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이 지니고 있는 근원적인 기질인 동시에 애호가들이 가장 환호하는 요소인 ‘우수’라는 느낌을 표현할 때, 밝음보다는 어두운 분위기에 빠르게 반응하는 러시아 음악가들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러시아 피아니스트 중 쇼팽의 대가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고 자신의 레퍼토리를 통틀어 총체적 피아니즘의 고향을 쇼팽의 작품들이라고 고백하는 이들도 많다.
루간스키는 믿음직스런 라흐마니노프 전문가인 동시에 프로코피예프의 대곡들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지만,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그러했듯 피아니스트로서의 낭만적 표현과 서정미의 출발에는 쇼팽이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슬라브적 우수를 듬뿍 담고 있는 루간스키의 쇼팽은 단정하고 절제되어 때로는 단호하기까지 한 표현의 ‘틀’ 안에서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 표현의 종류가 건조한 것이거나 딱딱한 질감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며, 오히려 걸쭉한 밀도가 느껴지는 터치와 거기서 나타나는 뉘앙스는 참으로 인상적이다. 일견 양식적이고 규범에 따르는 것처럼 들릴 수 있는 루간스키의 쇼팽이 그 음악을 접할수록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 깊은 중량감을 전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간 나이브 레이블로 출시된 리스트·라흐마니노프 등의 독주 앨범들이 에코 클라시크·디아파종 등에서 괄목할 만한 수상 결과를 내며 신뢰감을 더해가는 가운데, 이번 쇼팽의 협주곡집은 최근 출시된 동곡의 앨범 가운데 높은 완성도와 더불어 연주자의 집요한 연구로 만들어진 음악적 의도가 성공적으로 담겼다는 점에서 최고의 평가를 내려도 좋을 듯하다. 특히 악장 간의 명암 대비와 그 결과 나타나는 뚜렷한 굴곡은 쇼팽의 텍스트가 지닌 선에 자연스럽게 밑줄을 그어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1번 1악장에서 루간스키가 표현하는 루바토는 절제돼 있지만 웅변적이다. 강한 터치를 사용하지 않지만 극명한 음색을 통해 설득력을 더하며, 분명한 어조로 시를 읊조리듯 호소한다. 협주곡 녹음에서 부각되기 힘든 쉼표와 파우제를 통한 아고기크 역시 다른 연주자들과 차별된 신선함을 전한다.
라르게토의 느린 악장은 2번 협주곡이 더욱 호연이다. 러시아 사람 루간스키의 연주는 그들 특유의 비장미를 담고 있어 제아무리 달콤함을 내보여도 여간해선 들뜨거나 가벼워지지 않는데, 이런 바탕색을 깔아놓고 그리는 청년 쇼팽의 수줍은 사랑 고백은 매우 진하고 뜨거운 열정을 담고 있다. 여기서도 루간스키의 균형감각은 빛을 발하는데, 짙고 강렬한 터치를 의식해서인지 중간부에 나타나는 레치타티보 풍의 패시지에서 즉흥적 감상을 배제하고 조심스럽게 마무리하고 있다. 오디오를 통해 들어도 마치 옆에서 연주하는 듯 생생한 루간스키의 타건은 두 곡의 3악장에서 마음껏 폭발한다. 시종 자유분방한 표현과 비르투오시티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앞서 두 악장에서의 절제가 수반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며, 현명한 피아니스트는 이 균형의 추를 작품의 마지막 음표까지 놓치지 않고 마무리한다. 템포와 다이내믹 면에서도 과장이 느껴지지 않으며, 이른바 ‘생각하는 감성’의 모범답안을 제시하듯 모든 요소들이 조화된다. 알렉산드르 베데르니코프가 지휘하는 신포니아 바르소비아의 다소 변덕스런 표정 연출도 루간스키의 해석과 적절히 어우러진다.
글 김주영(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