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일~4월 11일 국립국악원 예악당
우면산에 위치한 국립국악원. 평소에 늘 조용해보이지만 안에는 네 개의 소속 예술단이 연동되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궁중음악에 중심을 둔 정악단, 창작국악을 담당하는 창작악단, 궁중정재와 민속춤을 아우르는 무용단, 민속악 중심으로 운영되는 민속악단이 그것이다. 이번 ‘종가(宗家)’ 시리즈는 네 개 예술단의 무대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차례대로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먼저 이런 평가로 시작해보자. 정악단의 ‘종묘제례악’(3월 20·21일)은 ★★☆, 창작악단의 ‘10(열)’(3월 27·28일)은 ★★, 무용단의 ‘마지막 황태자, 조선의 꿈을 보다’(4월 3·4일)는 ★★★, 민속악단의 ‘合(합)’(4월 10·11일)은 ★★☆을 주고 싶다. 다시 보고 싶은 순위라면 1위에 무용단을 겨우 놓겠고, 나머지는 제외시키겠다. 전체적으로 점수가 낮다. 사실 네 개의 단체 모두 연주력과 기량에 있어서는 ★★★★☆이었다. 그렇다면 별점을 까먹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관객 소통 능력이다.
결론부터 짓자면 이 시리즈를 기획·진행한 국립국악원이 단체와 레퍼토리 ‘나열’에는 능했지만 ‘엮음’과 ‘배치’에는 약하다는 것이다. 즉 적군을 제압하는 최성능의 대포를 다량 확보했고 포문도 활짝 열어젖혔지만 문제는 ‘사정거리’에 있었다. 즉 관객과 만나는 사정거리를 국립국악원과 네 개의 단체 모두 정확히 가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악단의 ‘종묘제례악’을 예로 들어보자. 이날의 연주는 타자가 공인하는 최고의 연주였다. 하지만 관객의 대부분은 졸음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 종묘제례악을 수사하는 ‘중요무형문화재 1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종목’ ‘궁중음악의 정수’라는 말들은 전문가들이 내세우는 표어이지 국악과 처음 만나는 관객과 대중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관객에게 필요한 것은 곡을 십분 이해하고 내재된 심미적 요소를 맛볼 수 있게 안내하는 ‘설명’과 ‘말’이었다. 하지만 그 역할은 연주 전, 지극히 교과서적인 영상 다큐멘터리로 대체되었을 뿐이었다.
지금의 국악 관객에게 필요한 것은 레퍼토리 연주에 끈덕지게 붙어 연동되어야 할 교육적 접근과 해설 언어들이다. 설령 곡 하나를 둘러싼 ‘설명’에 밀려 전곡 감상이 불가능하다 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 ‘명품’ ‘찬란한 유산’은 국악계 전문 관계자가 내세워야 할 게 아니라 이런 과정을 거쳐 국악을 사랑하게 된 관객이 결론적으로 해야 할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국립국악원의 모든 무대는 ‘공연장’과 동시에 관객을 향한 ‘교단’이 되어야 한다.
롤 모델을 내놓으라고? 나는 마지막 공연인 민속악단의 무대가 막을 내렸을 때 바로 옆에 위치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로 튀어 들어갔다. 인천시향을 이끄는 지휘자 금난새는 음악적 무게가 만만치 않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에 관해 설명 중이었다. 해설 중간마다 주요 선율들을 ‘맛보기’로 선사하기도 했다. 이후 전곡을 완주했다. 감상 전에 먼저 접한 해설과 선율이 연주 중간에 나올 때마다 관객은 ‘아! 저거구나!’라는 표정을 짓는 듯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결국 보인 만큼 기뻐하게 된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생각해보자. 종묘제례악의 한 대목을, 혹은 창작악단의 지휘자가 해설로 주요 선율을 한 숟갈 떠서 관객의 귀에 넣어주었다면, 무용수의 손짓에 깃든 상징과 의미를 누군가가 꼼꼼히 설명해주었다면 어땠을까? 찬란한 유산은 결국 보존과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향유자와의 소통 부재에서 죽어간다. 음악 하나에 수반될 해설과 교육적 기획에 의한 접근을, 더 낮은 자세로 시도하라.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국립국악원