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영원한 별이 된 백남준과 차범석
자신만의 영역을 끊임없이 개척해온 예술가들이 잇달아 우리 곁을 떠났다. 20세기 예술계에 한 획을 그은 전방위예술가 백남준, 텍스트를 통해 시대의 초상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 극작가 차범석이 바로 그들이다
2006년 3월호 백남준 추모 기사에서
백남준 추모회와 장례식이 있었던 2월 2일과 3일, 250석인 뉴욕 캠벨 장례식장엔 400여 명의 쟁쟁한 세계적 예술가들이 참석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세계예술계에서 차지하는 백남준의 위상이 새삼 우리들의 상실감을 더욱 깊게 해주었다. 장례식은 그의 살아생전과 다름없이 유쾌하고 멋진 행사로 조카 겐 하쿠다가 진행했고, 조문객들의 연성 역시 백남준과의 황당 어록들의 향연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한 가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장례식장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장례식 마지막에 하쿠다는 넥타이를 자르자고 제의했고, 존 레논의 부인 오노 요코가 그의 넥타이를 자르자 400여 명의 조문객들 모두 준비했던 가위로 옆 사람의 넥타이를 자르는 것으로 백남준의 예술혼을 기렸다.
백남준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작품과 예술세계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2001년 말부터 논의됐던 경기 용인시에 세워질 백남준아트센터 건립을 놓고 백남준은 “고국에 미술관을 가지는 것이 깊은 소망”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을 보지 못한 채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이후 2008년 4월 30일에 완공된 백남준아트센터는 백남준의 미래지향적 예술을 추구하며, 국제전시와 기획전시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난 2013년 백남준아트센터는 국내 미술관으로는 처음 에든버러 페스티벌 전시 부분에 공식 초청을 받아 소장된 백남준의 작품 140여 점을 현지에서 선보였다.
한국 리얼리즘의 대가 차범석 타계
2006년 6월 6일 타계한 차범석만큼 연극인으로 살아야 할 모든 삶을 살다 간 연극인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개인의 비극일 뿐만 아니라 한국 연극의 비극이기도 하다. 예술가로서 차범석의 행적은 극작가로서의 공적이 가장 크다. 70여 편의 신작 희곡을 출판하고 무대화한 그의 작품들은, 한마디로 한국 현대사회의 변천과 그 속에서 살아온 한국인의 삶의 대응을 총망라했다.
해방 이후부터 전쟁·이념 대립과 갈등·군사독재 정권의 대두와 정치·경제적 혼란, 그리고 사회적 급변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변화와 그것에 상응해 변질해가는 삶의 단면을 그는 그때그때 예리하게 포착하여 풍속화처럼 무대 위에 그려놓았다. 1955년 데뷔작 ‘밀주’부터 2003년 ‘옥단어!’에 이르기까지 차범석은 50여 년간 단 한 번도 사실주의 기조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의 대표작 ‘산불’은 1962년 작품임에도 여전히 한국 리얼리즘 희곡에서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리얼리즘의 대가 차범석의 작품세계를 이어가려는 움직임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반년 뒤인 2006년 12월 차범석연극재단 출범으로 보다 명확해졌다. 재단 사업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것은 국내 최대 상금을 건 차범석희곡상이었다. 차범석연극재단은 매년 장편 희곡을 공모해 당선작 한 편에 상금 3천만 원을 수여해왔으며, 그간 김명화·김동기·김광탁·손기호·장유정 등이 수상자에 올랐다.
그해의 화제와 인물
2006년 동계 올림픽·월드컵 이후로 병역특례 대상이 무분별하게 확대되면서 예술·체육 분야에 대한 병역 특례를 축소하고 자격 조건을 강화해야 한다는 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