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니코프와 파우스트 그리고 케라스는 빼어난 실내악 연주자들로 콘서트 무대에 함께 오르며 녹음 작업도 계속해오고 있다. 특히 멜니코프와 파우스트는 우리 시대 최고의 실내악 듀오로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과 슈베르트·브람스 그리고 최근의 베버 작품집 등 꽤 많은 음반 작업을 함께 했지만 이들 셋이 함께 뭉친 음반은 드보르자크 피아노 트리오 4번 ‘둠키’ 이후 처음이다. 그리고 오랜만의 협동 작업의 결과물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작을 상회하는 출중한 것으로 돌아왔다.
이들이 베토벤의 피아노 트리오를 녹음하면서 선택한 작품은 작품 번호상 마지막 두 곡이다. 일반적으로 7번 ‘대공’ Op.97과 함께 커플링 되는 5번 ‘유령’ Op.70-1이 아닌 자매곡 6번 Op.70-2를 선택한 것이다. ‘유령’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하이든의 유머가 살아있는 이 작품은 이들 세 사람의 당대연주 스타일과 꾸밈없는 개성에 잘 어울릴 뿐만 아니라 이들의 연주를 통해 ‘대공’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숨겨진 걸작임을 깨닫게 해준다.
베버 작품집 때와 마찬가지로 멜니코프는 그랜드피아노 대신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수집품 중에서 선택한 악기는 1828년 빈에서 제작된 것을 복원한 것으로 당대의 것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좀더 현대의 피아노에 가까운 친숙한 사운드를 지닌 것이다. 베토벤의 작품에서 요구되는 폭넓은 표현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악기 간의 밸런스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보이며 이는 꽤 성공적이다. 멜니코프와 파우스트, 케라스 모두 실내악 연주자로서 지켜야 할 균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어느 누구 하나 돌출되지 않고 거의 기계적인 정확성을 보여주면서 하나의 사운드로 섞여 들어가고 있다.
전체적인 연주 경향은 비브라토를 상당히 억제하는 시대악기 연주 스타일이지만, 지극히 상식적인 템포 설정과 과장이 없는 깨끗한 터치와 보잉을 바탕으로 하는 중용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달릴 때는 주저함 없이 나아가는데 ‘대공’보다는 Op.70-2 쪽이 더 그러하다. 특히 2악장 알레그레토의 난삽함을 폭발적인 에너지로 단숨에 풀어내버리는 이들의 탁월함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서로의 소리를 세심히 들으며 기민하게 상호작용하는 세 사람의 실내악적 천성은 느린 악장들에서 빛을 발한다. 여기에 멜니코프의 서정적인 포르테피아노 사운드와 비브라토 없이도 여유가 느껴지는 파우스트와 케라스의 고급스러운 감성이 더해져 설득력은 차고 넘친다 하겠다.
다만 ‘대공’에서는 명상적인 깊이를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호흡을 넓게 잡고 여유로움을 강조한 1악장이라든지 전작에 비해 활력이 떨어져보이는 2악장은 취향에 따라선 걸작 애호가들에게는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주자들의 확신에 찬 연주를 통해 높은 완성도를 이룩한 E♭장조 트리오 연주만으로도 이 음반은 추천 목록에 당연히 올라갈 것이며, 시대악기 연주로만 한정한다면 ‘대공’ 역시 별다른 경쟁자를 찾을 수가 없다. 현대적인 감각과 고전적인 스타일의 융합을 통해 작품의 핵심을 이상적으로 구현해낸 플로레스탄 트리오의 전집과 함께 이 음반은 우리 세대가 자랑할 만한 최고의 베토벤 피아노 3중주 해석에 해당한다 하겠다.
글 송준규(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