·이성균 등 제자들을 양성하여 피아노계의 대모라고 불린 피아니스트 김원복이 4월 타계했다.


▲ 1965년 서울바로크합주단의 창립 멤버로 한국 실내악의 초석을 다진 첼리스트 전봉초가 5월 타계했다.

5월 개최된 제1회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는 현재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국내외 우수 음악극을 소개하고 있다.


▲ 1956년 KBS교향악단을 창설한 후 1971년까지 상임지휘자를 지낸 1세대 원로 지휘자 임원식이 8월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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