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교수 임용된 베이스 전승현

이유 있는 그의 선택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14년 5월 1일 12:00 오전

지난 17년간 해외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해온 베이스 전승현.
서울대 음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동시에 5월 서울시오페라단의
베버 ‘마탄의 사수’ 무대를 앞두고 있는 그를 만났다

지난 2013년 바그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그 어느 해보다 우리 가수들을 주목했다. 키릴 페트렌코가 지휘봉을 잡고 프랑크 카스토르프가 연출을 맡은 ‘니벨룽의 반지’ 중 ‘신들의 황혼’에서 베이스 아틸라 윤(전승현)이 열연을 펼쳤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는 베이스 사무엘 윤(윤태현)이 지난해에 이어 다시 무대에 올라 바그너의 성지에서 한국 음악가의 저력을 다시금 보여주었다. 특히 전승현은 ‘니벨룽의 반지’ 4부작으로 10년 연속 바이로이트 무대에 섰던 강병운에 이어 하겐 역을 맡아 스승의 발자취를 이어가는 동시에 혹평과 찬사가 엇갈린 무대 사이에서 빛을 발했다.
전승현은 1998년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독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무대를 시작으로, 2002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투란도트’ 티무르 역, 2004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달란트 역으로 라 스탈라 데뷔 등 세계를 무대로 활발히 활동해왔다. 지난 2011년에는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독일 문화부 장관이 수여하는 카머젱어(궁정가수) 칭호를 받았다. 올해부터 서울대 음대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오랜만에 국내 무대에도 오른다. 서울시오페라단 ‘마탄의 사수’(5월 21~2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은둔 수도자인 예레미트 역을 맡아 연습과 교수를 병행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를 서울대 교정에서 만났다. 다음은 전승현과의 일문일답.

이름 앞에 늘 최초·최연소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1997년 서울대 음대 대학원 재학 당시 한국인으로는 처음 빈에서 열린 벨베데레 성악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고, 이듬해 슈투트가르트 오페라의 베르디 ‘리골레토’로 얼굴을 알렸다. 1999년엔 ‘로엔그린’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최연소 가수로 올랐는데.
그땐 뭐가 뭔지도 모르고 다녔다. 바이로이트에 처음 데뷔했을 때가 스물여섯 살이었다. 1998년 시노폴리 앞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우연히 그 자리에 있던 볼프강 바그너가 내 목소리를 듣고 바이로이트로 초대해 그 다음 해 정말 작은 배역으로 무대에 서게 됐다. 바이로이트에 선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인데, 당시에는 그런 걸 잘 몰랐다.
이후 2003년까지 계속 바이로이트 무대에 서다가 10년 만인 지난 2013년 ‘신들의 황혼’ 하겐으로 다시 바이로이트를 찾았다. 소회가 어땠나.
지난 5년간 유럽의 주요 극장들에서 하겐 역을 맡아왔다. 그렇게 검증된 뒤 바이로이트에서 불러주더라. 바이로이트 무대에 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제대로 느꼈다. 그래서 지난해엔 정말 영광스런 마음으로 무대에 설 수밖에 없었다.
해외에서는 ‘아틸라 윤’으로 불린다. 외국식 이름을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스승인 강병운 선생님은 외국 사람들이 발음하기 힘들어 해서 이름을 ‘필립 강’으로 바꾸셨다. 내 이름도 못지않게 발음하기 어려운 편이라 그 이야기를 듣고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바꿨다. 중앙콩쿠르 1위를 수상할 때 불렀던 것이 ‘아틸라’의 아리아였는데 그때 주변에서 외모가 아틸라와 비슷하니 이름도 똑같이 하면 좋겠다는 이야기들을 해서 바꿨다(웃음). ‘전’이라는 발음은 아무리 고쳐둬도 유럽 사람들은 못한다. 그래서 ‘윤’이라 불린다. 가수로서는 아틸라 윤으로 살고, 무대를 내려오면 전승현으로 산다.
독일·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이탈리아·스페인·미국 무대에도 자주 올랐고, 다양한 연출가들과 작업했다. 현대의 파격적인 연출과 전통적인 연출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 편인가.
예전엔 파격적인 연출가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었는데, 경험이 쌓이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연출가 나름의 철학과 이유가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면서 현대적인 연출도 이해하게 됐다.
연출가들이 작품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만큼 가수에게 요구하는 것도 많아졌을텐데. 곤란한 요구를 받을 때는 어떻게 하나.
싫어하는 것을 요구받으면 처음부터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하게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예전에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할 때 구명보트 위에서 노래하라는 주문을 받은 적이 있다. 보트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어떻게 제대로 노래할 수 있겠나. 그것 때문에 연출가와 계속 신경전을 벌였는데, 나중에 내가 보트에서 넘어지는 모습을 보더니 그제야 포기하더라. 요즘에는 객석을 등지고 노래하는 것이 연출가 사이에서 유행이다. 엎드리거나 기어가면서 노래하는 것도 자주 주문받는다. 처음엔 힘든데, 연습 기간에 계속하다 보면 결국 못하는 건 없게 되더라. 5층 높이의 발코니에서 노래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너무 높아서 지휘자가 잘 안 보일 지경인데, 그림이 좋으니까 연출뿐 아니라 지휘자도 위에서 부르라고 부추겼다. 그 높이에선 오케스트라 음악도 잘 안 들리거니와 고소공포증 때문에 도저히 못하겠다 말하고 내려왔다.
다양한 극장에 올랐지만, 아무래도 가장 편하게 느끼는 곳은 독일 무대에 처음 데뷔한 슈투트가르트 오페라가 아닐까 싶다.
올해로 슈투트가르트 무대에 오른 지 17년이 됐다. 심적으로 적응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더 빠른 사람들도 있는데, 난 좀 오래 걸린 편이다. 지금은 무대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도 가깝게 지낸다. 사실 가수로서 무대 위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잠 못 이룰 정도로 부담스러운 일이다. 특히 다른 극장에서 공연할 땐 작은 실수에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보는데, 슈투트가르트에선 원래 실력을 아니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다음엔 더 잘할 거라고 격려해준다. 여기엔 오래된 고정팬들도 있고.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좋아해주신다. 길에서 마주치는 아주머니, 아저씨들도 많이 알아봐주시고. 외국 생활이 나그네 인생인데, 그런 소소한 것들이 참 위안이 되더라.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무대에는 한 해 평균 몇 회 정도 오르나.
몇 해 전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종신단원이 됐다. 극장과 첫 계약을 한 이래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 연장을 해서 16년이 넘으면 종신단원으로 계약할 자격이 주어진다. 슈투트가르트 발레에 있던 무용수 강수진 씨가 한 계약과 같은 거다. 종신단원은 한 해에 열다섯 번 정도만 공연한다.
2011년에는 독일 정부로부터 카머젱어(궁정가수) 칭호를 받았다.
받으려고 노력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받게 됐다. 독일인에게도 쉽게 주어지지 않는 명예고, 설령 받더라도 빨라야 50대에 받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하더라. 종이에 빨간 글씨로 이름이 적힌 종이 한 장을 주는 건데, 그때 처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 열심히 했구나 싶기도 하고.
카머젱어 칭호를 받은 후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카머젱어에겐 우대 혜택이 있다. 벤츠 같은 곳에서 차를 구입하면 20퍼센트 할인해준다(웃음). 근데 나는 중고차를 사서 그런 혜택 받을 일이 없더라. 그 외엔 경력을 이야기할 때 한 줄이 더 늘어났다는 것 정도다. 다른 극장에 가서 젊은 나이에 카머젱어라고 하면 사람들이 놀란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이후에 다 잊었다. 매일 ‘나는 카머젱어다!’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건 아니니까. 이런 질문에 뭔가 멋있게 말해야 할 것 같지만, 이게 사실이고 그게 나다.

젊은 나이에 카머젱어 칭호를
받았다고 하면 사람들이 놀란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이후에 다 잊었다.
매일 ‘나는 카머젱어다!’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건 아니니까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종신계약 포기하고 결정한 한국행

스승인 베이스 강병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나.
대학교 4학년 때 처음 선생님을 만났다. 첫 레슨 날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첫 날에 선생님이 악보에 가사를 가리키며 무슨 뜻인지를 물어보셨다. 그때 난 노래의 전체적인 내용만 알지 단어 하나하나의 뜻은 모르고 느낌으로만 불렀다. 그래서 프랑스어·독일어·이탈리아어 사전을 사서 단어를 일일이 찾아가며 공부했다. 선생님은 모든 단어의 뜻을 숙지하고 있어야 레슨을 해주셨다. 그전까지 도서관에 가본 적도 없었는데, 그때 정말 많이 공부했다. 대학원 재학 시절에 1년간 벨베데레 콩쿠르를 준비시켜주신 것도 다 강병운 선생님이었다. 그때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나왔던 슈투트가르트 극장장과 맺은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그 극장에서 노래를 하고 있다. 단 한 번의 인연으로 그렇게 됐다.
이번 학기부터 서울대 음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한국에서 후학 양성을 결심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모교라는 점이 가장 컸다. 그전까지는 노래하는 것만 생각하고 살았다. 예전에 독일의 몇몇 음대에서 교수직을 제안 받았지만 그땐 노래하는 데에 마음이 제일 컸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대에서 교수를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느낌이 좀 달랐다. 예전엔 이런 상황을 상상조차 못했다. 어른들이 보면 웃으실 테지만, 마흔 살을 기점으로 생각이 좀 바뀐 것 같다.
슈투트가르트 오페라와의 종신 계약은 앞으로 어떻게 되나.
서울대 임용 발표가 올해 2월에 났다. 오페라하우스에 이야기했더니 겸직은 안 된다고 하더라. 그날 집사람과 상의했는데 5분 만에 끝났다. 한국에 가기로 확정하고, 다음 날 종신단원 사직 절차를 밟았다. 오페라하우스 담당자가 놀라서 정말 그만두는 거냐고 몇 번이고 묻더라. 67세까지 보장받는 자리인데 말이다. 이제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무대에 설 때는 게스트 신분이다.
약 10년 전 ‘객석’과의 인터뷰 당시 ‘악역을 소화하는 데 자신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 생각이 지금도 동일한가.
그때 그렇게 말했던가. 그건 하수들이 하는 이야기인데(웃음). 아마 젊은 날의 패기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자신 있는 역이 하나도 없다. 그저 그 역에 맞도록 노력할 뿐이다. 무대에 오르면 ‘배역’이 아닌 ‘바로 그 사람’이 되어서 연기한다. 아무래도 악역을 하면 마음이 좀 힘들다. 예전엔 시키는 대로 해서 잘 몰랐는데, 지나치게 몰입하면 힘들다는 걸 무대에 설수록 느낀다. 지금은 적당하게 몰입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베이스 가수로서 소화하는 배역 가운데 ‘신들의 황혼’의 악역 하겐보다는 ‘파르지팔’의 성배 기사인 구르네만츠를 더 선호할 것 같은데, 실제로 어떠한가.
둘 다 정말 쉽지 않은 배역이다. 노래 분량은 구르네만츠가 더 많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하겐이 더 힘들다. 구르네만츠는 역 자체가 부드럽고 위엄 있어서 좀 덜 부담스럽지만, 하겐은 사람들을 다 죽이고 너무 드라마틱하니까. 구르네만츠를 할 때 기분이 훨씬 좋은 건 사실이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는다면.
‘신들의 황혼’ ‘파르지팔’ ‘트리스탄과 이졸데’. 희한하게 다 바그너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바그너 팬이기도 하고. 바그너 작품은 무대에서 노래할 때마다 음악 때문에 매번 소름이 돋는다.
해외에서 큰 명성을 얻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일부 팬들에게만 이름이 익숙하다. 자신을 알리는 데에 인색한 편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낯을 많이 가리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말도 잘 못 건네는 성격이다. 홍보를 잘 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런 것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다. 실력 하나면 되지 않나. 사람들이 한국에선 그런 것이 안 통한다고 많이 말하는데, 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내 생각은 마찬가지다.
5월 세종문화회관에 오르는 베버 오페라 ‘마탄의 사수’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해외 공연 때문에 연습에 참여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처음에 서울시오페라단 이건용 단장에게 제안을 받았을 때, 작품 말미에 나오는 은둔자 예레미츠 역을 맡기로 결정했다. ‘마탄의 사수’는 민족적이면서 민속적인 느낌이 강한 작품이라 독일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고 즐겨 보는 작품이다. 한국 관객들에겐 독일 낭만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이다.

글 김선영 기자(sykim@gaeksuk.com) 사진 심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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