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적이면서 농염한 모습의 카르멘. 원작 소설 속
냉정한 사업가였던 그녀가 오페라 무대 위 사랑에
목숨을 거는 집시 여인으로 변신하기까지
일러스트 미우
도대체 카르멘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 무대에 서는 카르멘 역의 메조소프라노(원래 메조소프라노 배역이지만 소프라노 가수가 부르기도 한다)와 관객이 동시에 갖는 고민이다. 어떤 카르멘도 관객을 완벽하게 설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농염하고 관능적인 매력이 요구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름답고 매끈한 미모에서 나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물어뜯을 듯한 열정과 달관한 듯한 무심함을 동시에 갖춰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가수를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고민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프랑스 역사학자이자 소설가 프로스페르 메리메(1803~1870)의 소설 ‘카르멘’(1845)과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1838~1875)의 오페라 ‘카르멘’(1875)의 여주인공이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오페라 ‘카르멘’의 연출가는 카르멘을 원작 소설처럼 냉정한 사업가 캐릭터로 설정할 수도 있고, 오페라 대본처럼 사랑에 목숨을 거는 여성적인 캐릭터로 설정할 수도 있다. 카르멘의 대본 작가 알레비와 메야크는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린 작가들이었다. 어째서 이 두 사람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메리메의 원작을 훼손해가며 오페라 속 카르멘의 성격을 이처럼 순화시켰을까?
메리메의 묘사를 종합해보면 카르멘은 거칠고 억세고 제멋대로인 여주인공이다. 담배 공장 동료와 싸우다가 상대방 얼굴에 십자로 칼집을 낸다. 게다가 입만 열었다 하면 거짓말이다. 호세를 꼬여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 카르멘은 자신이 그와 같은 바스크 출신이라고 속인다. 온 유럽 도시를 종횡무진하며 밀수에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아 머리는 상당히 좋은 듯하지만, 진실한 사랑이나 신의 따위는 아예 그녀 사전에 없는 것 같다. 이처럼 부정적인 면이 많은 주인공은 소설 속 인물로는 용납될 수 있지만, 무대 예술인 오페라에서는 관객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 오페라에서는 음악으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데, 노래하는 카르멘을 관객이 역겹게만 바라본다면 아무리 노래를 잘 해도 음악으로 관객의 감정이입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호세가 투우사를 사랑하느냐고 카르멘에게 물을 때 소설 속 카르멘의 대답은 이렇다.
“그래, 그를 한때는 사랑했지. 당신한테 그랬던 것처럼. 아마도 당신만큼 사랑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허허롭게 바라보는 집시 카르멘의 성격. 그런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 대답을 비제의 대본 작가들은 완전히 바꿔놓았다. “난 그를 사랑해. 목숨을 걸 만큼.” 소설에서 실랑이 끝에 호세가 카르멘을 찔러 죽이는 결정적 이유는 카르멘이 결코 그와 함께 살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순간의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페라 속의 호세는 새로운 연인인 투우사에게 달려가려는 카르멘을 저지하기 위해 그녀를 찔러 죽인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완벽한 작품”이며 “음표 하나도 버릴 게 없다”라고 극찬한 이 ‘카르멘’은 초연 때 카르멘 역을 맡은 가수 셀레스틴 갈리 마리에의 관능적이고 공격적인 연기 때문에 관객의 분노를 샀다고 한다. 청순가련한 오페라 여주인공에게만 익숙했던 관객들은 마리아 칼라스의 표현대로 “남자의 내면을 지닌 강한 여자” 카르멘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듯하다. 대본작가들이 그만큼 통속적으로 순화시켰는데도 19세기 관객에겐 카르멘이 여전히 시대를 지나치게 앞지른 여주인공이었던 것이다.
소설보다 매력적이고 긍정적인 인물로 바뀐 것은 카르멘만이 아니다. 소설 속에서 카르멘을 독차지하기 위해 상관을 살해하고 카르멘의 남편 가르시아를 잔인하게 죽인 호세 역시 오페라에서는 카르멘 외에 누구도 죽이지 않는다. 게다가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고향 처녀 미카엘라와 어머니의 존재는 호세를 향한 관객의 공감과 동정을 훨씬 두텁게 만들어주었다. 호세가 카르멘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착실히 돈 벌어 고향에 돌아가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참한 아내와 행복하게 살았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페라 관객들은 불쌍한 호세의 ‘꽃노래’에 함께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비이성적 질투에 사로잡힌 소설 속 호세에겐 전혀 공감할 수 없었을 관객들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