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성호 얀선스

경계에 선 음악가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4월 1일 12:00 오전

새로운 자극을 위해 스스로를 낯선 곳으로 내던지는 용감한 사람, 드니 성호 얀선스를 만났다.
이제 그를 설명하는 일은 ‘기타리스트’라는 하나의 단어로는 부족하다

인터뷰를 약속한 시간 오전 11시 정각,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여니 ‘객석’의 현관에 웬 슈트 차림의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흠 잡을 곳 없는 옷매무새, 반으로 접어 반듯하게 팔에 걸친 코트. 마치 잘 짜인 스케줄에 따라 철저히 계획된 하루를 살아갈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손에 든 기타를 보고 그제야 인사를 건넨다. “어머! 안녕하세요, 드니 성호 씨!” 양복 소매 자락 끝에 어울리지 않게 긴 손톱이 눈에 띄었다. 현을 튕기기 위해 일부러 길게 기른 엄지손톱이었다. ‘객석’과 기타리스트 드니 성호의 첫 만남이었다.
예상이 맞았다. 그는 ‘잘 짜인 스케줄에 따라’ 사는 사람이었다. 최근 그는 누구보다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인터뷰 당시 새 음반 녹음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있었고, 한 달 뒤엔 전국 투어 공연을 시작할 예정이었으며, 그가 프로듀서로서 기획한 나탈리 드세 내한 공연의 홍보로 한창 분주한 시기였다. 여기에 더해 대학에서 문화 마케팅 강의도 하고 있다는 그는 이 모든 일들을 그저 ‘태연하게’ 소개한다.
바쁜 스케줄이 음악가로서 부담이 되지 않느냐는 물음에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매일 정해진 시간표 속에서 반드시 3시간 이상은 스케일 연습을 한다. 수업이나 사업은 모두 ‘음악’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전혀 어려움이 없다. 그는 음악을 통해 맺어진 모든 일들이 즐거울 뿐이라 말한다. 긍정의 에너지로 무장한, 욕심만큼 열정도 많은 사람이었다.
그동안 그를 설명할 때 제일 먼저 말해온 ‘한국계 입양아’라는 단어는 이런 그의 열정을 전혀 표현해주지 못했다. 왠지 모를 아픔과 연민의 느낌을 통해서만 그를 보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패기 넘치는 음악가는 “나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라고 당차게 말한다. 문화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자신을 정의하는 하나의 기준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자유로움’이라고 표현한다. 실제로 그는 누구보다도 자유롭게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어린 기타리스트를 응원했고, 가수 인순이와 합동 공연을 했다. 그러면서도 레오 브로워르를 연주한 음반으로 독일 음악잡지 ‘클라시크(Klassik)’가 선정한 ‘세계 최고 음반 100’에 이름을 올렸다. 벨기에와 한국의 경계에서, 그리고 음악가와 공연기획가라는 경계에서 그는 자신이 맞닿아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풍요로운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먼저 기타와의 첫 만남이 궁금하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권유로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기타를 배우기 전에는 말러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다 보니 기타를 배우면서도 항상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처럼 기타를 연주했다. 호로비츠의 풍부한 음색, 아르헤리치의 자유로움과 정직함을 기타로 표현하고 싶었고, 루바토 같은 피아노적인 음악 표현도 기타로 연주할 수 있게 노력했다. 기타를 정말 사랑하지만 음악 학교에 다닐 때부터 기타의 레퍼토리 안에만 갇힌 ‘전형적인 기타리스트’는 되고 싶지 않았다. 레퍼토리에 제한을 두지 말고 다양한 감성을 표현해내는 연주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지금 갖고 있는 토머스 험프리 기타와는 운명처럼 만났다. 기타 제작자 토머스 험프리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기분 변화 폭도 아주 넓다. 그를 닮아서 이 기타도 시시때때로 소리가 바뀐다. 험프리가 기타를 만들었을 때 마침 테스트 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의 기타를 밤새도록 칠 기회가 생겼다. 그러다 이 기타를 만났다. 날이 밝자 나는 이 기타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타는 활이 아니라 사람의 손끝으로 바로 만지면서 연주하는 악기라서 다른 현악기보다 더 연주자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 같다. 악기의 몸통을 바로 감싸 안고 연주하면서 악기의 영혼을 만진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연주하기 매우 어렵고 섬세한 악기다. 긴 연습 끝에 이 까다로운 악기를 완전히 컨트롤하게 되는 순간 정말 큰 희열을 느낀다.

스승 오다이르 아사드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음악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전에 알베르토 폰세로부터 1년을 배웠는데, 음악적으로 대단한 분이지만 동시에 너무 예민해서 나와 많은 것을 함께 하진 못했다. 아사드는 폰세와 정반대의 스승이었다. 그는 다른 연주자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었다. 요요 마·기돈 크레머 등 다른 연주자들과 자유롭게 교감하면서 늘 환상적이고 창의적인 연주를 선보였다. 형제인 작곡가 세르지우 아사드와는 더없는 호흡을 보여주는 팀이다. 아사드를 보며 자연스럽게 다른 연주자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게 된 것 같다.
기타리스트로서 다른 연주자를 서포트하는 것은 정말 즐겁다. 해외 각국을 돌며 리사이틀을 할 때, 공연 중에도 무대에 홀로 서야 했지만 공연 후에도 여전히 혼자라는 게 많이 외로웠다. 협주를 하면 무대에서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위로와 안정이 된다. 음악은 요리와 같아서, 어떤 재료를 넣는지에 따라 음식의 맛이 달라지듯이 누구와 함께 하는가에 따라 다른 연주가 펼쳐진다. 서로 다른 매력을 지닌 예술가들을 만나며 내 안에 있는 다양한 음악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 즐겁다.

프로듀서와 교수로서 드니 성호는 어떤 모습인가.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지루하다. 그래서 항상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선다. 프로듀서로서는 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려고 애쓰는데 그런 연주자를 찾기가 힘들다. 이 과정에서 클래식 음악 연주자들이 점점 표준화되어간다고 느꼈다. 이럴 때일수록 연주자는 개성을 살려서 연주해야 한다. 여러 분야의 일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있고, 이것이 내 삶에 새로운 자극이 된다. 미국의 팝 스타로부터 스페인 작곡가까지 두루 만나면서 음악을 보는 견해 자체가 열리게 된 것 같다. 강단에서도 항상 이 점을 강조한다.
음악을 가르치는 일은 특별한 일이다. 진정한 음악은 결코 말로써는 전달될 수 없고 오로지 열정과 느낌으로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악을 잘 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선생님이라면, 제자의 커리어를 위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까지도 가르쳐야 한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기 때문에 직접 음악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런데 문화 마케팅을 가르칠 때는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을 살릴 수 있다. 음악을 패션·기술·드라마 등의 다른 산업과 연결 지어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도록 학생들의 견해을 넓혀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밥 딜런과 비틀스가 미국과 영국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내 제자들이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아이콘을 기획할 수 있었으면 한다.

지금 무척 행복해보이는데,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
무엇보다도 나는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꼭 말하고 싶다. 물론 내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요즘은 나보다 더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많다. 나는 한국과 벨기에, 부모님 모두를 사랑한다.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프랑스적인 감성을 받아들이며 자랐지만 동시에 내가 한국인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내 주위에는 한국인인 동시에 한국인이 아닌 친구들이 많다.
나는 외동아들로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형제가 없어 외롭기도 했지만 보통의 한국 가정보다는 훨씬 더 부모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부모님은 음악가가 아니어서 내가 음악을 하는 것에 크게 관여하지는 않으셨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항상 도와줄 뿐이었다. 우리 가족은 전형적인 ‘시골 가족’이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돈·명성·성공을 위해 치열하게 살기보다는 그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 된다고 하셨다.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었다. 다른 것보다 이런 경험이 지금 음악을 비롯해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적 감성과 한국적 감성에 경계가 있는지.
직접 작곡한 ‘아침 이슬’ ‘한국의 산’에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묘한 감정이 들어있다. 이것은 프랑스식으로 ‘멜랑콜리’하다고 표현하는데,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고 그저 담담하고 정중하게 표현하는 것을 뜻한다. 이 감성은 동시에 한국적이기도 하다. 한국도 감정의 표현에 역설적인 면이 많다. 한국 청중은 그 어느 나라보다 훨씬 열정적인데, 막상 만나보면 담담하고 담백하다. 사회적으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숨겨야 할 때가 많은 것 같다. 이런 감성이 복잡하지만 동시에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연주에서도 그것이 묻어나왔다.

앞으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그려질 거라 예상하는가.
예술가로서는 장르의 구분이 없는 새로운 공연을 만들어보는 것이 다음 목표다. 기존의 음악 공연이나 뮤지컬과는 또 다른 형태가 될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서 차근차근 구체화하는 단계를 밟아가는 중이며, 요즘은 공연을 함께 할 작사·작곡가를 찾고 있다. 상업적으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예술가로서의 야망을 실현시키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한 개인으로서 이제는 가족을 꾸리고 싶다. 어렸을 때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성들로부터 많이 배워왔다. 부드러움 속의 카리스마 같은 여성들의 덕목을 존경한다. 인생의 소울 메이트를 만나서 함께 배우며 성장하는 삶을 살고 싶다. 함께하는 가족이 생기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인생이 펼쳐질 것 같다.

글 이채은 인턴 기자(chaelee@gaeksuk.com) 사진 심규태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