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셀 모네 극장의 바그너 ‘파르지팔’ DVD

모든 예상을 뒤엎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4월 1일 12:00 오전

성배도 성창도 화살 맞은 백조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가능한 예상을 뒤엎는 ‘파르지팔’이어서 신선하고 충격적이다. 게다가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깊이 빠져들게 된다. 무대가 온통 암흑에 싸여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초반 30분 정도만 인내하며 버틸 수 있다면 말이다.
바그너 탄생 200주년이던 2013년, ‘파르지팔’의 역사적인 국내 초연이 이루어졌고 공연 예습 삼아 오페라 애호가들은 이제까지 출시된 모든 영상물을 섭렵했다. 이제 또 하나의 획기적인 ‘파르지팔’이 리스트에 덧붙여진다. 2011년 브뤼셀 모네 극장 프로덕션으로 2009년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단테의 ‘신곡’을 연출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이탈리아 연출가 로메오 카스텔루치의 첫 오페라다. 이 프로덕션에 참여한 출연진과 스태프들은 이제까지 한 번도 드러나지 않은 ‘파르지팔’의 놀라운 의미를 찾아갔던 이번 작업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내가 ‘파르지팔’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이 작품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출발하고 싶었다.”
연출가 카스텔루치의 말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정보를 버리고 음악만 들었다. 백 번까지 집중해 듣고 나서 잠을 잤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은 기억상실의 상태에서 심상에 떠오른 장면들로 이 극 전체를 새롭게 창조해냈다.
바그너 원작의 기본 틀을 비워내고 새로운 것들로 채우는 방법은 빌란트 바그너 이래 ‘파르지팔’ 연출에 있어 익숙한 방식이다. 하지만 이만큼 철저하고 파격적인 비우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카스텔루치의 연출은 ‘파르지팔’의 결론인 ‘가장 고귀한 치유의 기적’이 아니라 묵시록적으로 보이는 ‘멸망의 계시’다. 1막 성배의 세계는 숲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자들과 전기톱으로 나무들을 쓰러뜨리는 자연의 파괴자로 채워졌다. 2막에서 클링조르는 연미복을 입은 지휘자인 동시에 실험실의 도살자로 등장해 나신의 처녀들을 결박해 매달아놓고 감상한다. 카스텔루치는 ‘불능’인 클링조르가 이들의 육체성을 배제하고 순수한 정신적 관조의 대상으로 바라본다고 해설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3막의 성 금요일 장면이다. 돌아온 파르지팔의 손에는 성창의 흔적도 없고, 일상적인 사람들 무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화합과 연대가 아니라 ‘군중 속의 고독’뿐이라는 서글픈 사실이다.
전주곡이 끝날 무렵 어둠 속에서 노란 무늬의 뱀 한 마리가 유혹하듯 몸을 뒤트는 모습을 만난다. 그 뱀은 무대 전면에 거대하게 투사된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귓불에 매달려 있다. 카스텔루치는 이 뱀의 춤이 바그너 음악의 메타포라고 말한다. 그 독은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쿤드리와 파르지팔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원했지만, 본의 아니게 서로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과정을 거친 뒤 결국 다시 서로를 발견하는 존재들로 그렸다. 결론은 열려있다.
노기사 구르네만츠는 전주곡이 끝나자마자 등장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 시점은 본극이 시작한 뒤로도 20분쯤 지나서다. 마침내 성배를 열었을 때는 환한 조명으로 빛나는 흰 커튼뿐. 결국 성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주역 가수 세 사람 모두 설득력 있는 가창을 들려주며, 하르트무트 헨셴이 만드는 음악은 깔끔하고 치밀하다.

글 이용숙(오페라 평론가)


▲ 카스텔루치(연출)/리처드(파르지팔)/
라르손(쿤드리)/루테링(구르네만츠)/
마이어(암포르타스)/헨셴(지휘)/
브뤼셀 모네 극장 오케스트라 외
BelAir Classiques BAC097
(Dolby Digital 5.1 Surround,
PCM stereo, 2 DVD, NTSC 1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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